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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접하게 된/책

노동의 시대는 끝났다 - 대니얼 서스킨드

by 심심한 똘이장군 2020. 8. 26.

 

지난 과거의 산업화와 기계화를 거치면서 인류는 유래 없는 발전을 거듭해 왔고 앞으로도 기술 진보 덕분에 일자리를 얻고 더 부유해지리라 예상한다.

(생산성 효과, 파이확대 효과, 파이탈바꿈 효과를 통해서)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향상되는 기계의 능력은 결국 인간을 대체할 것이고, 인간은 갈수록 수가 줄어드는 특정 업무에서만 기계의 보완을 받게 되면서 인간의 노동을 찾는 수요는 줄어들 것이다.

물론 노동의 세계가 어느 날 갑자기 한꺼번에 사라지기 보다는 서서히 줄어들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저물어 가는 노동의 시대에 대비를 해야 할 것이다.

 

일이 줄어든 세계에서는

경제적 번영을 사회의 모든 구성원과 불평등하지 않게 어떻게 나눌지,

기술을 누가 어떤 조건으로 통제할지를 결정해야한 정치적 문제,

그저 일이 없이도 그럭저럭 사는 데 그치지 않고 잘 살아갈 방법을 찾아내는 삶의 의미에 대한 고민들이 대두될 것이다.

 

저자는 이런 고민들을 해결하기 위해 결국 큰 정부의 출현이 필수적이라고 보고 있다.

저물어 가는 노동의 시대(일이 줄어든 세상)에서는 조세 제도를 통한 적절한 분배의 문제가 중요한 요소로 작용하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큰 정부는 소득을 발생하고 있는 노동자에게, 자본에게, 대기업에게 세금을 매기게 되고,

단순히 노동에 의한 소득만 분배하는 것이 아니라, 또다른 소득의 원천이 되는 자본 또한 분배해야 된다고 본다. 그리고 노동을 지원하는 정보를 조합하는 역할까지도 수행하게 될 것이다.

저자는 그러면서 보편적 기본소득이 아닌 ‘조건적 기본 소득’이라는 개념을 통해 자격 조건이 부여된 소득분배가 있어야 한다고 제한을 두기도 한다,

 

보수주의의 입장에서 보면 이러한 큰 정부에 대한 논리가 불편할 수 있겠지만

우리나라 또한 현재 세금징수와 배분이 중요한 정치사회적 이슈로 커져가고 있는 것이 현실이라는 점에서 저자의 주장은 일리가 있어 보인다.

또한 큰 정부라는 것이 단순히 공산주의, 사회주의가 아닌,

현재의 시각으로 보자면 결국 자본주의를 근간으로 하되 사회주의적 요소를 결합하는 형태로 보여진다.

 

 


21세기에는 기술 진보가 한 가지 문제 즉, 파이를 모든 사람이 먹고살 만큼 크게 키우는 문제는 해결할 것이다.

하지만 그 대신 불평등, 기술 대기업의 정치적 힘, 삶의 목적이라는 세 가지 문제를 우리 앞에 던져 놓을 것이다.

 


어떤 업무에서는 기계가 인간을 밀어냈다.

하지만 기계가 사람을 대체하기만 하지는 않았다.

자동화되지 않은 다른 업무에서는 인간을 보완했으므로, 그런 일을 맡을 인력의 수요를 늘렸다.

기술과 일의 역사를 통틀어 보면 언제나 서로 다른 두 힘이 작용했다.

노동자를 대체하는 해로운 힘과 정반대로 노동자를 보완하는 유익한 힘.

우리가 잊어버리기 일쑤지만, 이 유익한 힘은 세 가지 방식으로 영향을 미친다.

 

생산성 효과

파이확대 효과

파이탈바꿈 효과

 


기계가 인간의 지능을 모방하지 않고도 매우 유능해진다면,

오늘날 인간이 가진 능력이 앞으로 기계가 성취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를 나타낸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

그런데도 흔히들, 인간의 지적 역량이 곧 기계가 도달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주장한다.

아주 간단히 말해, 이런 주장이 사실이 되리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

 

과거에는 보완하는 힘이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들의 수요를 생산성 효과, 파이확대 효과, 파이탈바꿈 효과 로 높였다.

세 효과가 함께 작용해 언제나 사람이 맡을 일거리가 넉넉하도록 보장했다.

하지만 앞으로 기계가 계속해서 사정없이 끈질기게 발전하면 세 효과가 모두 힘을 잃을 듯하다.

 

 


지난날 제조업 실업자들이 그랬듯, 다른 분야의 노동자들도 노동시장의 어느 한구석에 발이 묶이는 바람에 자리가 빈 다른 분야의 일자리를 손에 넣지 못할 것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데는 세 가지 뚜렷한 이유가 있다.

노동시장에 나타나는 이 세 가지 마찰은 숙련 기술의 불일치, 정체성의 불일치, 장소의 불일치다.

 


노동의 시대가 어떻게 막을 내릴지 알 수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기계의 능력이 계속 향상해 한때 인간의 몫이던 업무를 차지한다. 대체하는 해로운 힘이 익숙한 방식으로 노동자를 밀어낸다. 한동안은 보완하는 유익한 힘이 그렇게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를 찾는 수요를 다른 경제 영역에서 계속 늘린다. 하지만 업무 잠식이 이어질수록 더 많은 업무가 기계의 것이 되고 인간을 보완하는 유익한 힘은 약해진다. 인간은 갈수록 수가 줄어드는 특정 업무에서만 기계의 보완을 받는다. 게다가 그런 특정 업무의 수요가 모든 사람을 계속 고용할 만큼 크리라고 생각할 근거가 없다.

일의 세계는 어느 날 갑자기 한꺼번에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서서히 줄어들 뿐이다. 대체하는 힘이 보완하는 힘을 나날이 앞질러 두 힘의 균형이 더는 인간에게 유리하지 않으면, 인간의 노동을 찾는 수요가 서서히 줄어든다.

 


일이 줄어든 세상에서는 조세 제도가 분배 문제를 해결할 중요한 장치가 될 것이다.

큰 정부는 여전히 소득을 유지하는 사람들에게 세금을 매긴 뒤, 그 돈을 나머지 사회 구성원들에게 나눠줘야 한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또는 무엇에 세금을 매길까?

간단한 답은 소득에 따라서다.

 

노동자에게 매기는 세금

자본에 매기는 세금

대기업에 매기는 세금

 


기술적 실업이 하룻밤 사이에 일어나지 않듯이 정부가 몇 주 안에 큰 정부가 되어야 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큰 정부의 필요성이 커지리라는 점만은 기억해야 한다.

날이 갈수록 분열하는 사회가 무너지지 않도록 막으려면 결국

소득을 분배하는 정부,

자본을 분배하는 정부,

노동을 지원하는 정보를 조합한

큰 정부가 있어야 할 것이다.

 


필요한 세수입을 거둔 다음에 큰 정부가 풀어야 할 문제는 '모든 사람이 충분한 소득을 얻도록 세금을 분배할 방법이 무엇이냐'이다. 지금껏 봤듯이 20세기에는 이 물음의 답이 주로 노동시장에 의지하는 것이었다. 그때는 최저 소득층의 임금을 올리고 실직자를 지원해 일자리 시장으로 다시 돌아가도록 장려하는 데 세금을 썼다. 하지만 일이 줄어든 세상에서는 이런 접근법의 효과가 지난날보다 현저하게 떨어질 것이다.

일의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들이 보편적 기본 소득이라는 발상에 크게 환호하는 까닭도 이 때문이다. 이 방안은 노동시장에서 완전히 비켜선다. 일자리가 있든 없든, 정부가 누구에게나 정기적으로 돈을 주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보편적 기본 소득을 지지하는 목소리는 자동화를 걱정하는 사람들을 훌쩍 넘어서는 다양한 부류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보편적 기본 소득은 정치 성향의 끝과 끝에 있는 사람들이 충돌하는 듯 보이지만 알고 보면 서로 동의하는 보기 드문 정책 제안이다.

보소주의자는 보편적 기본 소득이 단순하므로 기족 복지 제도의 비효율적인 복잡함을 없앨 것 같아 좋아한다.

자유주의자는 이 정책이 상당한 소득을 지원하므로 가난을 완전히 얿앨 것 같아 좋아한다.

 


큰 정부의 주요 역할은 소득에서 세금을 거둬 분배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사회 연대를 구축하고자 경제활동과 상관없는 자격 요건을 새로 추가할 것이다.

그 중 하나가 애초에 소득이 생기는 출처, 즉 가치 있는 자본 자체를 분배하는 것이다.

보편적 기본 소득이나 조건적 기본 소득이 기본 소득을 제공하는 데 비해, 이 방식은 기본 재산을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달리 말해 사람들에게 정기적으로 현금을 주는 것이 아니라 전통 자본을 한몫 떼어 줘 소유하도록 한다.

 


조건적 기본 소득이란 무엇인가

 

보편적 기본 소득이 '보편적'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머릿속에 두 가지를 떠올린다.

첫째, 누구나 원한다면 지원금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둘째, 수급자에게 어떤 자격 조건도 요구하지 말아야 한다.

저자가 제안하는 조건적 기본 소득은 두 측면에서 모두 다르다.

일부 사람들만 받을 수 있고, 분명한 자격 조건이 따라붙기 때문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가 가치 있게 여기는 것, 한 사회로서 우리가 기꺼이 지갑을 열려고 하는 대상들을 다시 살펴보는 것이다. 그 대상이 교사든, 간호사든, 간병인이든, 전업 주부나 전업 남편이든, 예술가든, 지금 우리에게 엄청나게 값진 가치가 있으면서도 임금 사다리에서는 상위권에 있지 않은 모든 활동을 재검토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조건적 기본 소득을 채택한다면 바로 그런 일을 반드시 해야 한다. 그때 우리는 노동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이 가치 없다고 깎아내렸던 활동을, 공동체의 보이는 손으로 떠받쳐 가치 있고 중요한 활동이 되게 할 것이다. 시장이 매긴 임금이 아닌 공동체의 인정에 따라 가치를 배분할 기회를 얻을 것이다. 이런 요건을 모두 이행한다면, 우리는 조건적 기본 소득에서도 집에 월급봉투를 가져갈 때와 그리 다르지 않는 자기만족을 얻게 된다. 비록 다른 방식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생활비를 번다는 뿌듯함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앞으로 100년 동안 기술 진보 덕분에 우리는 어느 때보다 더 부유해지리라는 데 이견이 없다. 하지만 그런 진보 때문에 인간이 맡을 일이 줄어든 세상으로 나아가기도 할 것이다. 우리 선조들을 괴롭혔던 경제 문제, 모든 사람이 먹고살 만큼 경제의 파이를 키우는 문제는 사라질 것이고, 세 가지 새로운 문제가 생겨나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이다.

첫째 문제는 불평등으로, 경제적 번영을 사회의 모든 구성원과 어떻게 나눌지를 산출해야 한다.

둘째 문제는 정치적 힘으로, 이런 번영을 불러올 기술을 누가 어떤 조건으로 통제할지를 결정해야 한다.

셋째 문제는 삶의 의미로, 이런 번영을 이용해 그저 일이 없이도 그럭저럭 사는 데 그치지 않고 잘 살아갈 방법을 알아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