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릉 관람시간
- 2월~5월, 9월~10월 : 06:00~18:00 (매표 17:00)
- 6월~8월 : 06:00~18:30 (매표 17:30)
- 11월~1월 : 06:30~17:30 (매표 16:30)
- 정기휴일 : 매주 월요일
- 문화재 안내해설 : 화~금, 일 : 10시, 14시, 16시 토 : 10시, 14시
- 무료관람일 : 매월 마지막 수요일 "문화가 있는 날"
- 입장료 : 만 25세~만 64세 1,000원 (무료관람대상, 성북구민 50% 할인 존재)
서울 정릉(貞陵)
조선 제1대 태조고황제 두 번째 황후 신덕고황후 능
선덕고황후는 상산부원군 강윤성의 딸로 태조의 두 번째 왕비이다. 신덕고황후의 가문은 고려의 권문세가로 태조고황제가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정치 영역을 넓혀 조선을 건국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신덕고황후는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조선 최초로 왕비(현비)에 책봉되었다(태조고황제의 첫 번째 왕비였던 신의고황후 한씨는 조선 건국 이전 세상을 떠났음)
이후 자신의 둘째 아들 방석(의안대군)을 왕세자에 책봉시키는 등 정치적 지지기반을 닦았으나, 이는 훗날 ‘왕자의 난’의 씨앗이 되었다. 태조고황제는 첫 번째 왕비 신의고황후에게서 6명의 아들을 두었고, 그 후 신덕고황후에게서 2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런데 세자를 책봉하면서 장성한 신의고황후의 아들들을 제쳐두고 어린 신덕고황후의 둘째 아들 방석을 선택한 것이 왕실에 화를 불러 일으켰다. 신의고황후 소생의 여섯 왕자 중 방원(태종)이 이에 커다란 반감을 갖게 되었고, 신덕고황후가 세상을 떠난 후 왕자의 난을 일으켜 이복동생들을 죽이기에 이르렀다.
태조고황제는 신덕고황후를 매우 사랑하여 1396년(태조 5년) 세상을 떠나자 시호를 신덕왕후라 정하고, 궁궐 가까운 곳인 취현방(현재의 정동 영국대사관 부근)에 웅장하게 정릉을 조성하고, 능의 동쪽에 명복을 빌기 위해 흥천사라는 원찰을 세워 자주 왕래하였다. 재를 올리는 층천사의 아침 종소리가 궁에 들리면, 그제야 아침 수라를 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왕자의 난을 통해 왕위에 오른 태종은 궁궐 가까운 곳에 조성되었던 정릉에 손을 대기시작하였다. 1406년(태종 6) 정릉의 능역이 너무 넓다는 논란이 있자 태종은 정릉 100보 밖까지를 주택으로 허가하였다. 이후 하륜 등 당대 세도가들이 정릉의 숲을 베어내고 저택을 짓기 시작했다.
1409년(태종 9)에는 정릉이 도성 안에 있는 것이 적당하지 못하고 사신이 묵는 관사에 가까우니 옮겨야 한다는 의정부의 상언에 따라, 사을한의 산기슭(현재의 서울 성북구 정릉 자리) 으로 능을 옮겼다. 이어 정릉의 정자각과 일부 석물을 헐어 태평관을 짓는데 사용하였으며, 무덤의 봉분을 깎아 자취를 없애 사람들이 알아볼 수 없게 하고 석인은 모두 땅에 묻도록 하였다. 1410년(태종 10) 여름에 청계천의 광통교가 무너지자 정릉의 병풍석으로 돌다리를 만들었다.
태종은 태조고황제가 세상을 떠난 후 신주를 종묘에 모실 때(부묘) 자신의 친모 신의고황후만 함께 모시고, 신덕고황후의 신주는 모시지 않았다. 이는 신덕고황후를 태조고황제의 왕비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태종은 신덕왕후를 태조의 왕비로 인정하지 않아 이장 후 정릉의 형식또한 일반인의 묘나 다름없었다. 1416년(태종 16)애는 신덕고황후가 본인에게 계모인가 하는 문제를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며 ‘정릉은 나에게 조금도 은의가 없었다’라고 말하는 등, 신덕고황후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졌던 것이 여러 기록을 통해 전해진다.
그후 260년이 지나 1669년(현종 10)에 신덕고황후를 종묘에 부묘하자는 송시열 등의 상소로 신덕왕후의 신주가 종묘에 모셔지면서 태조고황제의 왕비로 인정받은 후 정릉의 상설을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조성하였다. 이때 정릉에서 성대한 제사를 지냈는데, 그날 정릉 일대에 많은 비가 쏟아져 사람들이 이를 ‘원한을 씻어주는 비(세원지우 洗寃之雨)’라고 불렀다고 한다.
1899년(광무 3) 고종이 태조를 태조고황제로 추존하면서, 신덕왕후를 신덕고황후로 추존하였다.
권력의 싸움에서 진 자의 뒤안길은 죽어서도 그 신세가 옹색해진다.
사실 권력싸움 승자의 달콤함과 패자의 쓸쓸함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별반 차이가 없다.
물론 앞으로도 그러하겠지...
그러하기에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왕비이면서도 죽어서의 대접은 궁색하기만 하다.
정릉 연혁
1409년(태종 9) 도선 안에 있던 정릉을 지금의 자리로 옮김
1669년(현종 10) 현재의 모습으로 다시 조성
정릉 제향일
매년 9월 23일(양력)
재실 옆 느티나무 보호수는 오늘도 자신의 본분을 잊지 않고
이 곳 정릉의 신령함을 지키기 위해 여전히 제 힘을 다한다.
이곳 느티나무 보호수는 다른 곳과 다르게 2그루가 존재한다.
조선 왕릉이 신과 왕의 영역이었다고는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인간의 영역과 혼재되어왔다.
하지만 그 혼재에 존재하는 인간의 영역은 능마다 차이가 난다.
강남구에 있는 선릉과 정릉이 현대도시의 빌딩숲과 아스팔트에 의해 사방이 차단된 고립된 무인의 섬과 같다면,
성북구의 정릉은 북악산, 북한산 줄기자락과 연결된 자연의 능이다.
이곳은 산과 나무와 풀과 꽃과 물과 연결된 열림의 공간이기도 하다.
금천교는 속세와 성역의 경계 역할을 한다
조선왕릉에서 금천교를 건너면 신과 왕의 영역이다.
그래서 인간의 영역은 금천교에서 차단되고 만다.
하지만 이곳 정릉에서는 금천교 앞에서 인간의 영역이 멈추는 것이 아니라
금천교를 지나는 물의 흐름을 따라 신과 왕의 영역의 테두리로 인간의 길이 연결되어 있다.
인간의 길위에는 유모차속 아이와 엄마들, 그리고 동네 아이들의 왁자지껄한 놀이가 벌어진다.
그래서 이곳 정릉은 신과 왕의 영역만이 존재하는 죽음의 공간이 아니라
후세를 보듬는 따뜻한 엄마의 품안이 되어준다.
태종은 계모를 자신의 눈에서 멀어지게 하기 위해 이 골짜기로 옮겼지만
세월은 이곳을 사람의 사랑이 가득한 곳, 엄마의 품으로 되돌려 놓았다.
정릉 재실
재실왕릉의 수호와 관리를 위하여 능참봉이 상주하던 곳으로 제례 시에는 제관들이 머물면서 제사에 관련된 전반적인 준비를 하던 공간이다. 능참봉의 집무실인 재실,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와 그 외 부속공간인 행랑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소실되었던 정릉재실은 2012년 발굴 조사하여 2014년에 복원하였다.
복원의 후유증일까? 옛 시간의 흔적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그저 복원이 목적이 되었을 뿐, 깨끗하고 단정함 속에서는 과거와의 연결됨이 전해져 오지 않는다.
재실자체가 흥살문이나 정자각과는 보이지 않도록 떨어져 있어, 이질감이 완화된다는게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지금까지 흘러왔던 시간만큼 또 흘러가야만 시간의 흐름이 연결될 수 있을까?
향/어로가 ‘ㄱ’자로 꺾여있다.
태종의명에 의해 현재의 자리로 옮긴 정릉은 홍살문부터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향/어로가 ‘ㄱ’자로 꺾여 있어 일반적인 왕릉 조성 양식과 차이를 보인다.
정릉은 흥살문과 정자각, 그리고 능침사이가 일자의 형태를 이루지 않고 있다.
풍수지리를 통해 기의 흐름을 중시했던 조선왕릉에서(물론 일반인의 묘자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정통의 상식을 벗어난 배치는
무인 석상을 설치하지 않았던 태종의 의중이 반영된 것을 아닐까?
조선 왕의 사람으로서 조선의 영원함을 위해 예를 갖추기는 하되
조선의 왕비로서의 신분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그리고 왕비의 후손이자신의 위엄에 도전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에,
능침과 정자각 사이의 완전성을 갖추되, 흥살문과 정자각 사이의 완전성은 인정하지 않은 형태를 부여했을 것이다.
그래서 능침과 정자각, 그리고 흥살문은 일직선의 흐름이 아니라 어딘가에 부딪혀 꺽이며 기세를 사그라야만 완전하게 되는 구조가 되었다.
왕은 홍살문 앞까지만 말을 탈 수 있었다.
말에서 내린 왕은 홍살문 옆 '판위'에서 자신이 조상에 대한 예를 다하기 위해 4번의 절을 하게 하게 된다.
올때와 마찬가지로 제향이 끝나게 되면 왕은 말에 오르기 전 이 곳 '판위'에서 4번의 절을 하면서 마지막 예를 다하게 된다.
정릉에는 정자각 옆에 수라간이 있는 것이 특색이라고 하면 특색일까.
하지만 수라간에는 화로가 전혀 없어, 이곳에서는 별도의 음식을 하는 조리하는 곳이라기 보다는
준비된 제향음식을 예에 맞춰 차리기 위한 준비공간이라고 보아야 할 듯 하다.
정자각을 기준으로 수라간 건너편에는 수복방이 있어, 정자각과 능침을 관리토록 한 흔적이 남아 있다. 수복방에도 마찬가지로 아궁이나 화로의 흔적은 보이지 않는다.
정릉의 정자각 사이 문으로는 능침이 올려다 보이지 않는다
그저 구릉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능침과 정자각의 거리는 보기에도 아찔할 정도로 가파르다.
그래서 정자각 속 왕과 신하는 능침속 조상(왕비)의 존재가 아득하기만 하다.
능침속 조상또한 정자각 속 왕과 신하에 다가가기가 아찔하기만 하다.
그리하여 제향의식 속 신의 존재는 이 곳 정릉에서는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머리 속 상상에 맡겨진다.
정릉의 비각
비각은 능 주인의 행적을 기록한 신도비나 표석을 세워둔 곳이다. 정릉의 표석은 1899년(고아무 3년) 에 신덕왕후를 신덕고황후로 추존하고 1900년(고아무 4년)에 옛 표석을 갈아서 만든 것이다.
정릉 비문 역문
순원현경 신덕고황후 강씨는 태조고황제의 두 번째 황후인데, 6월 14일에 탄생하여, 임신년(1392)에 조선을 개국하면서 현비로 책봉되었다. 병자년(1396)8월 13일에 승하하여 정축년(1397) 1월에 한성 황화방에 장사되었다가 태종 기축년(1409) 2월 23일에 양주 남사아리 경좌 언덕으로 이장하였다. 현종 기유년(1669)에 태묘에 부묘하고 순원현경의 휘호를 추가로 올렸고, 광무 3년 11월에 고황후로 시호를 추존하였다. 표석 전면과 음기를 삼가써서 소자의 작을 정성을 표한다.
광문 4년(1900)
정릉의 경우 舊표석 위에 新표석을 새겼기에 舊표석은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대한 신덕고황후정릉’ 이라는 비문에서 알 수 있듯 대한제국시절에 만든 비문이 비각에 세워져 있다,
(반면 정릉과 관계된 태종의 능인 헌릉의 경우 舊표석과 新표석이 나란히 존재한다)
정자각 뒤편 능침까지는 이렇게 신로가 마치 다리처럼 놓여져 있다.
하지만 이것이 신로인지, 신만이 건널수 있는 다리인지,
아니면 더이상 출입을 금한 태종의 금기의 표시였는지,
모르겠다 .
소전대는 조선 초기 왕릉에서만 볼 수 있다.
소전대는 축문을 태우는 곳으로 건원릉, 헌릉, 정릉에만 있으며 다른 능에는 소전대와 같은 역할을 하는 예감이 있다.
최초의 정릉터에서 이곳으로 천릉을 한 슬픔역사속에서
정릉의 소전대는 기구한 운명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정릉이 복원이 이루어지는 동안에도 소전대는 현재의 정자각 옆에 위치하지 못하고,
매점의 주전자 받침으로 사용되었다고 한다.
다행히 나중에 그 용도를 사료에 의해 검증하고, 다른 왕릉의 것들과 비교함으로써 정확한 용도가 확인되어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고 하니,
사후에도 혼백의 평온함은 쉽지 않았던것 같다.
건헌릉 정자각이나 헌릉 등에는 내부뿐만 아니라 외부에도 고패가 설치되어 제향일외에는 외부로부터의 태양빛과 비바람을 차단할 수 있도록 하였다.
하지만 이곳 정릉에는 정자각 내부에만 고패가 설치되어 있고, 외부에는 고리만 설치되어 있는 게 보인다.
이 곳 정릉의 능침은 해설사와 함께할 경우 능침 뒤 상부에서 정릉터를 아래로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저 아래에서 능침을 보던 일반적인 시각이 아니라
죽은 자의 시각에서 아래를 내려볼 수 있다는 점이다.
지금은 저 멀리 아파트에 의해 시야가 막힌 옹색함이 있지만
이전에는 탁트인 공간속으로 하늘에 연결되어 있었을 터이다.
죽음의 시간 '혼백' 중
'백'은 이 공간에 묻혀 있지만,
'혼'은 하늘에 올라가 있을 터
'혼과 백' 이 곳 능침에서 연결되어진다.
조선은 유교의 나라였지만
조선초기 고려의 불교정신이 이어져 내려왔다.
그래서 일반인들의 제사때와 달리 제향때 살생을 금해 고기류를 올리지 않았다고 한다.
혼유석 밑의 고석이 2개이다
혼유석을 받치는 고석은 4개나 5개가 일반적인데, 정릉의 경우 2개이다. 현 정릉의 고석은 옛 정릉에서 옮겨온 것이다.
다른 조선왕릉의 혼유석 받침과는 달리 왜 2개의 고석만이 혼유석을 떠받치고 있을까?
최초의 정릉의 그것을 그대로 옮겨온 것이라면, 작아진 릉의 규모때문이라고 할수도 없을 듯한데,
그렇다고 조성왕릉의 초기 형태라고 하기에는 다른 릉의 혼유석 밑 고석과 비교된다.
궁금하다...
사각 장명등에서 고려 양식이 엿보인다.
정릉에는 고려 양식을 계승한 사각 장명등이 놓여 있다. 옛 정릉에서 옮겨온 것이다.
조선이 유교의 나라이면서도
조선왕릉의 여러 곳에는 고려시대 불교의 정신이 녹아있기도 하지만
사각 장명등의 무엇이 정확한 고려의 양식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겠다.
정통 조선왕릉에서 보여야 할 것중 보이지 않는 것이 '무석인' 이다.
문인과 무인들의 호위를 받아 정사를 진행했던 조선시대에서 무인의 부재는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자신에 대한 반대시 언제든 무력을 투입할 수 있음을, 자신이 살아있는 무인임을 상징적으로 말하고자 했던 태종의 무언의 협박이었을까?
아니면 상대의 군사력이 커지는 것을 끝까지 견제했던 태종의,
무인석조차 용납하지 못했던 두려움 때문이었을까?
정릉의 금천교 밖은 사람의 길이다.
사람의 길은 현재에 이어져 동네 주민들의 휴식처가 된다.
그리고 정릉은 릉으로써만 그치지 않고 북악산과 연결된다.
그리하여 개발된 산책로는 자연스레 북악스카이웨인 산책로와 인접하게 된다.
지금이야 철책으로 두 공간이 구분되지만,
예전에는 두 공간은 한 공간이었을 터이다.
그리고 북악산 줄기를 넘으면 경복궁... 왕의 처소와 집무실과 연결된다.
태조는 왕비를 죽어서도 가까이 하고 싶었겠지만
태종은 왕비를 계모로조차 인정하지 못하여 이곳으로 천릉을 하였지만,
신은 언제든 북악산 줄기를 따라 태종에게 갈 수 있었을 것이다.
천하의 태종이 간직했을 불안감이 전해져 온다.
하지만 태종도 신덕고황후도 실존하지 않는 현재는
아름다운 자연만이 존재한다.
흥천사
흥천사는 지금의 정동에 1397년 태조비 신덕왕후의 능침사찰로 창건되었으며, 15세기 내내 왕조실록에 흥천사에 관한 기록이 등장하며, 흥천사의 수리를 국가기관이 주도한 것 등을 보면 국가에서 중요하게 여겼던 것을 알 수 있으나, 1510년 유생들의 방화로 소실되었다. 그 후 기록상 확실하게 증창되는 것은 1576년 인근의 신흥암을 능침사찰로 지정하면서이다. 하지만 이 암자가 정릉과 너무 가깝다는 이유로 1669년 함취정 터로 절을 롬겨 짓고 신흥사라 하였다. 그리고 또 다시 1794년 성민스님과 경신스님이 현재의 위치로 다시 옮기게 된다.
1853년 법당이 중수되고 1855년에 명부전이 창건되었으며, 1865년에는 흥선대원군의 도움으로 대방을 짓고 흥천사라는 본래 이름을 되찾게 되었다. 이후 1894년에는 명부전을 중수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1933년 독성각을 재건하고, 1942년에는 종각을 지었으며, 한국전쟁 이후에도 1959년 칠성각, 1967년 용화전, 1970년 연화대 등을 중수 또는 신축하여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오래된 역사만큼이나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전통사찰로 극락보전, 명부전, 아미타불도, 지장시왕도, 비로자나 삼신괘불도 및 괘불함 등이 서울시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다만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흥천사명 동종은 현재 덕수궁 내 보관되어 있다.
정릉으로 가는 길중에 하나가 정릉의 능침사찰인 흥천사를 거쳐 마을길을 통해 가는 길이다.
흥천사는 오래된 고찰이면서도 쇠락한 모습을 보였었다.
마치 태종에 의해 골짜기로 내몰린 신덕고황후의 신세처럼 누구의 기억속에도 남겨지고 싶지 않은 존재처럼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많은 시설들이 중건되거나 신축되고 있다. 안내도를 읽지 않는다면 새로운 현대의 사찰이 만들어지고 있는 듯 보인다.
여전히 공사의 손길이 있는 곳과 함깨 불심을 올리는 기도의 소리가 함께하고 있다.
‘손잡고 오르는 집’ 은 얼마전 신축된 수양공간이다.
흥천사 극락보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66호인 극락보전은 1853년(철종 4)에 세워진 것으로, 극락세계를 주관하는 아미타불을 모신 흥천사의 주불전이다. 태조는 1397년(태조 6)에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을 조성하고 곁에 흥천사를 지어 원찰로 삼았다. 극락보전은 다포로 공포를 짠 팔작지붕집이며,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이다. 판벽에는 불교 고사를 가득 그렸는데 반야용선도가 눈에 띈다. 꽃살문과 기둥 위에 장식한 용머리 조각은 조선 말기 건축에 나타나는 장식의 경향과 구조적 특성을 보여준다. 조선 후기 서울 근교 사찰에서는 대방이란 건물을 짓는 경향이 등장한다. 이는 염불당과 주지실, 부엌과 누마루를 결합한 건물인데, 흥천사 대웅전 앞에도 대방이 있다.
극락보전 뒤편 벽에는 십이지신의 신상들이 자리하고 있다.
오늘도 염화의 미소로서
우리의 기원을 들어주고 계신다.
흥천사와 정릉사이의 마을은 골목자체로 걷기의 기쁨을 느끼게 해 준다.
어느 붉은 벽돌집앞의 잘 꾸며진 정원과
이 곳, 저 곳 피어나거나 길러지고 있는 식물들로 인해
초록이 물드는 마을이라는 어느 담벼락의 표시가 정겹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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