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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접하게 된/책

서울의 고궁산책

by 심심한 똘이장군 2016. 2. 21.

우리가 쉽게 접하면서도

그 의미를 제대로 알고 있지는 못했던

우리의 고궁.

군 생활내내 있어왔던 경복궁에 대해서도

직장 바로 옆에 있는 창경궁에 대해서도,

시청나들이 속에 미술전시회를 관람하기 위해 잠시 거쳐간 의미로 밖에 기억되지 않았던 덕수궁에 대해서도,

이 책을 통해

건물 하나하나, 다리 하나하나

나무 한 그루, 연못, 드무, 서수 등에 얽힌 의미들을 알아봤다.

그것의 의미에 대해 놀라워 하면서도,

조금의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기억에서 지워지겠지만,

후일, 아주 잠깐이나마 이 책에서 봤던 의미들이 떠오른다면 그조차도 나름 뜻깊을 것 같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그리고 크고 작은 화재속에서

우리의 고궁들은 그 모습을 많이 잃어갔다.

특히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우리의 소중한 자산들은 그 흔적마저 없어진 경우도 많다.

이후에 이루어진 복원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현재 보고 있는 모습은 일부에 지나지 않다고 하니,

조선의 전성기 시절 그 위용은 어떠했을지 상상이 가지 않는다.

 

 

 

1392년 개성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라 고려를 이어 조선왕조를 건국한 태조 이성계. 그가 1394년 한성으로 도읍을 옮겨 그 이듬해에 창건한 조선의 정궁(正宮)이 경복궁이다.

원래 이곳은 고려 숙종(1096-1105) 때 만들었던 남경(南京) 이궁(離宮)터인데, 고려의 이궁터 자리가 협소하여 북악에서 조금 남으로 옮겨 경복궁을 이룩하였던 것이다.
왕권을 중심으로 하던 국가에 있어서 도읍지의 결정과 함께 새 궁궐의 영건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다.

그것은 궁궐이 국왕이 거처하는 곳일 뿐만 아니라, 왕실과 국가의 존엄을 표시하고 정령을 의결 포고하는 장소가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풍수지리설이 성행하던 고려조 이래로는 도읍지의 위치와 함께 왕궁터의 길흉여부가 곧 왕조의 화복과 관계된다고 보았기 때문에 궁궐터의 선정 및 영건 문제는 항상 도읍설정문제와 함께 큰 관심사가 되어 왔던 것이다.
사실 남경 옛 터는 고려 때부터 명당지로 지목되어 온 곳이다. 북에는 북악을 주산으로 하고 좌청룡인 낙산, 우백호인 인왕산과 남에 안산인 목면산(木覓山:남산)을 둔 지세이다.

태조의 비상한 관심과 함께 도읍이 한양으로 정해지고 고려의 이궁(離宮)터에 경복궁을 건립하기에 이른 것이다.
태조는 새로운 궁궐을 완성한 뒤 군신과 더불어 신궁에서 큰 잔치를 베풀고 정도전으로 하여금 새 궁궐의 이름을 짓도록 하였다. 정도전은 시경 詩經 주아(周雅)의 한 구절인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불렀으니 군자만년에 큰 복일레라(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慶福)"라는 구절에서 '경복(慶福)'을 따서 경복궁이라는 이름을 탄생시켰다.
1395년 경복궁 궁궐이 완성된 후 대소의 화재가 있었으나 여러 임금을 거쳐오면서 많은 수축과 증축이 있음으로 하여 규모는 점점 커져갔다.

그러다가 1592년 4월 임진왜란 때 왜병과 난민의 방화로 전소된 후로 폐허가 되어 그대로 방치되었다가, 1865년 고종 때에 와서 재건되기 시작하였다. 지금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고종 때 재건된 궁궐 모습이다.

 

 

 

< 북궐도 >

경복궁을 중심의 궁궐로 하였으며, 북궐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창덕궁과 창경궁은 동궐, 경희궁은 서궐

 

 

 

창덕궁은 경복궁의 동쪽에 있어서 조선 시대에는 창경궁과 더불어 동궐(東闕)이라 불렀다.

창덕궁은 고려 시대 궁궐의 전통을 이어받았고, 개성송악산만월대처럼 자연 지형에 맞추어 산자락에 지어졌다.

보통 궁궐은 인위적으로 존엄성과 권위를 드러내도록 건축되지만 창덕궁은 이러한 얽매임 없이 북악산의 줄기인 응봉의 산자락 생긴 모양에 맞추어 적절하게 궁궐의 기능을 배치하였다.

창덕궁은 정궁인 경복궁보다 오히려 더 많이 쓰인 궁궐이다.

임진왜란으로 모든 궁궐이 불에 타자 광해군 때에 다시 짓고 고종이 경복궁을 중건하기까지 정궁 역할을 하였다.
조선의 궁궐 중 가장 오랜 기간 동안 임금들이 거처했던 궁궐이다.
1868년 경복궁이 다시 지어질 때까지 경복궁의 역할을 대체하여 임금이 거처하며 나라를 다스리는 정궁이 되었다

경복궁의 주요 건물이 좌우대칭의 일직선상에 놓여 있다면 창덕궁은 산자락을 따라 건물들을 골짜기에 안기도록 배치하여 한국 궁궐건축의 비정형적 조형미를 대표하고 있다.

또한 비원으로 잘 알려진 창덕궁 후원은 다양한 정자, 연못, 수목, 괴석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곳이다.

현재 남아있는 조선의 궁궐 중 그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된 창덕궁은 자연과의 조화로운 배치가 탁월한 점에서 199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창경궁은 성종 14년(1483)에 세조비 정희왕후, 예종비 안순왕후, 덕종비 소혜왕후 세분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옛 수강궁터에 창건한 궁이다.

수강궁이란 1418년에 세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의 거처를 위해서 마련한 궁이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연결되어 동궐이라는 하나의 궁역을 형성하면서, 독립적인 궁궐의 역할을 함과 동시에 창덕궁의 모자란 주거공간을 보충해주는 역할을 하였다.

성종대 창건된 창경궁은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으로 모든 전각이 소실되었고, 광해군 8년(1616)에 재건되었다.

그러나 인조2년(1624) 이괄의 난과 순조30년(1830) 대화재로 인하여 내전이 소실되었다.

화재에서 살아남은 명정전, 명정문, 홍화문은 17세기 조선시대 건축양식을 보여주며, 정전인 명정전은 조선왕궁 법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숙종 때 계비 민씨와 장희빈의 갈드응로 빚어진 신사년 변고,

영조 때 왕이 세자를 뒤주에 가둥어 궁내 선인문 안뜰에 8일간 두어 죽게 한 신임년 사화등 왕족과 관련된 사건들이 많이 일어난 궁이기도 하다.

 

 

 

< 동궐도 >

경복궁의 동쪽에 있다하여 창덕궁과 창경궁은 동궐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덕수궁이 있는 자리는 원래 조선 초기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집이 있었던 곳으로, 선조가 임진왜란 뒤 서울로 돌아와서 이 집을 임시거처로 사용하면서 궁으로 이용하게 되었다.

‘정릉동 행궁(貞陵洞行宮)’이라고 불린 이곳에서 선조가 죽고 뒤를 이어 광해군이 즉위하였다.

그해 창덕궁이 완성되었으므로 광해군은 이곳을 떠났으며, 경운궁(慶運宮)이라는 궁호(宮號)를 붙여주었다.

조선 후기에 덕수궁은 궁궐다운 건물도 없었고 왕실에서도 거의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다만 광해군이 선조의 계비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이곳에 유폐시킨 일이 있고, 영조가 선조의 환도(還都) 삼주갑(三周甲)을 맞아 배례를 행한 일이 있을 정도였다.

고종 말년 조선 왕조가 열강 사이의 정치적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고종이 경운궁으로 옮기자, 비로소 궁궐다운 장대한 전각들을 갖추게 되었다. 1897년(광무 1)에고종은 러시아공사관에서 이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 때를 전후하여 궁내에는 많은 건물들이 지어졌으며 일부는 서양식으로 지어지기도 하였다.

궁내에는 역대 임금의 영정을 모신 진전(眞殿)과 궁의 정전(正殿)인 중화전(中和殿) 등이 세워졌고, 정관헌(靜觀軒)·돈덕전(惇德殿) 등 서양식의 건물도 들어섰다.

고종이 경운궁에 머무르고 있던 1904년(광무 8)에 궁에 큰불이 나서 전각의 대부분이 불타 버렸다.

그러나 곧 복구에 착수하여 이듬해인 1905년(광무 9)에 즉조당(卽阼堂)를 비롯하여 석어당(昔御堂), 경효전(景孝殿), 준명전(浚明殿), 흠문각(欽文閣), 함녕전(咸寧殿) 등이 중건되었으며, 중화문(中和門), 조원문(朝元門) 등이 세워졌다.

이후 1906년 정전인 중화전이 완성되고 대안문(大安門)도 수리되었다. 이후 이 문은 대한문(大漢門)으로 개칭되었고 궁의 정문이 되었다.

1907년 고종은 제위를 황태자에게 물려주었으며 새로 즉위한 순종은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태상황(太上皇)이 된 고종은 계속 경운궁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이 때 궁호를 경운궁에서 덕수궁으로 바꾸었다.

1910년에 서양식의 대규모 석조건물인 석조전(石造殿)이 건립되었다.

한편, 왕실의 크고 작은 일들이 이곳에서 일어났다. 1897년(광무 1)에 영친왕 이은(李垠)이 여기서 태어나서 1907년(융희 1)까지 거처하였고, 1904년(광무 8) 헌종의 계비 명헌태후 홍씨(明憲太后洪氏)가 인수당에서 별세하였으며, 황태자비 민씨(閔氏)도 석어당에서 별세하였다. 1907년(융희 1) 8월 순종은 돈덕전에서 즉위하였고, 고종의 순헌귀비 엄씨(純憲貴妃嚴氏)가 즉조당에서 별세하였다. 고종은 1907년 왕위를 물려주고 13년 동안 함녕전에서 거처하다가 1919년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이와 같이 덕수궁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르는 약 10년간 나라와 왕실의 크고 작은 일들이 일어났던 곳이며, 궁내의 각 건물들이 그러한 역사적 사건의 무대로 활용되었다.

 

 

경희궁은 본래 경덕궁(慶德宮)으로 불렸다. 처음 창건 때는 유사시에 왕이 본궁을 떠나 피우(避寓)하는 이궁(離宮)으로 지어졌으나, 궁의 규모가 크고 여러 임금이 이 궁에서 정사를 보았기 때문에 동궐인 창덕궁에 대하여 서궐이라 불리고 중요시되었다.

이 궁이 창건된 것은 1617년(광해군 9)으로, 당시 광해군은 창덕궁을 흉궁(凶宮)이라고 꺼려 길지에 새 궁을 세우고자 하여 인왕산 아래에 인경궁(仁慶宮)을 창건하였다. 그런데 다시 정원군(定遠君)의 옛 집에 왕기가 서렸다는 술사의 말을 듣고 그 자리에 궁을 세우고 경덕궁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광해군은 이 궁에 들지 못한 채 인조반정으로 왕위에서 물러나고, 결국 왕위는 정원군의 장남에게 이어졌으니 그가 곧 인조이다.

인조가 즉위하였을 때 창덕궁과 창경궁은 인조반정과 이괄(李适)의 난으로 모두 불타 버렸기 때문에, 인조는 즉위 후 이 궁에서 정사를 보았다.

창덕궁과 창경궁이 복구된 뒤에도 경덕궁에는 여러 왕들이 머물렀고, 이따금 왕의 즉위식이 거행되기도 하였다. 즉, 제19대 숙종은 이 궁의 회상전(會祥殿)에서 태어났고, 승하한 것도 역시 이 궁의 융복전(隆福殿)에서였다. 제20대 경종 또한 경덕궁에서 태어났고, 제21대 영조는 여기서 승하하였다.

제22대 정조는 이 궁의 숭정문(崇政門)에서 즉위하였고, 제23대 순조가 회상전에서 승하하였으며, 제24대 헌종도 숭정문에서 즉위하였다. 1760년(영조 36)경덕궁이던 궁명을 경희궁으로 고쳤는데, 그것은 원종의 시호가 경덕(敬德)이므로 음이 같은 것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경희궁은 일명 ‘야주개 대궐[夜照峴大闕]’로 불렸는데, 그것은 정문인 흥화문의 현판 글씨가 명필이었고, 글씨의 광채가 밤에도 훤히 비추었다고 해서 이 일대를 야주개라고 부른 데서 유래한다고 한다.

 

< 서궐도 >

경복궁의 서쪽에 있다하여 경희궁은 동궐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종묘는 원래 정전(正殿)을 말하며, 태묘(太廟)라고도 한다. 태묘는 태조의 묘(廟)가 있기 때문이다. 역대 왕과 왕후는 사후에 그 신주를 일단 종묘에 봉안하였다.

공덕이 높아 세실(世室 : 종묘의 神室)로 모시기로 정한 제왕 이외의 신주는 일정한 때가 지나면 조묘(祧廟)인 영녕전(永寧殿)으로 옮겨 모셨다. 이것을 조천(祧遷)이라고 한다.

종묘 즉 정전에는 현재 19실(室)에 19위의 왕과 30위의 왕후의 신주를 모셔놓고 있다.

정전 서쪽에 있는 영녕전에는 정전에서 조천된 15위의 왕과 17위의 왕후, 그리고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의 신주를 16실에 모셔 놓고 있다.

정전의 신실은 서쪽을 상(上)으로 해 제1실에 태조의 신주가 봉안되어 있다.

영녕전은 주나라의 제도를 본받아 정중(正中)에 추존조사왕(追尊祖四王)을 모시고 서쪽과 동쪽으로 구분, 서쪽을 상으로 차례대로 모시고 있다. 이것을 소목 제도(昭穆制度 : 신주를 모시는 차례로, 왼편을 昭, 오른편을 穆이라 하며, 天子는 1세를 가운데 모시고 2·4·6세를 소에, 3·5·7세를 목에 모시는 제도)라 한다.

유교 사회에서는 왕이 나라를 세우고 궁실(宮室)을 영위하기 위해 반드시 종묘와 사직(社稷)을 세워 조상의 은덕에 보답하며 경천애지사상(敬天愛地思想)을 만백성에게 널리 알리고, 천지 신명에게 백성들의 생업인 농사가 잘되게 해 달라고 제사를 올렸던 것이다.

우리 나라는 신라 시대는 5묘제, 고려 시대는 7묘제로 하였고, 조선 시대 초기에도 7묘제로 하였다.

즉, 7대왕 이상의 신주는 영녕전으로 조천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치적이 큰 왕은 만세 불후(萬世不朽)·조공 숭덕(祖功崇德)의 근본 이념에 따라 7대가 지나도 부조위(不祧位)인 정전에 모셨고, 조천된 신주는 영녕전에 봉안하였다.

조선을 창건한 태조는 1394년(태조 3) 8월 종묘 터를 보았고, 9월 감산(坎山)을 주산(主山)으로 하는 임좌병향(壬坐丙向)한 그 곳에 종묘 터를 결정하였다. 12월부터 영건(營建)을 시작해 다음해 9월에 일차 영건이 끝났으며, 그 뒤 1546년(명종 1)까지 계속되었다.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자, 1604년(선조 37)부터 중건이 논의되어, 선조 41년 터를 닦고 기둥을 세우는 등 공사를 개시한 후 광해군이 즉위하던 해인 1608년 5월 중건되었다. 그 뒤 몇 차례의 개수와 증건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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