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릉과 인릉 입구에는 조선왕릉이 세계유산으로서 등재되어 있음을 알리는 기념물이 있다.
헌릉(獻陵)과 인릉(仁陵) 관람시간
- 2월~5월, 9월~10월 : 09:00~18:00 (매표 17:00)
- 6월~8월 : 09:00~18:30 (매표 17:30)
- 11월~1월 : 09:00~17:30 (매표 16:30)
- 정기휴일 : 매주 월요일
- 문화재 안내해설 : 10:30, 13:30, 15:00
- 무료관람일 : 매월 마지막 수요일 "문화가 있는 날"
- 입장료 : 만 25세~만 64세 1,000원 (무료관람대상, 서초구민 50% 할인 존재)
조선왕릉(헌릉, 인릉)은
‘세계 문화 및 자연 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세계유산 조선왕릉은
조선시대 왕과 왕비의 능(40기)으로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신성한 공간이며
지금까지도 이 곳에서 제례가 이어져 오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등재일 : 2009년 6월 30일
서울 헌릉과 인릉
조선의 제3대 임금 태종과 원경왕후를 모신 헌릉과 제23대 임금 순조와 순원왕후를 모신 인릉이 있다. 두 능은 대모산을 주산으로 하여 약 400미터 거리를 두고 동쪽과 서쪽에 있다. 남쪽으로는 왕릉의 저지대에 심어져 관리되던 오리나무 군락이 대규모로 남아 있어 왕릉 조영의 기본과 생태계를 확인할 수 있다.
헌릉 : 제3대 태종과 왕비 원경왕후 민씨를 모신 쌍릉
인릉 : 제23대 순조와 왕비 순원왕후 김씨를 모신 합장릉
서울 헌릉(獻陵)
헌릉은 조선 제3대 임금 태종과 원경왕후 민씨를 모신 쌍릉이다. 1420년 원경왕후가 승하하자 이곳에 터를 정하고 '헌릉'이라 하였다.
태종은 태조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로 태조를 도와 나라를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왕위를 놓고 태조의 왕자 사이에서 벌어진 1, 2차 왕자의 난을 치르고 1400년 왕위에 올랐다. 18년간 임금의 자리에 있으면서 사병을 혁파하고, 육조직계제를 통하여 왕권을 강화하였으며, 1405년 개경에서 한양으로 재천도하였다. 또한 국방을 튼튼히 하였으며, 호패법을 실시하고 신문고와 의금부를 설치하는 등 조선왕조의 기틀을 확립하였다. 1418년 3남 충녕대굼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원경왕후는 여흥부원군 민제의 딸로 태종이 즉위하면서 1382년 이방원(태종)과 혼인했고 1392년 정녕옹주에 책봉되었다. 태종이 왕위에 오르는데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으며 1400년 태종이 왕위에 오르자 정비로 진봉되었다. 슬하에 양녕, 효령, 충녕, 성녕 네 대군과 네 공주를 두었는데, 충녕이 세종이 되었다.
헌릉의 능침은 병풍석과 난간석이 둘러있고, 문/무인석이 두 쌍이며., 혼유석 아래으 ㅣ고석이 5개인 것이 특이하다. 언덕 아래쪽으로는 정자각과 비각이 있으며, 비각 안에는 1424년과 1695년에 세운 신도비가 있다.
헌릉의 연혁
세종 2년(1420년) 원경왕후 안장, 헌릉 조성
세종 4년(1422년) 태종 안장, 쌍릉으로 조성
헌릉 제향일
태종 : 매년 6월 8일(양력)
원경왕후 : 매년 8월 27일(양력)
정면에서 보았을 때
왼쪽편이 태종의 능침,
오른편이 원경왕후의 능침.
두분이 사이좋게 쌍릉의 형태로 나란히 모셔져 있는 모습이 인상깊다.
현실정치에서는 왕의 권력이 절대적이어서 왕과 왕비간 같은 급이라고 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왕비의 권력 또한 무시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헌릉의 쌍릉은 왕과 왕비가 동격의 크기와 위치를 보인다.
그런데 헌릉은 쌍릉이어서 인지,
능 앞에 세워진 문인석과 무인석도 각각 한 쌍이 아니라
문인석 2쌍, 무인석 2쌍 총 8개의 석물이 세워져 있다.
문/무인석의 숫자만큼이나 왕과 왕비를 보호해주는 힘은 커졌을까?
문인석과 무인석 4기의 생김새, 석물의 생김새도 각각이라고 하는데, 일반인이 관람할 수 있는 출입가능지역에서는 시야가 가려 이를 확인하기가 쉽지 않다.
석물을 제작했던 사람이 한사람이 아니기에 각각 다르게 조각되었다고 한다.
헌릉의 혼유석 밑에는 다섯 개의 고석이 존재한다.
그 아래에는 ‘하전석’ 이라는 네모난 홈이 있다고 하는데 이 거리에서는 확인이 되지 않는다.
태종의 기일인 음력 5월 10일을 전후하여 오는 비를 ‘태종우’라 하고 ‘하전석’ 네모난 홈 속에 이 비가 고인다고 한다.
헌릉에서 내가 보기에 다른 조선왕릉과의 가장 큰 차이를 느낀 건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가는 길이다.
분명 있어야할 어로가 보이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왼쪽에 향로가 오른쪽에 어로가 있어야 하는데
이 곳에서는 향로만 보인다.
발굴이 덜 되었다고 보기에는 길이 정자각과 중심선이 맞는 것을 보면
어로가 없는 것이 맞는 것 같다..
궁금은 한데, 어디에 물어볼 곳이 없다.
반면 정자각에 오르는 계단은 향로와 어로가 분명 구분되어 있다.
어로 실종 미스테리라고나 해야 할까?
그런데 정자각의 계단은 다른 릉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낮은 느낌이다.
같은 대모산자락에 위치한 인릉의 정자각 계단에 비해서도
높이와 화려함은 떨어진다.
조선시대 절대적 왕권을 구축하면서 두려움의 대상이었던 태종이,
죽어서는 현세와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고 싶었던 마음으로 회귀하여
정자각의 위치를 낮춰놓은 것일까?
그리고 판위도 존재하지 않는다.
조선초기의 전통을 고려했을 때 판위가 홍릉에만 없다고 볼 수는 없을터인데
판위가 정말로 없다..
태종은 죽어서까지도 파괴적인 혁명을 이룬 것일까? (1,2차에 걸친 왕자의 난을 생각해 보면...)
이곳에도 조선초기 왕릉의 특징인 소전대가 설치되어 있다.
하지만 수라간과 수복방, 삼신석은 보이지 않는다.
태종의 절대권력과 후임자인 아들 세종의 예를 봤을때
이상하게도 전통적인 조선왕릉 주용 상설이 많이 원래 생략된 것인지? 아니면 후대에 사라진 것인지 의문이 든다.
조선 개국이후 권력의 싸움속에서
사대부 중심의 나라에서 절대왕권의 국가를 세우기 위해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벌였던 태종.
권력의 개편을 위한 태종의 위엄은 서슬퍼럴 수 밖에 없었고,
피아의 구분속에 내편이 아니면 적일 수 밖에 없었던 변혁의 시기.
태종의 선택은 피의 응징이었다.
응징의 피는 조선왕조의 자양분이 되어 500년을 이어갔다.
하지만 절대권력 마저도 죽음을 피할 수 없었고,
삶은 이 곳 헌릉에 와서야 마감되었다.
사대부와 왕실간 권력의 암투가 난무하던 경복궁터에서 멀직히 떨어져 있는 (심지어 한강수로 갈라서 있는) 이곳을 자신의 사후 쉴 곳으로 택한 태종의 마음은 이제야 모든 것에서 자유롭게 쉬고 싶었는가 보다.
절대권력자의 영원한 휴식처가 되고자 했던 헌릉은
아이러니 하게도 국가의 절대성을 유지하기 위해 일하는 국가정보원(때로는 국가보다는 절대권력자를 비호하는 데 앞장서기도 했던) 의 뒤에 위치하게 된다. (마치 보호를 받는 듯이)
조선시대 절대권력자 태종과 현대사에 절대권력을 보호하고, 또 다른 절대권력을 행사하는 국정원(여러번의 명칭 변경에도)의 연결고리를 태종은 상상했을까?
대모산 자락에 위치한 현릉은 대모산과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왠지 자연에 열려 있는 연결의 공간이라는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자연의 공간으로 둘려쌓여 있지만, 오히려 자연에 의해서 가두어져 있는 공간의 느낌.
그 느낌은 과거와 현재 그 절대권력의 연결고리에 기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헌릉은 '선릉과 정릉' 과 같이 현대빌딩 숲과 아스팔트 속 고립된 섬이 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헌릉은 성북구 '정릉' (자신이 그토록 싫어했지만) 처럼 자연과 사람과 연결된 엄마의 품이 되지도 않았다.
그저 자연과 연결되었으면서도, 죽어서도 절대권력(절대왕권)의 품안에 숨어 있는 가두어진 공간으로 존재한다.
헌릉 신도비
좌측이 1424년 처음 건립된 구비,
우측이 1695년(숙종 21) 증건된 신비이다.
구비에 새긴 끌씨가 떨어져 나가 알아보기 어려워 원래의 비옆에 신비를 설치한 것이다
서울 태종 헌릉 신도비
보물 제1804호 ‘서울 태종 헌른 신도비’는 태조의 타석째 아들로 조선 왕조의 왕권을 다졌던 제3대 임금 태종 이방원의 생애와 업적을 기리기 위해 1424년에 비문을 새겨 세운 것이다.
비문은 변계량이 지었꼬, 글씨는 성개가 썼으며, 전액은 권홍이 썼다. 신도비에 새겨진 글씨는 조선 초기의 서예문화와 그 경향을 연구하는 데에 중요한 자료이다.
이 비의 귀부(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는 임진왜란을 겪으며 훼손되었지만 이수(머릿돌)는 원형이 잘 보존되어 있어, 조선 초기에 명나라 석비조각 양식을 받아들여 새로운 석비 전통을 마련해 가는 모습을 잘 보여 준다.
서울 인릉(仁陵)
조선 제23대 임금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의 합장릉이다. 순조는 정조의 둘째 아들로,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증조할아버지 영조의 계비인 대왕대비 정순왕후의 수렴청정을 받았다. 13세에 김조순의 딸을 왕비로 맞이했고, 1803년 친정을 시작해 암행어사 파견 "만기요람"편찬, 국왕친위부대 강화, 하급친위관료 육성 등 국정개혁과 왕권강화를 위해 노력했다. 아들인 효명세자와 더불어 개혁을 추진했으나 세자가 요절하고, 자연 재해, 홍경래의 난이 일어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순원왕후는 영안부원군 김조순의 딸로 1802년 왕비로 책봉되었다. 순조와의 사이에 효명세자와 공주 셋을 두었으며, 1857년 8월 창덕궁 양심각에서 승하했다. 순원왕후는 현종의 왕대비, 철종의 대왕대비가 되어 안동 김씨 가문에서 왕비를 발탁하는 등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인릉은 처음에 파주 장릉 가까이에 있다가 1856년에 이곳으로 옮겨 왔다. 인릉은 봉분에 병풍석을 두르지 않고 12칸의 난간석만 둘렀다. 문/무인석의 조각은 사실주의적으로 섬세하고 아름답다.
인릉 연혁
현종 1년(1835년) 경기도 파주에 순조숙황제 능 조성
철종 7년(1856년) 지금의 자리로 천릉
철종 8년(1857년) 순원숙황후 안장, 합장릉으로 조성
인릉 제향일
매년 1회 10월 20일(양력)
헌릉과 인릉 매표소로 입장하면 보이는 것은
먼저 보이는 것은 헌릉(獻陵)이 아니라 인릉(仁陵)이다.
재실의 위치를 고려했을 때는 예전에는 헌릉쪽이 중심이었을 터이지만
지금은 주변 비닐하우스 화원이나 국정원 길 등으로 인해
인릉쪽이 주 출입통로가 된 것으로 보인다.
인릉의 홍살문도 특이하다
다른 홍살문들은 기둥이 바닥과 고정되어 있는 형태라고 한다면
인릉에 설치된 홍살문의 기둥은 기둥이 양쪽의 석재에 고리로 고정되어 있다,
마치 홍살문 기둥이 비석사이에 끼인 모양이다.
원래의 형태가 이랬을 수도 있고, 복원이 잘못된 것일 수도 있지만 어디에도 정확한 설명은 없다
인릉의 정자각 계단은 헌릉의 낮고 초라한 향로, 어로 계단에 비하면 화려하다.
그리고 향로에 비하여 어로의 폭이 좁지도 않다.
향로는 화려한 구음모양 조각을 통해 하늘에 이루는 길을 인도하는 듯하다
헌릉과 인릉에는 고패가 정자각 밖에까지 설치되어 있다.
정자각 뒤편 능침으로 향하는 길은 이렇게 다리가 놓여져 있다.
신의 영역에 들어서기 위해서는 이승에서의 인연을 몇번을 털어내야 하나보다.
인릉에도 마찬가지로 수라간과 수복방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릉의 비각에는 구비문과 신 비문이 보존되어 있다.
신구의 구분은 조선국으로 표시되었던 구비문이
고종황제에 의한 대한제국 선포를 기준으로 '대한'으로 새롭게 표시된 것이 신비문이다.
역문에는 순조와 순원왕후의 탄생과 승하까지의 일대기가 표시되어 있다.
인릉구비문
조선국 순조대왕인릉 순원왕후부좌
인릉신비문
대한 순조숙황제인릉 순원숙황후부좌
인릉의 제향공간에 가기 위해서는 정자각 우측편 흙길을 이용해서 이정표를 따라가면 된다.
그런데 출입가능구역까지 올라가보니 인릉의 제향공간까지의 거리가 헌릉에 비해서 너무 멀다.
이곳은 합장릉임에도 불구하고, 쌍릉이 아니기 때문인지
문.무인석이나 장명등, 석마등의 설치 개수가
왕 또는 왕비 한분이 뭍힌 왕릉과 차이가 없다.
새들의 지저귐, 청솔모의 몸짓이 자연스럽다.
헌릉과 인릉의 자랑은 조선왕릉 자체에 있기도 하지만
서울시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될 만큼 잘 보전되고 아름다운 오리나무 숲에 있다.
울창한 나무들의 푸르름, 신령함이 그대로 전해져온다.
오리나무 뿐만 아니라 여러 나무와 식물들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고 서로와 조화를 이루고 있다.
헌릉과 인릉은 여러모로 특이한 점이 있지만,
재실의 위치때문에 처음에는 의아하기도 했다.
홍살문, 정자각, 능침공간을 보는 동안 재실의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결국 재실이 도로 건너에 있다는 걸 알게된 황당함!!!
후세들의 필요해 의해 만들어진 도로(국정원 길) 로 인하여
재실은 자신이 있어야 할 조선왕릉의 주요 상설의 배치와는 동떨어진 건물처럼 외톨이가 되어버렸다.
지도의 표시를 찾아 확인하지 않았다면 이 곳이 재실인지, 아니면 어느 유림의 고택인지 구분할 수 없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헌릉과 인릉에서의 또다른 이상한 점은
금천교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금천교(禁川橋)는 ‘건너가는 것을 금하는 다리’라는 뜻으로 금천교 건너편은 특별한 영역, 즉 왕과 왕비의 혼령이 머무는 신성한 영역임을 상징
헌릉과 인릉에는 그것이 보이지 않는다
금천교의 위치가 홍살문 앞에 있어야 한다면, 현재의 매표소와 출입구 쯤에 금천교가 있어야 한다.
아니면 헌릉의 앞에 있어야 하나, 헌릉 앞에도 금천교는 보이지 않고
오리나무 숲과 능관리소, 그리고 비닐하우스만이 존재한다.
아니면 재실과 홍살문 사이 어딘가에 있어야 할 금천교가 도로와 아스팔트 아래로 사라진 것일까?
절대권력자였던 태종조차도 사후의 시대, 후세에게 있어서는
권력의 절대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 하다.
'여전히 떠나고 싶은 여행 > 서울'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9년 종묘대제 - 영원을 꿈꾸던 조선왕조 (0) | 2019.05.05 |
---|---|
상암동 월드컵경기장-평화잔디광장 (0) | 2018.10.04 |
조선왕릉 - 정릉(貞陵)과 흥천사 (0) | 2018.07.07 |
동작대교 노을카페 앞 야경 (0) | 2018.07.05 |
7월 어느 태풍 후 맑은 북악산 스카이웨이 산책로길 (0) | 2018.07.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