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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떠나고 싶은 여행/서울

조선왕릉 - 선릉(宣陵), 정릉(靖陵)

by 심심한 똘이장군 2018. 6. 24.

서울 한복판 속 작은 쉼터 '선정릉(선릉(宣陵)과 정릉(靖陵))' 산책.

조선 9대 성종과 정현왕후의 능 선릉,

조선 11대 중종의 능 정릉.

간단히 이 둘을 합쳐 '선정릉 

 


관람시간은 계절에 따른 낮의 길이가 고려되어 월별 차이가 있다.

25~ 641,000

의외로 1개월, 1년의 상시관람권이 있다.

아마도 주말을 이용해 산책을 하는 분들을 위한 것이 아닐까,

그런 지역주민은 또 50% 할인도 된다.

 



하나의 능선을 사이에 두고 2개의 능(실제로는 3개의 봉분이 있는)이 존재하는 것이 색다르다



조선왕릉은 120기에 이르며, 능 42기, 원 12기, 묘 64기이다. 조선 왕족의 무덤은 무덤 주인의 신분에 따라 그 명칭을 달리하는데,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하며,

원은 왕세자와 왕세자빈 또는 왕의 사친의 무덤을 말하고,

그 외 왕족의 무덤은 일반인의 무덤처럼 묘라고 한다.

42기의 능 가운데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태조 첫번째 왕비 신의고황후의 능), 후른(정종과 정안왕후의 능)을 제외한 40기의 능이 남한에 있다. 500년이 넘는 한 왕조의 무덤이 이처럼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는 것은 세계에 그 유례를 찾기 힘들며 문화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조선의 왕릉은 일상 속에서 지명으로 들어본 곳들이지만,

실제로 가본 곳은 몇 곳 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처럼 이동수단과 도로사정이 좋지 않았을 조선시대...

이렇게 많은 왕릉이, 이렇게도 넓은 지역에 광범위하게 만들었다는 것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능을 만드는 것 외에도,

매년 조상께 예를 올리러 가는 길은 화려하면서도 많은 사람의 노력을 동반해야만 했다.

(정조의 화성행차를 보면 그 과정이 얼마나 대단했나를 짐작하게 한다)

조상에 대한 예를 다하기 위한 그들의 노력은 그 어려움을 뛰어 넘는 것이었나 보다.

그 노력의 깊은 바닥에는 조선왕조의 영원성에 대한 욕망이 자리잡고 있었을 터이지만,

시간의 흐름은 그러한 욕망을 허물어트리고 만다.



조선의 왕릉은 신의 세계와 현존하는 왕의 세계가 함께하는 공간이었다.

그 영역의 테두리 안쪽으로 일반 사람이 들어가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을 터,

하지만 사후 신의 휴식터였을 선정릉은

조선의 퇴락과 현대화의 흐름속에 인간의 휴식터로 기능의 많은 부분을 넘겨주어 버렸다.

과거와 현재의 흐름이 공존하는 곳.

신의 세계와 왕의 세계, 그리고 일반인의 세계를 구분하였던 공간이지만,

시간의 흐름속에 신계와 어계, 일반계는 어느새 하나의 세계로 섞여 공존하다가

지금은 사람들의 휴식공간으로 자리를 내어준 체,

일년에 한번 이루어지는 제례를 통해서만 신과의 만남이 이루어진다.

과거에는 선릉과 정릉 테두리 안쪽이 신과 왕의 세계였다면,

지금은 선릉과 정릉 테두리 안쪽은 일반인의 세계가 되면서,

테두리 밖으로 쫓겨난 신과 왕은 현대화된 문명 속에서 갈 곳을 잃은 듯하다.



하지만 이제 들려오는 아이들의 왈자지껄 활기찬 소리들...

어른들은 아이들이 과거를 배우기를 원하지만

아이들은 이 공간에서 과거를 말하지 않고 현재를 얘기한다.

그리고 미래를 꿈꾸기도 할 것이다.

역사는 결국 시간의 흐름이고, 시간의 흐름 속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의 사건들의 합이라고 한다면,

아이들의 왁자지껄도 역사의 동력이 되겠지





재실

제례에 앞서 제관들이 미리 도착하여 몸과 마음을 정화하고 제례를 준비하는 곳이다. 평소에는 참봉 등 관리가 이곳에 상주하면서 능역을 돌보았다. 주요 시설로 재실외에 향을 보관하는 안향청, 제례 업무를 주관하는 전사청, 제기를 보관하는 제기고, 행랑채 등이 있었으며 단청은 하지 않았다.

조선왕릉의 공간적 구성의 한 요소이다.



너무 깔끔해 재실의 느낌이 전혀 나지 않는 재실...

안내문이 없었다면 재실이 아니라

어느 고택을 손보아 놓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제를 위한 물품들이 보관되어 있지 않아 더 그래 보일 수도 있겠다.

신 앞에서 화려함으로 치장하는 것을 꺼려서 일까? 단청을 해 놓지 않아 고관대작의 고택같아 보이지는 않고, 맑고 정갈한 아낙네가 깨끗한 살림을 살아낸 것 같아 보인다.

하긴 재실이라고는 하나, 행랑채나 상주인력이 묵어야 할 공간이 있어야 하는

신과 왕의 공간내에서 유일한 살아있는 사람들의 공간이었으니

거주주택과 다를 바가 있을까?







수령 500년의 은행나무는

살아온 세월동안 자신이 가진 영험함을 보여줬을터,

하지만 이리저리 비틀어지고 벗겨진 모습들은 어느덧 자신의 영험함을 침범하는 것들과의 싸움이 고달퍼 보이는 모습이다.

이제는 자신의 고달한 삶을 대신해 줄 누군가를 찾고 있지는 않을까?

그렇지만 은행나무는 자신의 생이 다할때까지 자신의 본분을 다하려고 하는가 보다.

때가 되면 어김없이 자신의 푸르름 속에서 기꺼이 사람들에게 휴식처가 되어 준다.

자신의 힘듦을 내색하지 않은 체,







조선왕릉은 죽은 자가 머무는 성의 공간과

산 자가 있는 속의 공간이 

만나는 곳으로 그 공간적 성격에 따라 세 부분으로 나뉜다


능침공간 : 왕과 왕비의 봉문(능침, 능사이에 있는 성역 공간)

제향공간 : 죽은 자와 산 자가 함께 하는 영역으로 제사를 지내는 공간

진입공간 : 왕릉의 관리와 제례준비를 위한 공간







선릉

선릉은 조선 제9대 임금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윤시를 모신 동원이강릉(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이다.서쪽 언덕에 성종의 능침이, 동쪽 언적에 정현왕후의 능침이 조성되어 있다

성종의 봉분에는 12면으로 된 병풍석을 두르고 십이지신상을 새겼고 봉분 주위에는 12칸의 난간석을 둘렀다. 세조가 능에 병풍석을 세우지 말라고 유언을 남겼으나 성종의 봉분에는 병풍석이 설치되어 있다. 

성종의 능침은 '국조오례의'의 예를 따라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고, 문/무석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 석호 등을 배치하였다.


성종은 추촌 덕종과 소혜왕후의 둘째아들로 태어나, 1469년 예종이 세상을 떠나자 할머니 정희왕후의 명으로 13세에 경복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동안 '경국대전' 과 '국조오례의'를 반포해 조선의 법과 예를 완성하고, 조세제도를 정비하여 관수관급제를 실시해 백성의 부담을 줄였다. 홍문관을 설치하고 '동국여지승람' 등 많은 서적을 간행하였다. 그리고 사림세력을 등용하여 훈구와 사림간의 세력 균형을 이루었다 재위 25년에 38세로 세상을 떠났다.





성종과 정현왕후의 능은 두 개인 듯 떨어져 있지만

하나의 홍살문을 지나 하나의 정자각에서 좌측에 있는 성종에게 우측에 있는 정현왕후에게 제를 올리는 하나의 공간이다.



조선시대 궁궐을 보면 삼도(三道)라고 하여 박석을 깔아 가운데 조금 높은 왕의 전용도로인 어도(御道)와 어도를 중심으로 양쪽으로 신하들이 걸을 수 있는 낮은 길이 있다.

그런데 왕릉은 길의 명칭이 궁궐의 길과는 다르다.

가운데 길은 혼령이 다니는 신로(神路) 또는 향로이다. 신위를 운반할 일이 있다면 신로를 이용해야 한다. , 축문, 폐백과 제사 예물도 신로를 따라 오갈수 있다. 신도의 오른쪽 길은 왕이 다니는 어로(御路). 궁궐의 길처럼 신로는 높게 어로는 낮게 만들어져 있다.

결국 죽어서 신이 되는 영역이 왕릉에 있어서는 왕또한 신앞에서 낮은 존재임을 나타내 준다.



정자각 옆에는 성종과 정현왕후를 모시는 비각이 있다

성종과 정현왕후의 봉분을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지만 비각을 이리도 낮은 곳에 위치해 그들을 기억하게 한다.

종묘를 통해 역대 왕의 신주를 모셨던 것과는 다른 형태...






정자각에 오르내리는 계단도 신계와 어계를 엄격하게 구분해 놓아서

 이 곳이 신과 왕의 공간이며, 일반인의 공간과는 구분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능침공간은 일반인이 들어갈 수 없도록 입구가 막혀있다.

하지만 전형적인 조선왕릉의 능침공간 구조를 따르고 있는게 보인다.

물론 그 오랜 시간의 때가 존재하지 않는 (새롭게 단장을 했던 것일까?) 풍경속에서

왕릉의 뒷 배경으로 멀쑥하게 서있는 현대식 건물마냥

생경한 느낌이 드는 것은 나의 아쉬움일까?
















선릉

선릉은 조선 제9대 임금 성종과 계비 정현왕후 윤시를 모신 동원이강릉(같은 능역에 하나의 정자각을 두고 서로 다른 언덕에 능침을 조성)이다.서쪽 언덕에 성종의 능침이, 동쪽 언덕에 정현왕후의 능침이 조성되어 있다

정현왕후의 봉분석에는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 둘러져 있으며 성종의 능침과 같은 형태이다.

정현왕후 유씨는 영원부원군 윤호의 딸로 1473년에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었고, 1480년 왕비로 책봉되었다.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후 자순왕대비가 되었으며, 1506년에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을 폐위하고 아들 진성대군의 즉위를 허락하였다. 69세로 세상을 떠났다.


특이한 것은 정현왕후 릉으로 가는 길은 어로가 없이 신로만 있다.

하나의 정자각에서 정현왕후의 봉분까지는 신로만 있어 제향을 지내는 뮬퓸들만이 옮겨질수 있도록 한 것을 보면,

또다른 제례의식이 정자각이 아닌 곳에서 이루어졌는지도 모르겠다.













왕릉은 신을 위한 배려의 공간.

저 넓디 넓은 혼유석은 신들이 노니는 공간이라고 한다.

죽음을 슬퍼하는 공간이면서도

이승을 떠나 저승에 사는 신들이 즐겁게 놀 수 있도록 하였다.

슬픔이라는 것과 즐거움이라는 이율배반적인 것들이 공존한다.

이 세상에서의 슬픔이 저 세상에서의 즐거움과 연결되기를 희망하는 것은 인간의 꿈이었을까?

배려였을까?

아니면 현실에서 그러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었을까?



왕릉터 여기저기에는 다람쥐면 까치며, 참새며,

작은 땅것과 날것과, 나무와 꽃과, 하늘과 바람이 어우러진다.









정릉

조선 제11대 중종의 능

정릉은 중종의 단릉이다. 중종은 제9대 성종과 정현왕후의 아들로 태어나 1494년 진성대군에 봉해졌다. 이후 1506년 박원종 등이 연산군을 폐위하고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한 중종반정으로 왕위에 올랐다.

재위 기간 동안 연산군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아 새로운 왕도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조광조 등 사람을 등용하여 현량과를 실시하고 향약을 전국적으로 실시하여 새로운 향촌질서를 확립하였다. 인쇄술의 발달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편찬하였고, 비변사를 설치하여 국방체제를 정비하였다. 재위 39년에 57세로 세상을 떠났다.

중종의 능침은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고, 문/인, 석마, 장명등, 혼유석, 망주석, 석양, 석호 등을 배치하였다. 원래 정릉은 중종이 세상을 떠난 후 1545년 두 번재 왕비 장경왕후의 희릉 서쪽 언덕에 능을 조성하고 정릉이라 하였다가, 1562년 세 번째 왕비 문정왕후에 의해 지금의 자리로 능을 옮겼다. 문정왕후는 중종의 능침이 풍수상 좋지 않아 능을 옮겨야 한다고 했으나, 사상 문정왕후 본인이 중종과 묻히기를 원하여 능을 옮긴 것이다. 그러나 옮긴 정릉이 홍수 피해가 잦자, 문정왕후의 능은 현재의 태릉에 조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