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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접하게 된/책

라면을 끓이며

by 심심한 똘이장군 2017. 1. 2.

산문집은 소설에 비한다면,

보다 더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 삶을 바라보는 시각 등을 느끼기 쉬운 장르라고 볼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라면을 끓이며'는

김훈의 글솜씨가 드러나겠지만, 글솜씨보다는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더 잘 드러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밥, 돈, 몸, 길 과 글을 통해 자신의 생각들을 토해낸다

 


 


 

 

 

라면과 짬뽕을 통해 산업화 시기에 우리나라에 보급되어 현 세대의 이전 세대 산업역군들을 먹여 살린 음식이 보이지 않은 빈부의 차이를 의미하게 되는 과정에 대한 소회라든가


'짬뽕 값의 양극화는 시장의 자유로운 질서이며 보이지 않는 손의 조화라고, 다들 알고 있다. 그렇게 말하게끔 되어 있다. 강제로, 채찍을 휘두르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 손의 인도를 받아서, 없는 자들은 스스로 3500원짜리 짬뽕을 먹고, 아직도 견딜 만한 자들은 8000원짜리를 먹게 된다. 음식을 파는 쪽에서도 값을 올리고 또 내려서 양극화된 격차 안에 양쪽 모두를 편안하게 수용함으로써 시장의 질서는 자유롭고 조화롭다.'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간에 발생하게 되는 차이에 대한

그래서 밥벌이에 대한 지친 안타까움도 토로한다.

 

'나는 수감중인 대기업 총수에 대한 가석방 결정이 법무장관의 '고유권한'이라는 언설에 반대한다. 장관이 자의적으로 행사할 수 있다는 의미의 고유권한이란 존재할 수 없다. 이사금이 아니고 마립간이 아닐진대, 어찌 직무에 따른 권한이 그 직위에 '고유'하게 귀속될 수가 있겠는가. 장관은 다만 그 가석방이 법치주의의 원칙과 절차에 비추어 정당한 것인가 아닌가를 공적으로 판단할 의무가 있을 뿐이다. 저 사람은 풀어주면 이 나라가 얼만큼 더 잘 먹고 잘살게 될 것인가는 법무장관이 판단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장관의 판단의 준거가 될 수 없다. 자유당 때부터 지금까지 전개된 무법천지의 관례도 장관이 참조할 전례가 되지 못한다. 저 사람을 지금 풀어주면 이 나라는 무엇을 잃어버리고, 무엇이 무너져내리며, 후세의 더 큰 무너짐을 어찌 감당할 것이며, 어떠한 앞날이 닥쳐올 것인가를 판단하는 것이 장관의 일이기를 나는 바란다. 지금, 그날 벌어 먹거나 한 달 벌어서 한 달을 먹거나, 사람들은 먹고살기의 지옥을 헤매고 있다. 이 겨울에 살기 위한 아무런 방편도 마련할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을 나는 알고 있다. 이 중생고가 수감중인 대기업 총수의 석방 주장을 정당화하고 세월호의 슬픔과 분노에 대해 침묵을 요구하는 근거가 된다는 것은 기막힌 일이지만, 기막히게도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

 

밥벌이에 대한 안타까움이 크기에

그래서 밥벌이에 대한 구속과 회피할 수 없는 현실에 대해

우리들의 목표는 밥벌이가 아니라고 외치는지도 모르겠다


'모든 밥에는 낚싯바늘이 들어 있다. 밥을 삼킬 때 우리는 낚싯바늘을 함께 삼킨다. 그래서 아가미가 꿰어져서 밥 쪽으로 끌려간다. 빼도 박도 못하고 오도 가도 못한다. 밥 쪽으로 끌려가야만 또다시 밥을 법 수가 있다.

이 세상의 근로감독관들아, 제발 인간을 향해서 열심히 일하라고 조져대지 말라. 제발 이제는 좀 쉬라고 말해달라. 이미 곤죽이 되도록 열심히 했다. 나는 밥벌이를 지겨워하는 모든 사람들의 친구가 되고 싶다. 친구들아 밥벌이에는 아무 대책이 없다. 그러나 우리들의 목표는 끝끝내 밥벌이가 아니다'

 

'어선들의 반 토막 태극기는 살아가는 일의 수고로움과 수고의 경건함을 보여주었다.

남루는 그 경건이 드러나는 방식이며 외양이었다.

반 토막 태극기는 맹렬하게 펄럭였다.

아름다운 태극기였다.

권세 높은 관청 지붕에 높이 솟은 태극기보다 이 닳아빠진 반쪽짜리 태극기는 얼마나 순결한가

입을 벌려서 직업적으로 애국을 말하지 않아도, 먹고사는 노동의 수고로움 속에서 애국은 저절로 해풍에 펄럭이고 있었다.'

 

 

여행은 세계의 내용과 표정을 관찰하는 노동이다.

계절에 실려서 순환하는 풍경들, 노동과 휴식을 반복하면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들,

지난가는 것들의 지나가는 꼴들,

그 느낌과 냄새와 질감을 내 마음속에 저장하는 것이 내 영행의 목적이다

 

 

'맛은 화학적 실체라기보다는 정서적 현상이다.

맛은 우리가 그것을 입안에서 누리고 있을 때만 유효한 현실이다.

그 외 모든 시간 속에서 맛은 그리움으로 변해서 사람들의 뼈와 살과 정서의 깊은 곳에서 태아처럼 잠들어 있다.

맛은 추억이나 결핍으로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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