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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떠나고 싶은 여행/서울

한양도성순성길 돌아보기 시즌2 - 혜화문, 흥인지문, 남산타워, 숭례문

by 심심한 똘이장군 2022. 4. 18.

몇 년전 한바퀴를 돌았던

한양도성순성길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까?

 

둘러보기 시즌 2
 

오늘은 혜화문을 출발해 낙산코스와 남산코스를 통해 숭례문까지 가는 일정

오늘은 반코스로 시작

 


혜화문

 

1397년(태조 5) 도성을 에워싸는 성곽을 쌓을 때 도성의 북동방에 설치한 문(門).

동소문(東小門)이라고도 한다. 도성에는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小門)이 설치되었는데, 이 문은 동문과 북문 사이에 세워졌다. 처음에는 문 이름을 홍화문(弘化門)이라 하였다가 1483년(성종 4) 새로 창건한 창경궁의 동문을 홍화(弘化)라고 정함에 따라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1511년(중종 6) 혜화로 고쳤다.

1684년(숙종 10) 문루(門樓)를 새로 지은 후 한말까지 보존되어 오다가 1928년 문루가 퇴락하였으므로 이를 헐어버리고 홍예(虹霓)만 남겨 두었는데, 일제는 혜화동과 돈암동 사이의 전차길을 내면서 이마저 헐어버려 그 형태도 찾을 수 없도록 만들었다. 당시 북문(북대문)은 일반인의 통행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이 문은 양주·포천 방면으로 통하는 중요한 출입구 구실을 하였다. 1975년부터 시작되어 1980년에 완공된 서울성곽의 일부로 1992년에 복원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혜화문 [惠化門]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혜화문도 관리사무소를 두는 등 예전보다는 정비가 잘 되어진 모습이다.

하지만 도성길로 보자면, 혜화문의 좌우 성곽은 모두 잘려나가고 혜화문만 남아 있는 모습이 아쉽기는 하다.

창경국과 종묘의 연결이 복원되듯이,

혜화문을 중심으로 하는 성곽들도 복원되기를 바래본다.

 

혜화동에서 한성대입구역으로 연결되는 큰 도로를 건너면

낙산코스의 초입 성곽길이 시작된다.

원체 오래전부터 정비도 잘 되었고, 드라마, 영화의 배경 등으로도 많이 나온 터라 사람들이 꽤 많다.

 

한 겨울에는 운영하지 않더니

주민과 산책나온 사람들을 위한 마실카페도 운영되고 있다.

특이하지는 않지만, 저 공간에서 보는 삼선교, 성북동, 돈암동의 모습은 또 다른 느낌이 든다.

 

사람 중에도 마찬가지겠지만

편한 곳을 놔두도, 숙이 성곽의 돌축대 사이 틈에 자리잡고 생명력을 이어가는 식물들을 보면 안쓰러움과 대단하다는 마음이 동시에 느껴지곤 한다.


 낙산

 

서울 종로구와 성북구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산. 조선시대 한양 성곽이 낙산 능선을 따라 만들어졌다.

 

서쪽의 인왕산(仁旺山)과 동서(東西)로 마주보며 대치하는 산으로,  한양의 좌청룡에 해당하는 산이다. 높이는 약 125m이다. 산 전체가 노출된 화강암(花崗岩)으로 이루어져 있고 산 모양이 낙타(駱駝)의 등과 같다고 하여 낙타산 또는 낙산이라 불리게 되었다. 서울 남산, 인왕산, 북악산과 함께 서울을 둘러싼 능선을 형성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낙산의 능선을 따라 성곽이 만들어졌다. 산 북쪽에 있었던 홍화문(弘化門:東小門)은 없어졌으나, 남쪽에 있는 흥인지문(興仁之門:東大門)은 남대문과 함께 서울의 상징이 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낙산 [駱山]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한양의 좌청룡으로 조선시대의 흥망을 함께했던 낙산.

이제는 길흉화복과 방어의 의미보다는 서울시민의 휴식처로서의 친밀감으로 다가오는 곳이다.

 

하루를 마감하는 노을명소 "개뿔"

맥주한잔과 함께하는 서쪽 하늘의 붉은 노을은 마음의 평화를 가져오기 충분하다.

 

외관이 특이한 빈티지 숍도 낙산에 한 자리 차지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관광객이 많이 움직이는 동선은 아닌 듯 한데....

 

 

일본풍 건물도 아닌데, 일본식 우동을 파는 것같은 우동집.

그런데 "기생"이라는 글자도 눈에 띈다.

어떤 컨셉의 가게일지 궁금하다.

 

동대문 공원은 이제 시민들의 휴식터로 완전 자리매김한 것 같다.

예전에는 크기만 크고 어수선한 느낌이 들곤 했는데,

따뜻한 봄 햇살 맞으며 바라보는 종로와 동대문 통이 제법 편안하다


흥인지문

 

서울 성곽은 옛날 중요한 국가시설이 있는 한성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도성(都城)으로, 흥인지문은 성곽 8개의 문 가운데 동쪽에 있는 문이다. 흔히 동대문이라고도 부르는데, 조선 태조 5년(1396) 도성 축조때 건립되었으나 단종 원년(1453)에 고쳐 지었고, 지금 있는 문은 고종 6년(1869)에 새로 지은 것이다. 앞면 5칸·옆면 2칸 규모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모양을 한 우진각 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그 형태가 가늘고 약하며 지나치게 장식한 부분이 많아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바깥쪽으로는 성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하여 반원 모양의 옹성(甕城)을 쌓았는데, 이는 적을 공격하기에 합리적으로 계획된 시설이라 할 수 있다.흥인지문은 도성의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을 갖추고 있으며,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흥인지문 (대한민국 구석구석, 한국관광공사)


 

한참을 복원공사를 하더니

흥인지문도 제법 예전의 성곽의 모습을 갖추었다.

숭례문에 비해 관심도는 떨어지지만, 물론 크기도 작다.

어엿한 한양의 4대문 중 하나로서 한양의 중요한 의미를 지닌 곳이기도 하다.

특히나 문 앞에 보이는 옹성은 숭례문, 숙정문 등에서는 볼수 없는 양식이라 특이하게 느껴진다.  

 

 

예전 동대문운동장에서 대학야구를 보던 기억, 축구를 보던 기억이 있던 나로서는

아무래도 동대문디자인플라자[ Dongdaemun Design Plaza(DDP) 터에 대한 느낌이 다른 것 같다.

2007년 동대문운동장을 철거하고 과거의 역사 위에 지어진 DDP.

한껏 미래를 향하는 공간임을 뽑내는 외관을 보며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요리조리 연결된 DDP 외부의 길들은

외부끼리도, 내부끼리도, 내부와 외부의 연결공간으로 나를 이끈다.

누군가에게는 피아노를 치며 다른이와 소통하는 공간으로,

누군가는 아무도 몰래 사색하는 공간으로, 

 

나름 DDP의 포토존

오르막 계단의 햇살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차없는 DDP만의 공간과 맞닿는다

 

DDP를 지나 광희문을 가는 길

앗! "킹스포츠"

대학시절 선배에 끌려 들어간 "동국대학교 야구동아리 (LAE)"

그 시절 동대문야구장 주변에는 수많은 야구용품점들이 있었다.

"킹스포츠"는 그 시절, 야구용품을 사던 메카였다.

심정수 선수의 우람한 몸을 직관했던 곳.

수많은 색상과 가격대의 글러브, 알루미늄 배트, 야구공...

가난한 동아리 활동시절 조금이라도 싸고 좋은 야구용품을 사기 위해 애용하던 "킹스포츠"가 터를 옮겨 오늘 불쑥 나에게 나타났다.

 

아니 광희문 주변이 이렇게나 깨끗해졌다고?

도로로 인해 한쪽 성곽은 싹뚝 잘려나갔지만,

이곳이 한양도성의 일부였음을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 같다.

 

참 광희문은 한양도성의 4소문중 하나.

광희문(남소문), 동소문(혜화문), 북소문(창의문), 그리고 사라지고 없는 소의문(서소문)

 

한양도성의 4대문은

숭례문(남대문), 흥인지문(동대문), 숙정문(북대문), 그리고 사라지고 없는 돈의문(서대문)

 


광희문[ 光熙門 ]

서울 중구 광희동(光熙洞)에 있는 조선의 사소문(四小門)

시구문(屍軀門)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하였으며 서소문(西小門)과 함께 시신(屍身)을 내보내던 문이다.1396년(태조 5) 도성을 축조할 때 창건되었으며, 1422년(세종 4) 개축된 것으로 추측된다. 《숙종실록(肅宗實錄)》에 1711년(숙종 37) 민진후(閔鎭厚)의 건의로 금위영(禁衛營)으로 하여금 개축하게 하고, 문루(門樓)는 목재를 구하기가 어려우므로 후에 개축하기로 하였다는 기사가 있으며, 1719년 문루를 세워서 광희문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그 후 1975년 도성복원공사의 일환으로 석문을 수리하고 문루를 재건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광희문 [光熙門]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광희문 성곽을 따라 장충동 마을안을 지나다보면, 신라호텔 맞은 편에 도착하게 된다.

남산으로 바로 가려면, 장충체육관쪽 큰 도로르 통해 국립극장으로 가면 되겠지만

성곽길을 가기로 했으니,

신라호텔 면세점 옆에 있는 성곽길로 gogo!

 

예전에 다녔을 때보다는 확실히 정비가 더 잘 되어 있는 모습이다.

낮시간이라 약간 덥기는 하지만, 성벽 그늘의 도움을 받으며 오르막 길을 간다.

 

반얀트리호텔 주변의 다산팔각정에 도착해 주변을 다시 한번 둘러본다.

한강 이남과 한강 이북의 지역을 한 눈에 볼수 있는 곳.

정자 2층에 올라 바람을 맞아본다.

 

반얀트리호텔을 지난 국립극장쪽으로 가다보니

남산공원을 알리는 큰 이정표가 보인다.

여기까지는 남산순환로와 연결되어 남산정상을 가기 위한 많은 시민들이 보인다.

 

난 가파른 한양도성 순성길로...

성곽길 653계단은 여전히 깔딱코스였다. ㅜㅜ

 

오르막 계단의 끝

남산타워가 바로 손에 잡힐 듯 하다.

 

남산정상(남산타워 아래)에서 바라보는 서울의 사방풍경은

녹지가 많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고층의 빌딩 숲이다.

 
남산타워에서 숭례문쪽으로 내려가는 길.
역사를 기억하기 위해 일본제국주의 시대의 신사터도 일부 복원되어 있다
과연 굳이 신사터를 표시하는 것이 맞는 것일까라는 의문도 들었지만, 역사라는 건 지금의 시점이 아니라 후일, 후세대에 의한 판단도 중요하다는 점에서는 가치가 전혀 없지는 않겠구나 라고 생각하면 의문을 접는다.

 

예전에는 보지 못했던 백범광장이 조성을 끝내고 시민의 휴식공간이 되어 있다.

백범김구 동상, 이시영 초대부통령상, 안중근의사기념관 등

일제에 항거했던 투쟁의 역사 또한 후세대를 위해 남겨져 있다.

굴곡의 우리 역사 속 선대분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지금 우리의 삶이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그 과정에는 옳기도 하고 틀리기도 한 굴곡들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의 옳고 그름은 후세대의 기준에 의한 것일 터...

선대들은 선대들 나름의 최선의 선택을 해 나갔을 것이다.

현 세대의 치열한 삶은 후세대들에게 어떠한 평가를 받을까?

그 답은 모르겠지만 우리 또한 후세대에게 미안하지 않을 만큼 치열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숭례문

 

정면 5칸, 측면 2칸, 중층(重層)의 우진각지붕 다포(多包)집이다. 서울 도성의 남쪽 정문이라서 통칭 남대문(南大門)이라고 불린다. 1396년(태조 5)에 짓기 시작하여 1398년(태조 7)에 완성되었고, 1447년(세종 29)에 개축하였다. 그러나 1961∼1963년에 있었던 해체, 수리에 의한 조사에서 1479년(성종 10)에도 비교적 대규모의 보수공사가 있었던 것이 밝혀졌다.

이 문은 중앙부에 홍예문(虹蜺門)을 낸 거대한 석축기단 위에 섰으며, 현존하는 한국 성문 건물로서는 가장 규모가 크다. 석축 윗면에는 주위에 높이 1.17m의 벽돌로 된 여장(女墻)을 돌려 동·서 양쪽에 협문(夾門)을 열었고, 건물의 외주(外周) 바닥에는 판석(板石)을 깔았다.

건물 내부의 아래층 바닥은 홍예 윗면인 중앙간(中央間)만을 우물마루로 하고 나머지는 흙바닥이다. 지붕은 위·아래층이 모두 겹처마로 사래 끝에는 토수(吐首)를 달고 추녀마루에는 잡상(雜像)과 용머리[龍頭], 그리고 용마루 양가에는 독수리머리를 올렸다.

이 건물은 특수한 목적을 가진 성문이기 때문에 천장을 가설할 필요가 없어 연등천장으로 되어 있다. 특이한 것은 이 건물의 지붕 형태가 어느 시기에 변경된 것인지 뚜렷하지 않으나 당초에는 평양 대동문 또는 개성 남대문과 같은 팔작지붕이었다는 것이 해체, 수리 때의 조사에서 드러났다.

1962년 12월 20일 국보로 지정되었다. 현존하는 서울의 목조건물(木造建物) 중 가장 오래된 건물로, 2008년 2월 10일에 발생한 화재로 2층 문루가 소실되고 1층 문루 일부가 불에 탔다. 홍예문과 석축은 남았다.

화재 이후 수습 작업 및 복구를 위한 각종 연구를 진행한 후 2010년 2월 착공식을 거행하고 복구 작업을 시작하였다. 복구 작업은 역사적 고증을 토대로 전통 방식을 그대로 재현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기존의 것에서 살릴 수 있는 부분은 최대한 살리고, 그 위에 불탄 부분을 재현하였다. 전통 기와를 올리고, 일제강점기에 일본에 의해 변형된 부분들을 다시 되돌려 놓는 데 주력했다. 이로써 숭례문은 약 3년의 복구 공사를 거친 뒤 2013년 5월 4일 복구 기념식을 거행하고 시민에게 공개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서울 숭례문 [Sungnyemun Gate, 서울 崇禮門]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방화로 인한 숭례문의 화재

불에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는 숭례문을 보면서 많은 국민들은 마치 나라를 잃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만큼이나 숭례문이 우리 국민에게 주는 의미는 절대적인 것이었다.

지금의 숭례문은 당시보다는 성곽의 틀을 조금 더 강화한 느낌이다.

화재 이전의 것이 그 자체의 대문 이미지가 강했다면(한양도성과는 단절된),

지금의 숭례문은 한양도성이라는 큰 주제안에 자리잡고 앉아 있는 주인공의 모습처럼 보인다.

 
이것으로 혜화문 - 낙산 - 흥인지문 - 광희문 - 남산 - 숭례문 으로 이어지는 한양도성 순성길 코스 마무리
 
다이어트 하려고했는데.
남대문시장 갈치조림 앞에서 결심은 무너지고 말았다
공기밥이 고봉. 갈치조림 시켰는데 계란찜하고 갈치까지 주다니
주인분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모두 다 비움.
막걸리의 유혹을 떨쳐버린 것에 그나마 위안을 삼는다.

 

하지만, 야채호떡의 유혹까지 떨쳐버리지는 못했다.

아~~ 이놈의 식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