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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접하게 된/책

그뭄,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 장강명

by 심심한 똘이장군 2018. 4. 8.

살인을 저지른 남자와, 세월이 흘렀으나 여전히 죄를 묻고 있는 피해자의 어머니

그리고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여자(남자의 과거를 알고 있고, 같은 고등학교를 다녔던) .

미래를 알 수 있는 남자의 시점에서 보자면 작품의 진행은 전지적 시점처럼 보인다.

하지만 미래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다는 남자(우주 알)말처럼,

하나의 챕터 안에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 그리고 '아주머니'의 시점으로 나뉘어 진행 된다.

하지만 처음부터 남자의 삶이, 여자의 삶이, 아주머니의 삶이 구분되어 읽히지는 않는다.

하나의 챕터마다 달려있는 3개의 제목이 어쩌면 그러한 시점을 표현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그 또한 미래가 확실한 듯 하면서도 불확실한 결말의 과정처럼 정확치는 않다.

 


 

일반인의 시각에서 본다면 세계를 기억한다는 것은 과거를 기억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기억은 왜곡되기도 하고, 누락되기도 하고, 편집되기도 한다.

사람은 그렇게 세계를 기억하고 있다.

시간의 흐름을 쫓는 기억의 불완전성!

 

소설 속에 등장하는 소설처럼 사건은 시간의 흐름대로 놓여있지 않고 과거와 현재가 한 덩어리의 세계에 혼재해 있다.

‘우주 알’ 이 존재하는 남자에게 시간은 처음과 끝이 존재하고 그 흐름을 따라가는 우리가 익히 하고 있는 시간의 흐름이 아닌, 과거와 현재, 미래가 혼재되어 있는 ‘시공간연속체’ 로 인식되어 진다.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언급되었던 다차원 시공간개념이 오버랩 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너는 미래가 결정된 건지 궁금해 했지. 이렇게 설명하면 어떨까. 모든 시간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존재에게 과거와 미래는 마치 건축물과 같아. 거대한 미술관을 상상해봐. 그 안을 네가 걷는다고. 네가 걷는 방향에 따라서 눈앞으로 많은 그림이 지나가는 거야.

인간이란 그 미술관에서 가이드를 따라 천천히 움직이는 단체관람객 같아. 정해진 방향으로, 정해진 속도로 움직이며 눈앞에 있는 그림에 집중해야 하지. 그 그림을 볼 수 있는 때는 그 순간밖에 없으니까.

그것도 미술관을 경험하는 하나의 방식이야. 그런 방법으로도 미술관에 있는 많은 그림들을 볼 수 있어. 어떤 사람은 짧은 코스를 걸으면서도 알차게 작품들을 감상할 테고, 어떤 사람은 여러 전시관을 돌면서도 별 생각 없이 작품들을 지나치겠지.

하지만 기본적으로 이 미술관은 어마어마하게 거대하기 때문에 어떤 존재도 모든 전시관을 다 둘러볼 수는 없어."


"과거와 미래를 보지 못하고 현재만 보는 사람이 더 유리할 때도 있어. 과거를 잊을 수 있으니까. 과거를 잊을 수 있기 때문에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어."


 

 

그들 사이의 행위에서는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진실이라고 믿었던 것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음에 당혹스럽기도 하다.

피해자와 가해자라는 구분이 누군가에게 있어서는 반대로 인식되기도 한다.

피해자였던 남자가 마지막에는 가해자로 바뀌게 되고

 

혼란스러움은 남자와 아주머니(피해자의 어머니)사이 뿐만 아니라

여자에게서도 일어난다.

누군가의 기억이 완전하지 않고 누락이 있었음을,

그로 인해 피해자와 가해자가 바뀌었을 수도 있음을...

 

소설 속 각자가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은 동일하지 않다.

심지어 같은 사건에 대해서도 다르게 기억하고 있다.

존재의 본질은 동일한데 그것을 받아들이는 우리의 기억이 차이가 있기도 하지만,

반대로 차이가 있는 본질을 우리는 구분하지 못하기도 한다.

그 미묘한 차이를 기억이 아니라 패턴으로 구분하는 남자

 

그믐달과 초승달의 차이를 쉽게 구분하지 못하는 것처럼,

겉으로 보이는 유사함에도 서로간에 다른 양태, 패턴이 있음을 알기는 쉽지 않다.

그뭄, 불완전함으 완전함으로 바꿀 수 있는 그 시간이야말로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

남자는 그제서야 자신의 고통, 아주머니의 고통, 여자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시점임을 알고 떠나간다.

 

"그믐이라 그래. 그믐달은 아침에 떠서 저녁에 지거든. 그래서 쉽게 볼 수 없지. 해가 뜨기 직전에만 잠깐 볼 수 있어. 낮에는 너무 가느다랗고 빛이 희미해서 볼 수 가 없어."

"초승달도 아침에 떠서 저녁에 지지만 그믐달이랑 미묘하게 뜨는 시각이 달라. 초승달은 해가 뜬 다음에 떠서, 해가 지고 나서 조금 있다가 져."

"그믐달은 해가 지기전에 사라져. 그믐에는 달과 지구 사이의 시공간연속체가 뒤틀려. ~~뒤틀린 시공간터널을 타고 내리는 달빝에는 이상한 힘이 생겨, 잘라진 걸 붙이고, 끊어진 걸 잇게 되지. 그리고 고통을 멈추게 해줘."


 

 

남자를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여자.

뒤틀린 시공간의 터널안에서

자신이 기억하는 기억의 편린들을 찾아내고 다시 조각을 맞추게 된다.

남자에게 묻고 있는 ‘너라는 존재’ 의미에 대한 물음은

자신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도대체 너는 누구였어?

너는 도대체 누구였어?

너는 누구였어, 도대체?"

 

 

그리고 불완전한 기억들로 세계가 기억되더라도

오직 패턴만은 진실로 존재하고 있음을 느낀다.

사람을, 동물을, 바다와 바람을 패턴으로 인식하는 떠나간 그 남자처럼

 

"훨훨 날아가고 싶어. 나의 시간을 살고 싶어.

자유로워지고 싶어.

전망대에서 내려다본 인간들의 현재와 미래는 기묘하고 쓸쓸했다. 인간이라기보다는 개미와 벌을 더 닮았다. 여자는 제대로 된 순서에 대해 생각했다. 도시는 점점 빛으로 된 암호가 되어갔다.

자동차들이 눈에 불을 켰다. 그것들은 형체를 잃은 뒤 붉고 노란 빛의 점선이 되었다. 그 점선은 뭉쳐서 다발이 되어가면서도 다른 다발과 엉키거나 꼬이지 않았다. 방향을 바꾸지도 않았다. 빛의 선에는 시작도 끝도 없었고 잠시 뒤에는 방향도 없어졌다. 오직 패턴만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