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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떠나고 싶은 여행/서울

2019년 종묘대제 - 영원을 꿈꾸던 조선왕조

by 심심한 똘이장군 2019. 5. 5.

매년 5월 첫째주 일요일에 열리는 종묘대제.

쉽게 말하면 조선시대 왕의 신위가 모셔져 있는 종묘에서 올리는 제사와 그에 수반되는 예악들을 일컫는 말이다.

10시부터는 영녕전에서 2시간 동안의 제례가

14시부터는 정전에서 2시간 동안의 제례가 펼쳐진다.

그리고 12시부터는 광화문에서 세종로를 거쳐 종묘까지 어가행렬이 재현된다.


조선시대

왕과 세자, 문무대신들이 조선 왕들께 제사를 지내기 위해

그들이 기거하던 궁에서 죽은 자들의 공간인 종묘까지 오기 위한 행차는 근엄했을 것이다.

행사를 통해 왕실의 위상을 백성들에게 보이고, 유교국가로서 효를 숭상하는 모습을 만방에 알렸을 것이다.












일반 백성들의 생활터전인 종로를 거쳐, 백성들 모두가 왕실의 행차를 볼 수 있는 곳에 위치했던 종묘

종묘는 단순히 조상을 모시는 사당의 역할이 아니라

(그랬다면 왕과 왕비의 능을 별도로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조선이라는 왕조의 지속성에 대한 열망과 유교국가로서의 체계를 공고히 하는 수단이었지 않았을까?

왕의 신위를 모심으로써 5백년, 천년 이어질 조선왕조의 미래를 꿈꾸었을 것이다.

(10~20년만에 쓰러질 왕조라면 굳이 종묘를 만들 필요조차도 없을 것이기에)



종묘(宗廟)

 

조선 왕조의 역대 국왕들과 왕후들의 신주를 모시고 제례를 봉행하는 유교 사당이다. 서울특별시 종로구 훈정동 1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사적 제125호로 지정되어 있다. 위치상으로 창덕궁과 창경궁의 남쪽에 인접해 있다. 조선시대에는 서로 연결되어 있었으나 일제강점기에 도로가 나면서 끊기고, 현재는 이를 복원하기 위한 공사가 진행중이다.

 

종묘의 건물은 139410월 태조가 한양로 수도를 옮긴 그 해 12월에 지어졌고, 임진왜란 때에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즉위년(1608)에 다시 지어졌다.

건물들은 정전(正殿)과 영녕전(永寧殿)으로 나누어 정전에는 정식으로 왕위에 오른 선왕과 그 왕비의 신주를 순위에 따라 모시고, 영녕전에는 추존(追尊)된 선왕의 부모나 복위된 왕들을 모셨다. 그리고 정실의 출생이 아닌 왕이 그 사친(私親)을 봉안하는 사당으로서 따로 궁묘(宮廟)를 두었다.

종묘의 제사일은 4계절의 첫달 상순, 정초·단오·한식·추석, 동지의 납일과 매월 삭망(朔望)일로 정하였으며, 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친제하여 왕세자는 아헌관, 영의정은 종헌관이 되어 작헌(酌獻분향(焚香재배의 복잡한 절차를 밟으며 향사한다. 그러나 국상일의 경우에는 이를 피한다.

종묘행사는 국가적 행사인만큼 이에 따르는 의식과 의복·제기(祭器)의 규격, 제물(祭物)의 종류·수 등은 엄격하게 규정하고 준수한다[1]. 그리고 문묘와 달리 고려의 예를 따라 역대 공신을 위한 공신종사(功臣從祀)가 있다.

 

1392년 조선 태조는 즉위 12일 만인 816(음력 728) 자신의 4대조에게 차례로 목조, 익조, 도조, 환조로 왕의 칭호를 올리고, 그 비에게도 각각 효비, 정비, 경비, 의비의 존호를 올렸다. 8월에는 신하를 한양에 파견하여 고려 시대 남경의 이궁을 손질케 하고 수리를 끝나는대로 한양으로 천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신하들의 반발로 천도 계획을 유보하여 할 수 없이 개성에 있던 고려 왕조의 종묘를 허물고 거기에 새 종묘를 짓도록 명하였다. 그 뒤 태조는 재위 3(1394) 8월에 한양을 새 도읍지로 최종 결정하고 그해 10월 천도를 단행하였다.

태조는 가장 먼저 종묘와 사직을 건설하였는데, 유교 이념에 따라 궁궐인 경복궁을 중심으로 왼쪽인 동쪽에 종묘를, 오른쪽인 서쪽에 사직을 그 다음 해에 세웠다.[2] 종묘 공사는 천도하던 해 12월에 시작하여 이듬해 9월에 마쳤다.

종묘는 창건 당시 대실이 7칸이었고, 대실 안에는 석실 5칸을 만들었으며, 대실 좌우에는 익랑을 각각 2칸씩 이어 지었다. 그 밖에 따로 공신당 5, 신문(神門) 3, 동문 3, 서문 1칸 규모의 건물을 지었고, 빙 둘러 담을 쌓았다. 그리고 담 밖에는 신주 7, 향관청 5, 좌우 행랑 각각 5, 남쪽 행랑 9, 재궁(齎宮) 5칸을 지었다. 종묘가 완성되자 태조는 날을 받아 139510, 4대조의 신주를 개성에서 옮겨와 봉안하였다.

조선 시대에 종묘 정전은 태종, 세종대에 이르러 건축 형식이 정착된다. 태종은 종묘 앞에 가산을 조성하여 종묘가 주변 언덕에 파묻혀 아늑한 기운이 깃들도록 한 다음 종묘의 건물 형식을 고쳤다. 본래 종묘 건물은 ''자로 길게 생겼는데, 지금은 감실에 신위를 모신 몸채 건물과 그 양큰에서 직각으로 앞으로 꺾여 나온 동ㆍ서 월랑으로 구성되어, 가운데가 긴 ㄷ자형 건물이다. 태종 이래로 이 건축 형식이 종묘 건축의 기본 틀이 되었다.

현재 종묘를 구성하고 있는 중심 건물은 종묘 정전과 영녕전으로, 태조가 종묘를 건설할 당시는 종묘 정전뿐이었다. 영녕전은 정전에 모시지 않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별묘인데, 세종 때 처음 건립되었다.

건립 당시 종묘 정전의 감실 규모는 5칸이었다. 그러나 세종 원년(1419)에 정종이 승하하고 그 신위를 종묘에 모실 때가 되자, 종묘 정전 5칸에는 태조와 태조의 4대 조상을 합쳐 다섯 신위로 모두 차 있어서, 이제 이 다섯 신위에 더해 정종의 신위를 어떻게 모셔야 할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종묘에는 다섯 신위만 모시도록 예법에 규정되어 있어서 정종의 신위를 종묘에 새로 모시게 되면 목조의 신위는 정전에 모실 수 없게 되기 때문이었다.

 

이때 의논을 거듭하여 중국 송나라의 예를 따라 142110월 종묘 즉 지금의 정전 서쪽 바깥에 별묘(別廟)를 세워 목조의 신위를 옮겨 모실 것을 결정한다. 이 별묘가 지금의 영녕전이다. "조종(祖宗)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라"는 뜻의 영녕전은 종묘에서 옮겨온 신위를 모셨다고 하여 조묘라고도 한다.

건립 당시 영녕전의 규모는 태실 4, 양 옆 익실 각 1칸을 합하여 모두 6칸이었다. 영녕전이 완공되자 그해 12월 목조의 신위를 영녕전으로 옮겨 모시고, 정전인 종묘에는 익조의 신위를 제1실로, 도조 이하의 신위도 차례로 위로 옮겨 모시게 된다. 영녕전 건립으로 조선 왕조의 종묘 건축 제도는 종묘와 별묘를 두게 되고, 세월이 흘러 봉안해야 할 신위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증축을 하게 된다. 지금은 정전과 영녕전을 합하여 종묘라고 부르지만 원래 종묘는 지금의 정전을 말하며, 영녕전은 별묘였다.

앞서 말한대로 본래 종묘 정전에 다섯 신위를 모시기로 하였던 것인데, 그 뒤 다섯 신위 외에 다른 신위를 영녕전으로 옮기지 않는 불천위(不遷位)라는 제도가 생겨, 종묘 정전에 모시는 신위의 수는 다섯 보다 더 많아지게 되었다. 모셔야 할 신위의 수가 늘어나자 칸수를 늘려야 하는 상황이 생겼고, 그 결과 종묘 정전 건물은 증축된다. 조선 초기의 왕 가운데 불천위로 결정된 왕은 태종, 세종, 세조, 성종 등이다.

명종대에 이르러 종묘 정전의 부족한 감실을 해결하기 위하여 4칸이 증축되어 그 규모가 모두 11칸으로 늘어난다. 그 뒤 종묘는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게 되어, 재건에 대한 구체적인 작업이 진행되지 못하다가 마침내 선조 41(1608) 1월에 재건 공사를 시작하여 다섯 달 뒤 광해군이 즉위하고 나서 완공하게 된다. 재건에 앞서 종묘 제도를 임진왜란 전의 건축 형식으로 할 것인지, 소목제(昭穆制)를 기본으로 하는 중국 주나라의 옛 제도를 따를 것인지에 관한 논의가 신하들 사이에 이루어지다가 결국 종묘 정전을 임진왜란 전의 형식인 11칸의 규모로 재건한다. 재건된 종묘는 중국 고대의 제도와 다른, 고려 시대에 정착된 종묘 제도를 따랐다. 종묘 정전은 그 뒤 영조 2(1726)4, 헌종 2(1836)4칸을 증축하여 지금의 모습인 19칸으로 정착하게 된다.

영녕전도 정전과 더불어 임진왜란으로 불에 탄 뒤 1608년 종묘 중건 공사와 함께 광해군이 즉위하고 나서 완공되는데, 정전 4, 좌우 협실 각 3칸으로 모두 10칸 규모로 중건되었다. 그 뒤 현종 8(1667) 좌우 협실 각 1칸을 증축하고, 헌종 2(1836) 좌우 협실 각 2칸을 증축하여 현재의 규모를 갖추었다. 종묘를 증축하거나 수리할 때는 종묘에 모신 신주를 다른 곳으로 옮겨야 했는데, 이 경우 이전 장소로는 당시 쓰지 않던 궁궐이나 사당을 주로 이용하였다



종묘의 주출입구인 외대문을 가기에 앞서

하마비가 눈에 띈다.

말에서 내려 예를 갖춘 뒤 죽은 이의 장소인 종묘를 향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종묘전교를 건너며

산 자의 세상에서 죽음 자의 세상으로 넘어서게 되니,

저 앞에 보이는 외대문에 앞서 이 곳부터 마음은 조상들에 대한 안녕을 기원했을 것이다.



종묘 외대문을 향해 걷다보니 우측에는 우물가 자리가 표시되어 있다.

지금은 상하수도가 개발되어 있어 우물로서의 가치도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기능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종묘의 주 출입구는 외대문(外大門)인 정문(正門)이다.

정문은 3, 측면 2칸에 맞배지붕을 한 삼문 형식의 건물로, 창엽문(蒼葉門)이라고도 하였다고 하는데,

원래 기단이 있고 전면 중앙에 계단이 있었는데,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정문 앞 지면이 높아져 땅에 묻히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하마비에서 외대문까지 이르는 길을 보면

남산-외대문-정전의 축이 일직선이 아니다.

일부러 틀어놓은 것인지? 나중에 어떤 이유에 의해 틀어진 것인지 모르겠다.



정문을 들어서면 삼도(三道)가 북으로 길게 나 있다.

이 곳도 조선의 왕릉 배치와 동일하게 신로가 있다.

널찍하고 거친 돌로 깐 삼도는 가운데가 양 옆보다 약간 높게 되어 있어, 가운데의 약간 높은 길은 신향로(神香路)이고, 동측의 낮은 길은 어로(御路) 서측은 세자로(世子路)이다.

어로는 임금이 다니는 길이고, 세자로는 세자가 다니는 길이며, 신향로는 제향 때 향로를 받들고 다니는 길이다.




정문을 지나 조금 걷다보니 우측에 중연지가 보인다.

중연지는 1443(세종 25)에 사각형의 연못을 조성하고, 가운데 둥근 섬을 만들었는데,

하늘은 둥글고 땅은 평평하다는 옛 사상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대부분의 궁궐 연못에는 소나무가 심어져 있으나 여기에는 향나무가 심어져 있는 것이 특징이기도 하다.






중연지 너머에는 왕이 휴식을 취하는 곳이었던 망묘루(望廟樓)가 있다,

망묘루라는 이름은 제향시 왕이 종묘의 정전을 바라보며 선왕과 종묘사직을 생각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망묘루 옆에는

종묘에 쓰는 향축폐(香祝幣)와 제사 예불을 보관하고 제향에 나갈 제관들이 대기하던 곳인 향대청이 있다.

오늘은 가장 큰 제례가 있는 날이기에 행사를 준비하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망묘루 뒤쪽에는 공민왕 신당이 자리하고 있다. 공민왕 신당은 고려 공민왕의 신위를 모신 신당으로, 조선 태조가 종묘를 지을 때 공민왕의 업적을 기리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신당을 짓도록 하였다고 하는 것을 보니,

어쩌면 자신이 세운 조선이 고려와 완전히 단절된 것이 아니라 많은 부분에서는 고려의 정신을 계승했음을 보여줌으로 해서 고려시절 인재들의 불만을 잠재우고자 했던 정치적 고려도 있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을 해 본다.

신당 안에는 공민왕과 그의 왕비인 노국대장공주의 영정과 준마도가 모셔져 있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탄 것을 다시 지었으며, 봄과 가을마다 제사를 지냈다.







국보 제227호인 종묘 정전(宗廟正殿)은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 그리고 세상을 떠난 후에 왕으로 추존된 왕과 왕비의 신위를 봉안한 왕실의 사당건축물이며, 101m의 긴 건물로, 종묘의 중심이다

종묘는 1392년 조선왕조를 일으킨 태조 이성계가 도읍지 후보로 계룡산ㆍ무악 등 여러 곳을 물색하다가 태조 38월 최종적으로 한양을 조선왕조의 도읍지로 정하고, 이 해 1028일 고려의 옛 도읍지 개성을 벗어나 천도를 한 해에 터를 개척하기 시작하여, 다음 해인 태조 4929일에 새 궁궐과 함께 준공되었다고 한다.

종묘는 대실이 7칸인데, 대실 안에는 석실 5칸을 만들고. 좌우에는 익랑을 각각 2칸씩 이어 지었으며, 그 외에 별도로 공신당 5, 신문 3, 동문 3, 서문 1칸 규모의 건물을 지었고, 빙 둘러 담을 쌓았다.

종묘가 완성되자 태조는 즉위 4년인 139510월 태조의 4대조인 목조와 효비, 익조와 정비, 도조와 경비, 환조와 의비의 4대 신주를 개성에 옮겨와 봉안하였다.

정전 건물의 전면은 퇴칸을 구성하는 기둥만 서 있고 벽체 없이 모두 묘정으로 트였으며, 측면과 뒷면은 모두 전벽돌로 두껍게 벽체를 쌓아 내부 공간을 어둡게 함으로써 신성함을 높이고 있다.

내부로 출입하는 문은 각 칸마다 두 짝씩 달렸는데, 그 맞춤이 정연하지 않고 약간 뒤틀려 아래위가 벌어져 있다. 이는 혼 드나드는 통로임을 상징하기도 하고, 실제로 통기구 역할을 하기도 한다. 문하방(門下枋) 좌우에는 신방목(信枋木)이 있고, 신방목 머리에는 삼태극(三太極)이 조각되어 있다. 문 외부에는 발을 칠 수 있게 되어 있어, 제향 때 판문을 열어 발을 늘어뜨리고 제의를 행한다. 내부는 칸막이 벽체없이 전체가 하나의 공간으로 이어져 있으며, 뒷면 퇴칸에는 각 칸마다 신주를 모신 감실을 두었다. 각 감실에는 서쪽에 왕, 동쪽에는 왕비의 신주가 차례로 봉안되어 있다. 이러한 신실 구성 형식을 당(건물)은 같으나 실(칸막이)은 달리하는 동당이실(同堂異室)제도라도 한다.

종묘 정전 감실은 서쪽을 윗자리로 하여 제1실인 서쪽 첫 번째 칸에 태조의 신위가 모셔져있고, 동쪽으로 가면서 각 왕과 비를 합쳐 모두 49신위가 19감실에 모셔져있다.


이날은 너무 많은 사람으로 인해 정전터에 들어가 보지 못하고 밖에서만 볼 수 밖에 없었다.

밖에서만 보는 정전의 지붕에서조차 절제된 웅장함이 느껴진다.

다음 종묘 방문때는 정전의 엄숙미와 경건함을 보다 더 조용하게 음미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종묘에서 내가 흥미있어 한 것은,

종묘가 단지 역대 왕의 신위만을 모신 공간이 아니라는 점이다.

공신당이라고 하여 역대 왕을 모셨던 신하중 공이 컸던 신하들도 함께 모셔 제례를 지냈다는 점이다.

나라를 이끌어 간다는 것이 왕 한 사람만의 역량이 아니라는 점을 인식한 것이기도 하고,

조선이 왕의 국가이기도 했지만 문무대신들(사대부)의 무시못할 힘을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하는 점이었다.

(조선시대 내내 왕권강화와 신권강화의 권력싸움이 끊이지 않은 점을 보면...)


공신당

 

역대 왕의 배향 공신 94 신위 중 83 신위를 모신 곳으로, 종묘 정전이 증축됨에 따라 이와 함께 동쪽으로 증축되어 지금은 16칸의 긴 건물이 되었다. 공신당 전면 중앙부 3칸에는 판문(板門)이 설치되어 있고 나머지 칸에는 하부에 벽체를, 그 상부에 광창(光窓)을 설치하였다. 그 외 세 면의 벽은 전벽돌로 감싸여있다.










보물 제821호인 종묘 영녕전(宗廟 永寧殿)은 종묘 정전에서 옮겨온 신위를 모신 종묘의 별묘다. 서울에 있는 지금의 종묘는 태조 4년 건립되었으며, 세종 때에 이르러 현재와 같이 정전과 영녕전이 있는 종묘건축제도로 완비되었다. 세종 원년에 이르러 2대 왕인 정종이 승하하고 그의 신위를 종묘에 모실 때가 되자 이미 종묘에 모셔져 있는 태조의 4대조와 태조의 신위, 그리고 정종의 신위를 어떻게 모셔야 하는 문제가 거론되게 된다. 정종의 신위를 종묘에 새로 모시게 되면 목조의 신위는 정전에 모실 수 없게 되기 때문이었다.

이때 의논을 거듭하여, "그 신주를 묻어 버린다는 것은 정말 차마할 수 없는 일이며, 또한 간직할 만한 곳도 없다."고 의견을 모으고, 중국 송나라에서 따로 별묘인 사조전을 세워 4조를 모시는 예를 채택하여, 지금의 종묘, 정전 서쪽 바깥에 별묘를 세워 목조의 신위를 옮겨 모시는 것으로 결정한다.

영녕전의 '영녕(永寧)'"조종과 자손이 함께 길이 평안하라"는 뜻에서 취한 것이다. 별묘인 영녕전은 '조묘'라고도 한다.

영녕전은 네모나게 둘레담으로 쌓아 의례를 행할 수 있는 묘정 공간을 형성하고 남쪽 담에는 신문을, 동쪽과 서쪽 담에는 각각 동문과 서분을 두어 제례시 통로를 마련하고 있다. 영녕전도 정전처럼 묘정 월대에 신로가 나있는 구성이다. 현재 영녕정 건물은 중앙에 정전 4, 좌우에 각각 협실 6칸씩을 두어 모두 16칸으로 구성되어 있고, 좌우 협실 양끝에 직각으로 덧붙여서 동월랑과 서월랑 5칸이 있다. 내부 공간 구성과 이용은 기본적으로 종묘 정전과 같다.

영녕전 제례는 정전보다 한 단계 낮게 행해졌으며, 건축 규모 면에서는 영녕전은 정전보다 건축 영역이 좁다. 또 형식 면에서도 영녕전은 4대조를 모신 부분만 정전과 같은 크기와 높이이고, 옆 익실은 정전보다 크기가 작다. 영녕전에는 정전과 달리 공신당과 칠사당이 없는데, 이곳에 모신 목조, 도조, 환조, 익조는 추존된 왕이므로 신하가 없어서, 함께 영녕전에 모시게 되는 왕도 도리상 신하를 데리고 들어갈 수 없다는 이유가 작용한 것이다. 물론 엄연히 영녕전에 모셔진 왕의 배향공신도 종묘 배향공신이다.

영녕전에는 모두 34신위가 16감실에 모셔져 있다.

한때 폐위되었다가 숙종 때 복위된 단종의 신위는 종묘 영녕전에 모셔져 있는 반면,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의 신위는 정전과 영녕전 모두에서 제외되어 있다,



영녕전의 정문을 지나면

사람의 허리위치까지 제단이 올려진 넓은 공간이 펼쳐진다.

그니고 시위가 모셔진 곳은 거기에 추가적으로 높이를 더 높여놓았다.

일반인들은 정문을 지난 곳까지만

그 위의 공간은 제례를 준비하는 사람만이,

그리고 마지막은 신위가 있는 것이다.

산 사람과 죽은 자간의 공간을 높이로서 구분해 놓음으로써

단 아래에 있는 산 사람들은 눈 앞에 펼쳐지는 모습에 저절로 경건함을 표할 수 밖에 없는 구조가 된다.

저들에 대한 나의 우러름과 경건함은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표현되어 질 수 밖에 없다.










종묘 제례

 

조선시대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봉안한 종묘에서 지내는 제사이며, 종묘 제례악(宗廟祭禮樂)에 맞추어 진행된다. 종묘 제례와 종묘 제례악은 각각 국가무형문화재 제56호와 제1호로 지정·보존되고 있으며, 2001518일에는 '종묘 제례 및 종묘 제례악'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의 '세계 문화유산 걸작'에 함께 지정되었다.

현재는 종묘대제라 하여 매년 5월 첫 일요일에 거행되고 있으며, 광화문에서부터 종묘까지 어가행렬이 재현되고 있다.

 

조선 시대의 종묘제례는 춘하추동 4계절과 12월 납일(臘日)에 봉행하였는데, 융희(隆熙) 2(1908)에 공포된 칙령 향사이정령(享祀釐正令)에 의하여 납향제(臘享祭)가 폐지되고 4계절의 첫달인 춘정월·하사월·추칠월·동시월 상순내에 택일하여 봉행하고, 배향공신제(配享功臣祭)는 동향일(冬享日)에 한하여 행하였으며, 영녕전(永寧殿)은 춘추 두 번 종묘 제사와 더불어 향사(제사)하였다. 일제강점기 때에는 이왕직(李王職) 주관으로 향화(香火)만 올렸고, 광복 뒤에도 혼란·전쟁 등으로 향화마저 못하다가, 1969년에 전주이씨대동종약원이 주관하여 제향을 행하기 시작했다. 1975년 종약원은 종묘대제봉향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정부에서도 지원하여 매년 5월 첫째 일요일에 전통제례의식으로 대제를 봉행하고 있다.

 

종묘에는 태조에서 순종에 이르기까지 19()의 신위를 봉안하고 있으며 별전(別殿)인 영녕전에는 16실의 신위를 봉안하고 있다. 서편을 위로하여 제1실이 있고 제19실이 동편 끝에 있으며, 영녕전도 같으나 전내 중앙에 정중실(正中室)을 삼아 목조ㆍ익조 등 태조 위의 4대 신위가 있다

 

제향은 왕이 직접 행하는 친행(親行)과 대신으로 대행하게 하는 섭행(攝行)이 있다. 친행과 섭행은 제관의 명칭과 품계(品階) 또는 축문(祝文)만 다를 뿐이다.

절차는 홀기(笏記)의 창홀(唱笏)에 따라 진행된다. 제례절차는 제관이 정해진 자리에서는 취위(就位) · 영신(迎神) · 신관례(강신례) k· 진찬(進饌) · 초헌(初獻) · 대축(大祝) · 아헌(亞獻) · 종헌(終獻) · 음복(飮福) · 철변두(撤籩豆) · 망료(望燎) 순으로 진행된다.

영신에서는 보태평지악(保太平之樂)과 보태평지무(保太平之舞)9번 반복 연주하고 일무(佾舞)는 문무(文舞)를 추며, 신관례 때 음악은 등가(登歌)에서 전폐(奠幣) 희문(熙文)을 반복 연주하고 일무는 문무를 춘다. 풍안지악(豊安之樂)도 연주한다. 초헌례에서는 보태평지악과 보태평지무를 올리고, 축문이 끝나고 초헌관이 원위치로 가면 악이 그치고 다시 보태평지무와 정대업지무(定大業之舞)를 올린다. 아헌례와 종헌례에서는 정대업지악(定大業之樂)과 정대업지무를 올린다. 음복례가 끝나면 옹안지악(雍安之樂)을 올린 다음 흥안지악(興安之樂)을 올린다.

제악(祭樂)은 세종 때 정한 종묘의 악에는 경안(景安승안(承安숙안(肅安옹안(雍安수안(壽安서안(舒安) 등이 있고 춤에는 열문(烈文소무(昭武) 등 아악(雅樂)이며 아헌부터 향악(鄕樂)을 교주하였다. 세조 때에는 세종께서 회례악무(會禮樂舞)로 창제한 정대업·보태평을 약간 덜고 보태서 종묘의 악으로 제정,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악기는 아쟁 · 당피리 · · 편종 · 장고 · 젓대· 방향(方響) · 해금 · 태평소 · 대금 · 진고(晋鼓) 등이다.

 

1.취위(就位): 제사가 시작하기 전에 제관(祭官)들이 정해진 자리에 배치됨

2.영신(迎神): 조상신을 맞이함

3.전폐(奠幣): 헌관(獻官)이 폐백을 신위(神位) 앞에 올림

4.신관례(晨祼禮): 왕이 제실(祭室)까지 가서 향을 피워 신을 맞아들임

5.진찬(進饌): 음식과 고기를 올림

6.초헌례(初獻禮): 초헌관(初獻官)이 술을 올리고 절하며 축문을 읽음

7.아헌례(亞獻禮): 신에게 둘째 술잔을 올림

8.종헌례(終獻禮): 마지막 술잔을 올림

9.음복례(飮福禮): 제사에 쓴 술이나 음식을 나누어 먹음

1.철변두(撤籩豆): 제상에 놓인 제기(祭器)를 거둠

2.송신(送神): 조상신을 보냄

3.망료(望燎): 제례에 쓰인 축문과 폐를 태움

4.제후처리(祭後處理): 제례가 끝난 뒤 정리함

 

제기(祭器)63기가 있으며, 제물(祭物)은 삼생(三牲), 이갱(二羹), 서직도량(黍稷稻梁), 이제(二齊), 삼주(三酒), 육과(六果), 육병(六餠), 이포(二脯), 사해(四醢), 사조율료(四俎率膋), 모혈(毛血) 등을 쓴다.

제복(祭服)은 왕은 구장면복(九章冕服), 즉 면류관(冕旒冠)에 구장복을 입었다. 면류관의 모() 위에 장방형 판은 짙은 흑색, 안은 홍색이며, 앞뒤에 황······녹색의 주옥(珠玉)으로 구슬줄을 9류ㆍ12류씩 매달고 관 위에는 옥잠(玉簪)을 꽂았다. 구장복은 짙은 흑색이며, 안은 청색으로 된 대례복(大禮服)이다. 상의 양어깨에는 용을 수놓았고, 등에는 산이 그려져 있다.

현행 제례(祭禮)는 간략화 되었다.





















5월 푸르름은 종묘를 가득 덮고 있다.

영녕전, 정전의 뒤편에서 창경궁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가 본다.






지금은 원남동 마을과 이렇게 성벽하나로 구분되어진 종묘.

죽은 자와 살아가는 자의 경계가 그리 높지 않다.




종묘를 가다보니 종묘앞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그저 스쳐지나칠 뿐

사람들의 관심에서 멀어져 있는 기념물이 있다.

종묘의 외대문 왼쪽편에는 '월남 이상재 선생' 의 동상이 자리잡고 있다.

대한제국 시절 개화파 운동가이자, 일제 강점기 조선시대 독립운동가 이셨던 이상재 선생님을 추모하는 동상이다.


조선 역사의 정통성을 모아놓은 종묘 옆,

조선에서 대한제국, 일제시대를 거치는 동안 변화를 꿈꾸었다, 일제의 대항하던 한 인물의 모습속에

조선의 흥망성쇠와 맞물려 고뇌하던 우리 국민들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


월남 이상재

 

이상재(李商在, 1850103~ 1930329)는 충청남도 출신으로 고려 시대 학자 겸 정치가 이색의 후손이다. 조선후기, 대한제국의 정치인으로 개화파 운동가였으며, 일제 강점기 조선 시대의 교육자, 청년운동가,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 언론인이다. 자는 계호(季皓), 아호는 월남(月南)이다. 본관은 한산이다.

독립협회, 만민공동회에서 민중 계몽운동을 하였다. 그러나 189911월 독립협회, 만민공동회는 강제 해산되고, 1902년 개혁당 사건에 연루되어 투옥되었다가 풀려났으며 한일병탄 이후에는 관직을 사퇴하였다. 1905년 이후에는 윤치호와 함께 YMCA를 지도하였다.

물산장려운동과 신간회운동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