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김씨 왕족은 흉노의 후손인가? 문무왕 비문의 비밀
문무왕 비문 속의 충격적 기술
신라의 태조는 성한왕이라는 기록과 김일제 이야기. 그도 역시 김씨이므로 김알지의 후손이어야 했다
중국에 가면 한무제 왕릉 건너편에 김일제 무덤이 자리잡고 있으며 중국 역사서 한서에서는 김일제의 자가 옹숙, 본래 흉노의 태자였다고 나온다.
문무왕 비문에는 문무왕 15대 선조가 태조 성한왕. 그의 동생 김인문의 묘비에도 태조 한왕이 등장한다.
한왕은 성한왕을 축소한 것.
흥덕왕 비석에도 태조 성한왕이 흥덕왕의 24대조로 나온다 문무왕은 흥덕왕의 9대조라 나오니 문무왕 비문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사실이다.
이 사실들은 기존의 박혁거세 시조설과 김알지 신라김씨 시조설과 다른 내용이다.
문무왕 비문을 계속 보면 투후 김일제의 후손이 7대째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이어져왔는데 그 7대후손이 성한왕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한서에는 김일제가 금인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흉노족의 자손이라 해 중국에서 최초로 김씨 성을 갖게됐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중국 연지산은 대대로 흉노족 왕비를 배출한 산으로 이 산 출신인 알씨에서 왕비를 간택했고, 알은 황금이라는 뜻으로 김일제의 어머니 역시 연지산 출신의 알씨로 기록돼 있다.
알, 김알지랑 이름이 비슷한데, 이게 한반도로와서 알지가 됐다는 것이다
또한 중국 신나라의 패망과 함께 김일제의 후손들이 보복을 피해 신라지역으로 이동하게 되었고, 당시 신나라 화폐인 화천이 김해패총에서도 발견된 것을 보면 중국의 김알지와 신라는 연관이 있다는 추정을 하고 있다.
왕의 요리사는 남자였다.
임금이 먹는 음식을 수라라 불렀는데 이는 고려후기부터 등장한 것으로 보아 원나라에서 온말로 유추되는데 이는 몽골어로 음식인 "슐라"에서 유래했다는 게 정설이다.
선묘조제재경수연도라는 병풍그림속에는 연회장면이 담겨있는데 요리를 하는 사람들이 다 남자로 이루어진 모습니다.
세종때 발급한 수라간 노비들 출입증기록에 여자도 있지만 절대다수는 남자로 남녀성비가 14:1 정도 된다. 수라간의 주역은 남자였던 것이다.
중국 일본도 마찬가지로 수라간 일은 남자의 몫, 일본은 나르는 일까지 남자가 도맡아 했다고 한다.
수라간이 남자들로 구성될 수 밖에 없는 첫번째 이유는 노동강도다.
궁중음식은 섬세하고 손이많이가는 음식이라 조선의 수라간은 분업화 되어 있었다. 요리사 400여명, 이들이 하루 2교대로 궁중음식 담당했다고 하니 엄청난 노동강도가 요구되었다.
탕하나를 끓여도 3~4시간이고.. 조리시설은 모두 나무나 숯을 써야 했다.
이러다보니 요리를 맡는 각색장들은 힘들어했고 실록에는 그들의 면천이라든가 휴가 등 그들을 붙들어두기 위한 다양한 고육지책이 나온다
또 다른 이유는 왕의 신변보호
상선내시와 수라간의 총책임자는 임금을 잘 보필할수있는 정치적 측근일 수 밖에 없었다. 정적세력에게 왕의 음식을 맡기지않기 위해서. 왕의 신변보호에는 일선요리사들 역할이 매우중요해서 여성보다는 남성이 유리하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또 약식동원 사상에 의해 요리사들의 기초의학상식은 필수였고 이런 공부를 하고 음식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여성보다는 남성이 낫다고 평가를 한 것이다.
그녀는 왜 죽음을 택했나? 순장의 비밀
경북 고령의 대가야왕릉전시관에서 순장문화의 유래를 짐작할 수 있다.
가야 지역최대규모의 고분인 지산동 44호분, 주실과 부실을 가운데두고 32기의 순장석실이 있다. 40여명이 순장된 것.
순장묘가 유독 가야와 신라지역에서만 나온다는 점은 순장이 영남에만 한정된 풍습이고. 또 한시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진 풍습이다. 결국 이는 순장이 자생문화가 아니라 외부유입 문화라는 증거가 된다.
금관가야의 지배층묘역인 김해대성동고분군에서 순장묘가 발견됐는데 여기서 나온 가야유물중에 동복이 발견됨. 동복은 북방기마민족문화를 대표하는 지표유물 함께 발굴된 호형대구 역시 전형적인 북방기마민족의유물 특히 내몽고의 호형대구는 김해의 것과 같은 틀에서 찍어낸듯 닮아있다.
순장은 전통적으로 유목민의 풍습이었다. 농경사회는 인구가 곧 노동력이라 순장문화가 나타나기 어렵다. 그러나 목축 유목민족에게는 노동력보다 빠른이동이 필수적이어서 순장문화가 나타날 수 있었다. 남쪽 옛신라와 가야에서만 나타나는 순장풍습은 북방 유목문화에서 유입된 외래문화였다
부족국가 체제에서 벗어나 본격적 중앙집권국가 시대가되면서 백성은 강력한 국가를 만드는 중요 구성원으로 여겨지고 3~400년간의 순장제도는 사라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남한산성에는 거대 무기고가 있었다. 슈퍼 기와의 비밀
남한산성에서 신라시대의 거대한 기왓장이 발견됐다. 조선의 기와보다도 두껍고 묵직한 것으로 이 슈퍼기와는 자동차 바퀴도 버틸 정도였다.
남한산성 행궁지에는 건물지도 발견되어 그 크기를 추산해보니 동양최대의 크기였다..
초대형 기와를 이고 있던 남한산성의 초대형 건물은 무기고였다.
삼국사기에는 문무왕이 주장성을 축성했다고 돼있는데, 초대형 기와 명문에는 마산정이라 돼있다.
정은 신라의 군사조직. 중앙의 구서당과 지방군인 10개의 정. 그런데 이 열개의 정 이름과 깃발색깔은 기록으로 남아있지만 마산정은 없다.
고구려와 백제도 망해서 없는 시점. 왜 그런 대형 무기고가 필요했을까? 신라와 문무왕의 마지막 열망은 통일이었고 이를 막는 당과의 싸움을 위한 것. 당나라군이 한강을 차지하면 수로로 충주에 이르고 새재를 넘으면 문경과 낙동강. 낙동강 수로면 경주까지의 진격도 어렵지 않음. 그래서 한강방어가 필요했고 그래서 주장성을 지었다
경기도연천에서 벌어진 매소성 전투때 주장성에서 보급한 무기와 물자로 당나라군에게 승리하면서 실질적인 통일을 이루게 되었다.
백제판 '사랑과 전쟁', 서동은 선화를 버렸나. 미륵사 장엄사리의 비밀
무왕 때 지어진 미륵사 복원과정에서 사리를 봉안한 기록인 금제사리봉안기가 발견되었다. 그런데 여기에는 왕후에 대한 기록이 나온다. 왕후가 좌평 사택씨라 나온다. 무왕, 즉 서동의 부인은 선화공주라 알려졌던 사실을 부정하는 내용이다.
무왕이 미륵사를 창건한 이유는 익산천도를 추진하기 위한 것으로,
익산의 왕궁리 인근에는 제석사가 있었다가 무왕 때 불에타 없어졌는데 여기서 발견된 게 수부기와. 수부는 바로 수도를 뜻하는 말.
또 와적기와단은 새로운 건축기술로 백제가 사비로 천도한 다음에 나타나는 기술로써. 백제 사비시대에 왕궁리에 공사가 이뤄졌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또 왕족과 귀족이 썼을 장신구와 공예품 만들던 공방지도 발굴되었는데, 이런 것들은 익산의 왕궁리가 새로운 도시임을 증명한다.
당시는 성왕이 관산성에서 패해 신라 병졸에게 죽임당한 때 무왕은 신라에대한 굴욕을 갚으려 집요하게 신라를 공격했다.
백제 멸망 후 아버지 의자왕과 같이 당나라로 끌려갔던 백제의 마지막 태자 부여융의 묘지명.. 여긴 보통 증조할아버지까지 나와야 되는데 무왕까지만 나오고 법왕의 이름이 없다. 무왕의 조카 복신은 백제부흥군을 이끌던 백제의 영웅. 무왕의 조카 복신이면 백제왕가의 성이 부여씨니까 복신도 부여복신 그런데 662년 일본서기는 그를 귀실복신이라 칭함. 흑치상지의 흑치 역시 부여씨에서 분화된 성이라 나와있는데 귀실 역시 그런 거 아닐까? 무왕은 백제왕실에서 떨어져나온 몰락왕족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삼국사기가 그렇게 쓴 건 백제왕족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
선덕여왕이 진평왕의 첫째딸이고 둘째가 김춘추의 어머니. 왕의 어머니가 아니던 선화는 삼국유사에 기록되지 못했다. 의자왕의 어머니는 선화공주가 아니라 사택씨 황후일 가능성이 높다.
사택왕후는 무왕 이후 의자왕대 최고위직인 대좌평역임한 백제정치의 중심에 등장하는 금강유역 대표가문. 그럼에도 선화공주이야기는 삼국유사에 분명히 나온다.
무왕이 신라의 선화공주와 결혼을 했다면 화해정책의 결과로 추측된다. 그의 집권 초기 10여년간 신라에 대한 공격이 전혀없었다.는 점은 그것을 증명하는 것으로, 서동과 선화공주의 신화는 후세에 과장된 이야기 일뿐 선화공주는 사택왕후의 등장으로 백제정계 중심에서 밀려났을 것으로 추측된다.
왜 정적에게 비밀 편지를 보냈을까? 정조 어찰 299통의 진실
정조의 어찰.. 이 어찰은 심환지에게 간 건데 심환지는 정조를 비난하는 벽파의 핵심인물이었다.
정조는 자기 즉위를 반대한 죄로 유배간 친고모 화완옹주를 사면하려 했다 그는 사도세자를 죽게한 인물 그러나 심환지가 반대하고 나섰다. 결국 정조는 심환지를 파직. 그런데 이 사건 하루전날 정조는 심환지에게 편지를 보냈다 미리 짠 행동.
정조는 심환지 뿐만 아니라 같은편인 시파 채제공과도 편지를 주고 받았는데,
정조의 어찰은 당쟁을 뚫고 대신들과 소통하기 위한 정조의 비책 하나였다.
1300년 만에 밝혀진 충격 보고서. 의자왕 항복의 진실
3천 궁년라는 말로 대표되는 백제멸망의 원흉, 방탕한 생활자라고 알려진 의자왕.
하지만 거기에는 알려진 것과 다른 또다른 사실이 존재하고 있다.
원래 삼국시대의 보편적 전술은 거점성을 점령하고 주변을 평정해 차근차근 진군하는 정책이었다. 그러나 연합군은 영토가 아니라 백제멸망을 목표로 사비도성으로 직진하는 전술을 사용했다. 황산벌 전투 이후 백제군은 사비남쪽에서 18만연합군과 전투를 벌였지만 역부족, 결국 개전 5일째 의자왕은 웅진으로 지휘부를 옮겼고 사비도성은 무너지게 된다.
그러나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옮겨 장기전에 대비하는데 대규모 나당연합군을 방어하기엔 평지인 사비도성보다 험준한 웅진성이 효과적이었기 때문이다.
또 지역을 5방으로 나눠 방어체계를 구축하고 있던 백제의 입장에서는 나당연합군 진격로에 비켜있던 백제지방군은 아직전투에 투입안된채 전력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지속적인 전투가 가능했다.
신속한 진격전략을 썼던 나당연합군에게 있어 육지와 바다 양동작전에는 보급이 문제였다. 백제는 국경을 따라 촘촘한 산성을 구축해놔서 그 군량이 사비성까지 오려면 수많은 산성을 지나야 했기 때문이다.
웅진성에 자리를 차지한 의자왕은 나당연합군이 사비성에 들어가면 백제지방군을 총동원, 사비성을 포위하여 전쟁에 임한다는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의자왕은 항전 5일째에 당시 연합군이 웅진을 공격하는 일도 없었는데 갑자기 항복하게 된다. 왜 그랬을까?
삼국사기와는 달리 중국이나 일본의 역사서에는 항복의 주체를 부하 예식진으로 거론하고 있다.
최근 중국에서 발견된 예식진(예식)의 묘비에는 패망한 국가 백제에서 넘어온 이민자 예식진을 높게 칭송하고 있다. 그의 묘비에는 어떤 공도 관직도 표시되어 있지 않았는데, 역사 기록들은 웅진성의 수성대장이 왕을 잡아 했다고 전한다.
웅진성의 책임자인 예식진은 나당연합군을 물리칠수없다고 판단한 것 결국 의자왕을 배신하고 항복함으로써 당나라 정 3품장수가 된 것이다.
그들이 대마도로 간 까닭은? 신라해적의 진실
9세기 일본사서를 보면 신라해적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기록에 의하면 신라해적은 오합지졸이 아니라 군대수준이었다고 하고 포로로 잡혔던 신라해적 현춘에 따르면 자신들은 왕이 보냈다고 기록이 되어있다.
기록당시인 894년 신라왕은 진성여왕. 당시 신라는 국고가 비고 세금이 걷히지 않아 궁지에 상황이었는데 몰린 진성여왕이 대마도를 습격하는 것을 계획했을 수도 있다는 추측이 있다.
당시 노획품중에는 고가품이 많았으며 2500명 규모라면 단순한 해적이 아니라 정규군의 규모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신라왕이 아니라 호족세력같은 사람이라는 반론도 있다
한편 당시 신라의 군인이었던 견훤은 전남순천만 일대 방어임무를 맡아 군소해적을 평정하며 공을 세웠고 주변 해상세력을 흡수해 서남해를 장악해나가면서 후백제의 기틀을 마련해 나갔다. 그가 신라해적의 배후일 수도 있다. 후백제가 나라체제를 갖춰가면서 해적행위도 줄어들었다. 신라해적은 후백제 세력의 근간이 되는데 신라해적이 후백제 세력으로 흡수되서 후삼국 전쟁에 동원됐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왕성했던 신라해적의 활동은 그 시기를 즈음하여 갑자기 역사에서 자취를 감췄다.
과연 그들이 노린 것은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은".
8세기초 일본은 대마도의 은으로 은전을 만들어 당나라와의 교역에서 화폐로 사용했다. 반면 신라는 9세기에 발해와의 교역이 끊어진 이후 금, 은, 중국산 견직물이 부족했다. 대마도를 침공해서라도 물품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을지 모른다.
조선판 킬링필드. 동래성 해자의 진실
동래읍성의 해자에서 발견된 수많은 무기와 생활용품. 또한 사람의 유골도 무더기로 발견되었다. 이는 여기가 임진왜란 당시의 격전지임을 보여주는 증거였다. 그런데 유골은 관군만이 아니다. 민간인, 더우깅 어린아이의 것도 있었다.
특히 유골들 중에는 전투중에 죽은것만이 아니라 처형당한 것으로 보이는 유골도 많이 나온다. 동래성전투가 끝나고 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그들에 맞써 싸운 힘없는 일반백성까지도 응징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할아버지의 육아일기. 양아록의 진실
예전에는 격대교육이 있었다. 할아버지가 손자를 가르친 것. 부모가 직접 교육하면 감정에 치우치게 되고, 연륜이 짧은 부모보다는 연륜이 깊은 조부모의 교육이 나을수도 있다는 것. 결국 유고사회였던 조선시대의 남자조차도 아이사람은 끔찍했나 보다
65세 노인의 폭탄 투척. 강우규 의사
3.1 운동이라는 민족적 움직임 이후 서울의 심장, 서울역에서 있었던 폭탄의거. 강우규가 죽이려 한 사이토 신임 조선총독.
강우규는 3.1운동이후 블라디보스토크로 가서 노인동맹단에 가입했는데, 노인동맹단은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하는등 외교적 활동에 주력하기도 하고 강경파는 노인단대표를 경성에 파견해 시민들을 모아놓고 연설하다가 체포되기도 하였다. 강우규의 의거 역시 강경흐름을 보여주는 하나의 움직임이었다. 보신각만세시위가 실패로 돌아가면서 더 강한 무력행동이 논의됐고 그게 서울역 폭탄투척
그런데 강우규의 활동은 노인동맹단의 활동으로만 국한 할 수 없었던 것이 이동휘연대기엔 강우규는 신민단 유격대장이라 나온다. 그런데도 강우규가 재판과정에서 노인동맹단의 존재만을 알린건 국제무대에 노인동맹단을 알리고 다른 독립조직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숨가빴던 망명 사건. 의친왕 이강
국내와 임시정부를 잇기 위해 안창호는 연통제와 교통국을 만들어 운영했는데, 연통제는 임정이 국내에 만든 지방행정조직 이고 이걸 연락하기위한 기관이 교통국이었다.
의친왕은 3.1독립만세운동에 이어 11월경 추진된 2차독립만세운동 선언서에 이름을 보인다. 황족 중 유달리 독립의지가 강했다. 1921년 미 워싱턴에서 열린 5대열강회의, 조선독립을 촉구한 건의서에도 황족대표 이강의 이름이 나온다. 이런 그의 성향때문에 일제는 그를 의친왕보다 낮은 이강공으로 격하시켰다.
안창호는 이런 의친왕에 대한 망명계획을 추진했다.
임정이 주목한 건 조선왕실도 합방에 동의하지 않았음을 의친왕의 육성으로 알리고자 하는 목적이 있었다. 또한 상해 임정으로 독립운동세력이 모이고 군자금 모집에도 용이하게 활용되는 효과를 기대한 것이다.
아쉽게도 단동역에서 붙잡히게 되면서 망명계획은 실패하게 된다. 의친왕은 잡힌후 협박에 의해 끌려갔다고 진술해야만 했다. 그리고 10년간 감시하다 1930년 아들 이건에게 작위를 물려주고 강제 은퇴하게 된다.
광복에 대한 열정때문이었을까? 이강이 죽은 것은 55년 광복절 날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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