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전히 떠나고 싶은 여행/충청도

부여 정림사지, 궁남지

by 심심한 똘이장군 2022. 8. 15.

일년에 몇 번을 다녀오는 부여인데

실제로 정림사지터와 5층 석탑을 본 적이 한번도 없었다는게 나 스스로도 의아스러웠다.

이번 연휴에는 폭우가 멈춘 사이를 이용해 정림사지터를  찾았다.

백제시대 익산 미륵사지터와 함께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정림사지터.

현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정림사지는 부여의 중심부에 위치한 백제시대의 대표적인 절터이며, 주변에는 동쪽으로 금성산, 북쪽으로 부소산에 둘러싸여 있다.

사비시대 수도의 가장 중심적인 위치에 있었던 정림사지는 우뚝 서있는 석탑 표면에 당나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전승 기념의 내용이 새겨져 있다.

이는 백제 왕조의 운명과 직결된 상징적인 공간으로 정림사가 존재하였음을 시사한다.

​정림사지는 백제시대의 전형적인 가람배치를 가지고 있다.

중문, 석탑, 금당, 강당을 남북 일직선으로 배치하고, 승방과 회랑으로 둘러싼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정림사의 존속기간에 대한 정확한 근거 자료는 없지만 백제멸망과 함께 소실된 것으로 본다.

이는 정림사지 발굴조사에서 금당터의 붉게 탄 흙 층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현재 정림사지에는 국보 제9호의 오층석탑과 보물 제108호의 고려시대 석불좌상이 남아 있으며, 사적 제301호로 지정 · 관리되고 있다.

 

정림사지터는 부여군 중심부에 위치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립부여박물관과도 인근에 위치하고 있다.

사비 도성의 중심부에 위치한 것을 볼 때, 백제왕가에서 중요하게 여겼던 사찰임을 짐작케 한다.

또 중국을 통해 들어온 불교가 백제에서 중요한 종교로 자리매김했음을 가늠케도 한다.

 

정림사지터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입장료를 내야 하는데, 이 금액에는 정림사지박물관 입장도 포함되어 있다

운영기간
  • 휴무일 연중관람 (지정휴일) 1월1일, 설날, 추석
  • 하절기(3월~10월) : 09:00 ~ 18:00
  • 동절기(11월~2월) : 09:00 ~ 17:00
입장료
  • 어른 1,500원(단체 : 1,200원) 청소년/군경 900원(단체 : 700원)
  • 어린이 700원(단체 : 500원)
* 만6세이하, 65세이상, 장애인, 국가유공자 부여군민 무료
* 단체 30인 이상

 

매표소 입구에서 정림사지터로 들어가다 보면

연못까지 연결되는 길과

중문터 5층석탑, 금당터, 강당으로 이어지는 길과는

일직선이 아니라 약간 틀어진 모습이다.

지금의 모습은 평지여서 과거에도 평지였다면 일직선으로 만들었을 것 같은데, 이에 대해서는 별다른 설명이 없다.

궁금, 궁금

정림사지가 생각보다 큰 것처럼 정림사지 5층 석탑의 규모또한 생각보다 컸다.

1962년 국보 제9호로 지정된 석탑은 차곡차곡 돌을 쌓고, 처마(?)를 놓고 하여 쌓아올린 5층의 모습은 경주 불국사의 석가탑 하단부와 비슷한 모습을 띄고 있다.

돌을 하나하나 다듬어서 쌓았을텐데, 좌우, 상하의 균형이 완전하다.

(일부 보강들로 인해 과거와 다른 모습인 것들도 있지만)

 


1962년 12월 20일 국보 제9호로 지정되었다. 흔히 백제오층석탑이라고도 한다.

화강석으로 되어 있으며, 높이는 8.33m이다.

익산의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11호)과 함께 2기만 남아 있는 백제시대의 석탑이다.

좁고 얕은 단층 기단, 사각형 우주에 보이는 엔타시스의 수법, 얇고 넓은 각층 옥개석의 형태, 옥개석 각 전각에 나타난 반전 등이 목조탑파의 구조와 비슷하며, 또한 이런 점이 특징이다.

제1탑신 4면에는 당나라의 장군 소정방이 백제를 평정한 후에 새긴 기공문이 있어 속칭 평제탑이라 불리어지기도 하였다.

각 부에서 보여주는 특이한 양식은 한국 석탑 양식의 계보를 정립시키는 데 매우 중요한 것이다.

세부 수법은 맹목적인 목조양식의 모방에서 탈피한 정돈된 형태의 세련되고 창의적인 조형이며, 전체가 장중하고 명쾌하여 격조 높은 기품을 풍겨 후세에 모방품이 많이 나왔다.

자료출처 : https://naver.me/FOmYVSSe

나당연합군에 의해 패망하게 된 백제.

석탑 하단부에는 역사를 되새겨 볼 수 있는 희미한 글귀가 남아있다.

 

평제기공문(平濟紀功文)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남긴 글귀로 백제를 멸한 것을 기념한 글귀다.

백제로서는 치욕의 흔적이자, 백제 흥망성쇠를 오롯이 간직한 기록이기도 하다.

정림사지 5층 석탑을 지나가면 "석조여래좌상"을 만날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석불과는 무척이나 다른 외모에 표정 또한 낯설다.

오른쪽 팔의 모습도 소실인 것인지? 아니면 의도된 모습인지 알수 없을 뿐만 아니라 마모의 흔적이 심하게 있다.

특히나 화재로 인해 심하게 훼손되어서라도 하는데요.

머리와 갓은 후대에 복원한 것이라고 합니다.

훼손이 심하지만 이것또한 1963년에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입니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불상으로 추정이 되는 이 불상은, 얼굴에 씌워진 모자의 모습이 몽골복식과 닮아 있어 고려를 침탈한 몽골의 인물을 기린 것이 아니냐는 논란이 있기도 했다.

그러나 좁아진 어깨와 가슴으로 올라간 왼손의 표현으로 보아 왼손 검지 손가락을 오른손으로 감싸 쥔 비로자나불을 형상화한 것이라는 설이 인정받는 듯 하다.

정림사의 건물들은 사라지고

이제는 터만이 남아있다

2층 구조의 정림사지 박물관에는
정림사지터의 발굴시 유물이나 관련 사진들이 전시되어 있다.

미니어쳐로 만들어진 정림사를 보면서 정림사의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또한 건물의 건축미와 5층석탑의 조형미 등등 그 당시의 기술력에 대한 경외심도 느끼게 한다.

과거라 하면 무조건 초가삼간이나 풀로 지은 집과 같은 낙후됨만을 생각하는 것이 틀린 것임을 느끼게도 된다.

박물관이지만 사진촬영을 금지해 놓은 곳은 몇 곳 되지 않지만, 사진촬영은 가급적 자제했다.

정림사지터에 들어왔다면 박물관에 들러 기본적인 역사를 읽어보는 건 정림사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정림사지 박물관 1층 로비에서 바라본 창 밖의 모습이 참 인상깊게 아름답다.

 

그런데 박물관을 둘려보면서 생소했던 것은

지붕의 곡선이나 모형을 보면, 우리가 익히 알던 신라나 고려, 조선시대의 양식과 같은 느낌이라기 보다는

현재 일본에 남아 있는 사찰, 건물 유적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백제의 건축양식이 일본에 많은 영향을 주어서 인 것일까?

백제시대에 만들어진 인공연못.

우리나라에서 인공으로 조성된 공원 중 가장 오래된 최초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궁의 남쪽에 위치하는 연못이라는 의미에서 "궁남지"라 불린다고 한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민족은 풍류를 아는 민족이라는 건 새삼 깨닫게 된다.

인공 연못을 만들었지만 주변의 자연을 해치지 않고 조화롭게 하기 위한 모습이 보인다.

지금은 매년 열리는 연꽃 축제로 유명해진 곳이기도 한다.

과거에 비하면 규모도 커졌고, 주변에 편의시설, 카페들도 많이 늘어난 모습니다.

연꽃축제만큼이나 연잎밥도 유명한 부여

 


궁남지는 백제 무왕의 출생설화와도 관계가 있다.

무왕의 부왕인 법왕의 시녀였던 여인이 못가에서 홀로 살다 용신과 통하여 아들을 얻었는데, 그 아이가 신라 진평왕의 셋째딸인 선화공주와 결혼한 서동이며, 아들이 없던 법왕의 뒤를 이은 무왕이 바로 이 서동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설화는 이곳이 별궁터였고, 궁남지가 백제왕과 깊은 관계가 있는 별궁의 연못이었음을 추측하게 한다.

백제의 정원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한편 "일본서기"에는 궁남지의 조경기술이 일본에 건너가 일본 조경의 원류가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자료출처 : https://naver.me/xJtzrKtl

축제가 끝난 지금은 백연, 홍연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는 없지만,

사람들의 혼잡함을 벗어나 궁남지 주변의 사이길을 걸으며, 여유로움을 느끼기에는 더 알맞은 시기인 것 같다.

(물론 더위는 좀 각오해야 겠지만)

사람이 적어진 지금 오리들이 한가로이 노니는 모습이
예전 유명하지 않았던 시절의 궁남지를 떠오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