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전히 떠나고 싶은 여행/전라도

웅포(곰개나루)의 노을

by 심심한 똘이장군 2019. 4. 28.

예상치 않았던 길에는
예상치 않은 만남이 있다.

예상치 않았기에 불안하고, 당황스럽기도 하지만
예상치 않았기에 반가움과 놀라움이 더 하기도 하다.




부여에서 군산으로 넘어가는 여러 길 중

오늘 처음으로 이곳을 맞이한다.

부여에서 금강의 큰 물줄기를 넘으니 전라북도 웅포가 우리를 맞이한다.

웅포는 드넓은 갈대밭, 최북단 녹차밭 들을 보듬어 안고 있다.

얼마전까지 벚꽃으로 온 도로가 뒤덮혔을 곳을 지나니

웅포에서의 해지는 모습이 너무 아름답다.

(노을과 함께 하는 캠핑이 멋있을 같다,. 캠핑장, 자전거도로와 자전거 대여서도 있다)

* 웅포라는 이름보다 곰개나루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지기도 했는가 보다




어느 순간 어둠은 밝음을 쫓아내고 그 자리를 대신한다.

바쁜 하루를 노을과 강물에 흘려보내고

내일을 시작하긴 위한 준비들이 남는다




진포대첩

삼국시대부터 이어온 왜구 침략은 고려 후기에 이르러 매우 심해진다. 특히 고려 제38대 공민왕(재위 1351~1374) 때에는 14년간 무려 378회나 침략하여 강화도가 약탈당하고 개경까지 위협을 당하게 된다. 이후 왜구 침략은 규모도 커지고 조직적으로 움직이며 식량, 문화재를 약탈하고 나아가 납치와 방화를 일삼는 수준에까지 이르게 된다. 고려 우왕 (재위 1374~1388) 1380년에는 왜구가 5백 척의 선단을 이끌고 금강 하구인 진포(鎭浦)에 침입하는데 1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그들은 큰 밧줄로 배를 서로 연결해 묶어 두고 군사를 나누어 지키게 한 다음 연안에 상륙하여 주변의 고을들을 무자비하게 약탈했다.

고려 조정에서는 왜구를 진압하기 위해서 나세(羅世)를 상원수로, 최무선(崔茂宣)을 부원수로, 심덕부(沈德符)를 도원수로 하여 전함 1백 척을 거느리고 진포에서 왜구를 공략하게 된다. 이때 최무선(崔茂宣)이 만든 화포(火砲)를 사용한 함포사격을 통해 왜구의 배를 불태워 승리를 이끄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진포해전은 세계 해전사에서 처음으로 화포(火砲)를 사용한 역사적인 전투였으며 진포해전의 승리로 오랫동안 고려를 괴롭혀 왔던 해적 집단인 왜구의 기세를 꺾어 역사적으로도 의미 있는 해전으로 기록되고 있다.

진포대첩 현장, 익산 곰개나루

군산과 인접한 익산 웅포(熊浦, 곰개나루)에도 진포대첩 기념 안내판이 설치돼 있다. 당시에는 금강을 이용해서 웅포, 강경을 거쳐 공주 등지로 배가 다녔기 때문에 진포해전에 어떤 형식으로든 관여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왜구들 배가 500여 척이나 되었기 때문에 금강 하구 좁은 지역에서만의 전투는 아니었을 것으로 보여 지는 대목이다.

왜구가 침입하는 이유 중의 하나가 식량을 약탈하는 것인데 그 때문에 조창(漕倉)이 있는 곳을 침략하게 된다. 진포대첩도 그렇게 해서 시작된 것이다. 당시 고려 시대에는 13개의 조창을 운영했는데 그중 하나가 군산 금강 변에 있던 진성창이다. 왜구는 진성창에 있던 세곡을 약탈하기 위해서 이곳으로 침략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