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지 오즈번의 "goodbye toromance" 에 나오는 가사 "I've been the king. I've been the clown" 에서 따온 소설의 제목.
부산에서.
K의 어머니와 면회를 갔다.
나는 왕이며 광대였지.
연금 생활자와 그의 아들.
난장이의 죽음에, 나는 잘못이 없다.
모든 것이 붕괴되기 이전에.
약의 역사.
호적을 읽다.
그런데 막상 접한 오현종의 8편의 단편중에서는 오히려 가장 인상에 남지 않는 단편이기도 하다.
(순전히 개인적 감상이지만)
단편으로 펼쳐진 이야기들은 서로 다른 주제와 다른 시공간을 가지고 있는 듯하지만
사회의 질서속에서 조금은 뒤쳐지거나, 벗어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로 연결되어 있다.
자신의 자리옆에 누군가 서 있는 것조차 거북스러운 그녀는
자신의 자리를 내어주기도, 그렇다고 그 상황을 지켜보기도 싫다.
전임교수가 되지 못하고 시간강사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지 못한 평범한 작가의 삶을 살아가는 동안,
목적지가 될 수 있었던 많은 인생의 '변곡점'에서 그녀는 원하는 곳에서 내리지 못하고 떠밀리기만 했다.
그리고 떠밀려 내려온 현재의 자신은 자신이 원하던 삶이 아니었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자신이 원하지 않았던 삶이라고도 하지 못한다.
"나는 숨을 낮게 쉬며 다음 정거장, 그다음 정거장을 따져 보았다. 다음에 내릴까. 아니, 다음 역은 적당하지 않아. 그다음 역이 갈아타기 나을까. 아니야 여기까지 왔는데. 늘 그런 식이었다. 그러다 종착역에 도착하면 멀미를 느끼며 떠밀려 내리곤 했다. 그곳이 내가 다다르길 원했던 목적지인지 확신하지 못한 채."
그저 자신의 현재 삶에서 잠시 떠나온 부산은,
자신의 목적지를 찾기 위한 잠시간의 정류장이었을까?
"밀려오는 파도에 모래성이 허물어져도 아이들은 실망하지 않고 되쌓았다. 오히려 허물어지기를 기다렸다는 듯 몇 번이고 또 쌓는"
아이들을 보면서 지금까지 몇 번이나 허물어져 내렸던 자신의 삶에 결코 실망하지 않을 그녀를 보게 된다.
그리고 서울, 자신의 집에 돌아가듯
현재까지 살아왔던 자신의 삶을 기초로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삶의 덧붙이기를 해 나갈 것임을 느끼게 된다.
이야기는 묘했다.
은퇴후 연금으로 살고 있는 아버지와 그 아버지 곁에서 연극을 하며 살아가는 아들.
햄릿 공연중에 관객석에 보이는 자신의 모습.
그러나 그것은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 자신과 닮은 누군가의 모습이었다.
아버지의 부재를 느끼지 못했던,
아니 어쩌면 아버지의 부재를 만든 것은 아들이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부재에 대해 아버지를 탓했던 그는
관객석에 있는 그 아버지의 모습(환영 ?)을 인정하지 못하다.
죽은 어머니에 대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아버지와의 대화가
실은 아버지의 부재에 대한 아들 자신의 생각이었음을...
"죽은 사람을 어쩌겠냐. 죽었으며 죽었다고 인정을 해라"
"넌 왜 인정을 못해."
"죽음이 지금 오면 다음엔 오지 않고, 지금 오지 않으면 다음에 오겠지."
극장에서 봤던 자신의 환영은 자신이 아니라 누군가를 닮아간 자신이었다.
아버지를 닮아간 자신...
"보일러실보단 극장이 따듯하더구나"
라는 말에서
죽음은 아들의 머리 속에서 현실이 된다.
죽음은 누구의 탓이거나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말하면서도,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아들은 어떤 탓을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거울속 자신의 얼굴은
은퇴후 아무 의미도 없이 연금에 의존해 살아가는 무력한 아버지의 얼굴로,
그리고 꿈과 희망도 없이 아버지의 생활과 별반 다름없는 삶을 살아가는 자신의 얼굴로 바뀌어 간다.
"얼굴은 그러나 손바닥을 귀에서 떼는 순간 미묘하게 균형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거울 속 얼굴이 누굴 닮아가리라는 예감이 목구멍 안쪽을 차갑게 훓어내려갔다. ~~~ 더는 부정할 도리가 없다고, 연극이 끝났다고, 속삭였다. ~~~나를 가장 닮은 남자의 얼굴. ~~~ 늙어 지친 아버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불편했던지 거울 속 얼굴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져버리고 우는 듯 웃는 듯한 내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어느 해 젊음의 시절,
늘 아무것도 모르는 채 그저 달리기만 하다가
문득 이곳이 어디인지, 어디로 가고 있었는지 몰랐던 당황스러움
그 혼란속에서
그저 무엇엔가에서 벗어나고 싶어,
서로에게서 멀어진 청춘들.
그들은 과연 그 혼란에서 벗어날을까?
영화 "터미네이터" 처럼
모든 것이 붕괴되는 미래에서
붕괴되기 전으로 돌아가 모든 것을 정상으로 되돌리고자 하는 류.
붕괴의 버튼을 누르게 될 '류' 자신의 탄생을 돌리기 위해
아버지를 제거하는 임무.
과거로의 여행, 아버지와의 만남속에서 행복한 과정과 행복한 결말을 맺는다.
하지만 세계의 변화는 붕괴될 미래세계의 소멸이 아니라, 또 다른 세계와의 병존이다.
"하나의 세계는 언제나 같이 이동하는 법이죠. 다 같이."
그래서 류가 떠나온 미래는 그대로 흘러갈 것이다.
"망가질 것을 알면서도 지금 손안에 쥐었다는 사실만으로 행복할 수 있을까? 온전한 행복을 누리는 일이 가능하냐는 말이죠."
병존하는 세상에 대한 의문을 가지지만,
어찌 되었든 행복하거나, 행복하지 않거나,
원하는 형태이든, 원하지 않는 형태이든
세계이든, 삶이든
존재는 그대로 존재할 수 밖에 없다. 병존하면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은 어둠 이후의 세계 그대로
그리고 병존하는 세계에서의 희망은 망가진 세계 안에서 찾을 수 밖에 없다.
기록된 누군가의 삶.
태어난 곳, 나이, 그리고 누군가의 삶으로의 전입, 누군가의 삶으로의 전출
그리고 생활터전의 이전과 생의 마감.
호적(가족관계증명서) 속에는 나와 관계되어진 사람,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 누군가로부터 들었던 사람의 삶이 압축되어 기록되어 있다.
하루가 되었든, 100살 넘게 살았든, 얼마나 많은 삶의 궤적이 있든
호적속에서 그, 그녀의 삶은 몇 줄의 한글과 숫자로 표시되어 있다.
단 몇 줄의 한글과
숫자가 의미하는 것들.
이름이 의미하는 것들.
"그곳은, 내 손바닥의 손금같이 아꼈던 사람이 살고 있는 곳이었다.""이미 가졌다는 건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고,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건 갈망하지 않는다는 뜻일 것이다."
"만남과 헤어짐, 두려움과 외로움은 공식적인 문서로 기록되지 않는다. ~~~ 내 삶도 건조하고 간단한 기록으로 요약된다는 사실이 깊은 위안으로 다가왔다. ~~~많은 이야기 속 이름들 역시 언제가는 제적이란 두 글자와 함께 모두 검은 잉크 속으로 스며들어버릴 것이었다."
'어쩌다 접하게 된 >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멸세계 - 무라타 사야카 (0) | 2018.03.16 |
---|---|
아날로그의 반격 - 데이비드 색스 (0) | 2018.03.11 |
쓰러질때마다 일어서면 그만, - 이외수 (0) | 2018.01.27 |
순정만화 - 강풀 (0) | 2017.12.31 |
오늘의 네코무라씨 -하나 (0) | 2017.12.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