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 (2012)
8.3
26년이라는 영화는 1980년 5월 18일 광주에서 있었던 민주화운동을 역사적 배경으로 하여, 이와 직접적, 간접적으로 연관된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하여 이야기가 전개된다.
이 영화는 최초 강풀작가의 웹툰 ‘26년’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이 영화의 전반부는 애니메이션으로 구성되었는데 1980년 5월 18일의 상황을 극대화시키기 위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조금 잔인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광주 민주화운동을 다른 다른 영화로 “꽃잎”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영화에서도 잔혹한 장면은 애니메이션으로 처리했다고 하니, 실제가 만화보다도 더 잔인했을 수도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든다.
광주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던 시민들을 계엄군이 무자비하게 제압하고 부모가, 누나가 직접적으로 죽거나 정신적으로 피해를 입는 사람들. 그 사람들의 가족들은 모두 우리 역사가 돌보아 주지 못한 피해자이다.
그들(경찰관, 국가대표 사격선수, 깡패, 보안업체 호장과 아들)은 ‘그 사람(전직 대통령)’에게 진정성 있는 사과를 받기 위해 뭉칩니다.
그들은 사람을 죽이려는게 아니라 진정으로 1980년의 시민들이 희생된 것에 대하여 책임있는 ‘그 사람’의 사과를 받고자 하는 것이었으나, ‘그 사람’은 전혀 사과를 하지 않는다.
죄를 지어도 권력이 있고 전직 대통령이라는 이유 때문에 처벌을 받지 않고 있는 모습에 실망했다. 그리고 그것이 지금의 현실이라는 것도 가슴이 아팠다.
이런 유가족들은 전직 대통령의 태도 때문에 얼마나 분노하고 슬펐을까? 지금도 힘들게 하루하루를 살고 있을 것이다.
광주 민주화운동에 대해서는 법원에서도 전직 대통령의 죄를 물었지만, 실제로는 처벌없이 잘 살아 오고 있었다.
최근에 TV를 통해 다른 죄에 대한 평가를 받게 하려는 것을 보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느낀 것중에 하나는 이 영화에서는 광주 민중화운동의 피해가족 뿐만 아니라 의도하지 않게 계엄군에 속했던 군인들도, 그리고 ‘그 사람(전직 대통령)’을 위해 일하는 시민들과는 정반대에 있던 사람들도 피해자라고 말하고 있고 그들도 정말 아파할 거 같다는 생각이 든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여러 가지 결론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 사람’의 외출시에는 항상 경호원과 경찰들이 교통신호를 수동으로 바꾸고 경례를 했다. 결말에도 경찰 2명이 신호를 바꾸고 지나가는 차량에 경례를 한다.
나는 이 영화의 결말에서 그들이 죽이고자 했던, 진정한 사과를 받고자 했던 전직 대통령이 살았을 것이라고 생각이 든다.
과연 경례를 받는 사람은 학살의 주범으로서 처벌의 대상인 ‘그 사람’이 살아있는 모습일까?
아니면 역사의 수레바퀴속에서는 언제든지 ‘그 사람’과 같은 인물이 등장하게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지금이라도 역사의 나쁜 일들이 되풀이 되지 않으려면, 영화속 주인공들이 원하던 것처럼 가해자가 진정한 마음을 가지고 사과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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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적 배경 > 1979년 10.26 사태로 인해 박정희대통령이 사망한 뒤, 같은 해 신군부는 12.12 군사 반란을 일으켜 군부를 장악, 실권자로 떠올랐다. 1980년 5월부터 정치 관여 의도를 드러내는 신군부의 움직임에 대한 반발로 전두환 퇴진을 요구하는 학생 시위가 발생했다. 하지만 신군부는 5월 17일 24시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정치활동 금지령∙휴교령∙언론 보도검열 강화 등의 조치를 내렸다. 신군부는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를 포함한 정치인, 재야 인사 수 천명을 감금하고 군병력으로 국회를 봉쇄했다. 5월 18일 아침부터 광주 지역 대학생들은 김대중 석방, 전두환 퇴진, 비상계엄 해제 등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일으켰다. 신군부는 공수부대 등의 계엄군을 동원해 진압했다. 5월 18일 16시 이후 광주 시내에 투입된 공수부대원이 운동권 대학생뿐만 아니라 시위에 참여하지 않은 무고한 시민까지 살상·폭행하는 것을 목격한 광주시민들은 분노를 느꼈고, 과 중장년층뿐만 아니라 10대 청소년까지 거리로 나서 시위에 참여하면서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광주 시민들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힌 계엄군은 5월 21일 13시경 전남대와 전남도청 앞에서 집단 발포를 한 후 철수했다가 5월 27일 0시를 기해 계엄군은 상무충정작전을 실시해 무력으로 도청을 점령했다. 10일에 걸친 광주 민주화 운동 결과 사망자 166명, 행방불명자 54명, 상이후유증 사망자 376명, 부상자 3,139명 등에 달하는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1988년 제5공화국 비리 청산 분위기와 맞물려 열린 국회 광주진상특위에서 5.18 민주화운동의 진상 조사가 이루어졌다. 1993년 문민정부 출범 이후 1993년 5월 13일 김영삼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이 5·13 담화에서 “문민정부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의 연장선상에 있는 정부”라고 선언하면서 재평가가 가시화됐으며, 1997년 대법원이 5·18, 12·12 진압 관련자를 처벌하면서 공식적으로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재평가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