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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접하게 된/책

나의 한국현대사(1959~2020) - 유시민

by 심심한 똘이장군 2022. 10. 23.

역사는 반복된다고 한다.
최근의 정치상황을 보면 역사는 반복성을 가진 것이 맞는 것 같다.
(경제성장의 반복성은 정치적 반복성에 비해 크게 느끼지 못하지만)
하지만 그 반복성은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변증법적인 형태를 띄며 조금씩 발전하는 것 같다.
퇴보한 듯해 보이는 순간도 장기적인 시점에서 보면 "정 + 반 = 합"을 통해 발전하는 과정에 있는 것이다.
글쓰는 작가 유시민이 겪어온 1959년부터 2020년의 시간은
비록 우리나라 전체의 역사라고 할 수는 없지만, 역동성과 변화를 겪은 시기이기도 하다.


자유주의자의 역사체험은
독재국가 시절(경제적 성과는 배제한)과 민주국가 시절
4.19를 통한 민주화세력의 탄생과 5.16를 통한 산업화세력의 등장
절대빈곤의 시절에서 고도성장의 시기를 거쳐 IMF 경제위기가 남긴 양극화
5.16에서 10월 유신(맹아기), 10월 유신에서 10.26(성장기 1), 10.26에서 6월 민주항쟁(성장기 2), 87년 체제(성숙기)를 거치는 한국형 민주화
안보국가에서 복지국가로, 그리고 장애인/성소수자/여성에 대한 관점 변화
우리 편이 아니면 모두 적이라는 "적대적 공존"의 이데올로기 시대
에 걸쳐 광범위하게 기술된다.

유시민은 묻는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에게.


현재는 과거의 산물이며 미래는 현재의 연장이다. 그런 점에서 미래는 내일 오는 게 아니라 우리 내면에 이미 들어와 있다.
기성세대 독자에게 묻는다. 지나온 자신의 삶과 한국현대사를 생각할 때 어떤 느낌이 듭니까? 그 느낌 그대로 다음 세대에 물려줘도 좋겠다고 생각합니까? 어떤 것이 문제였고 무엇이 달랐더라면 더 좋았겠습니까?
젊은 독자에게 묻는다. 그대는 부모세대의 삶과 그들이 만든 역사를 생각할 때 어떤 감정을 느낍니까? 화가 납니까? 자랑스러운가요? 기성세대가 어떻게 해주기를 바라며 스스로는 무엇을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을 위해 이 책은 씌여졌다고 봐야 할 것 같다.


우리는 지금 적대적 이념관에 매몰되어 있는 것 같다.
역사에 대한 제대로 된 인식이 아닌, 이념에 의해 역사를 재단하고 있다.
제대로 된 인식과 분석없이 어떤 발전이 있을 수 있을까? 아쉬울 수 밖에 없는 현실들...


역사에 대한 지식은 어떤 유형의 정부가 성공할 가능성이 높으며
또한 어떤 유형의 정부가 실패할 가능성이 높은가에 대해서도 실마리를 제공한다.
사실 성공적인 정부의 세 가지 주요 적은 이데올로기, 도덕성, 공포다.
이데올로기에 의존하는 정부는 실패하기 쉬운데, 이데올로기는 역사를 올바르게 이해하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데올로기는 경험을 받아들이는 데 필수적인 개방성을 낳지 않고 오히려 폐쇄적인 사고 체계를 낳는다.
< 버넌 보그다너, 역사, 시민이 묻고 역사가가 답하고 저널리스트가 논하다 >

아래는 이 책에 나와있는 유시민의 생각들이다.

내 생각도 그와 같기에 생각을 대신해 그대로 인용한다.


'근대화 세력' '산업화세력', '보수세력', '애국세력'을 자처하지만 '유신잔당', '5공 잔재', '특권 세력', '냉전세력', '수구꼴통' 이라고 비난 받는 세력은 정부 수립 이후 1997년까지 대한민국의 경제, 사회, 정치적 권력을 모두 장악했지만 1998년 2월부터 2008년 2월까지 대통령 자라 하나를 잃었고, 2017년 이후에는 청와대에 이어 의회권력도 상실했다.
역사전쟁의 또 다른 주체는 4.19를 옹호하고 5.16을 비판하면 민주화를 이룬 주역임을 자부하는 '민주화세력'이다. '민주세력', '양심세력', '진보세력'을 자처하지만 반대 진영에서는 '빨갱이', '아마추어', '좌경용공', '종북좌파'라고 하는 그들은 한국사회 모든 영역의 낮은 곳에 흩어져 있었다. 인권과 사회정의, 한반도 평화와 환경보호를 실현하려고 애쓴 지식인, 전문가 시만단체, 노동단체, 협동조합, 언론운동단체가 여기 포함된다. 2020년 민주화세력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처음으로 행정부와 입법부를 모두 장악했다.
한국현대사는 두 세력의 분투와 경쟁의 기록이며, 때로 피가 강물처럼 흘렀던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지금은 정치권력을 빼앗긴 산업화세력이 과거 민주화세력이 했던 것과 비슷한 방식으로 총력 공세를 펼치고 있다.
(이글을 쓰고 몇 년 지나지 않은 2022년 대통령은 산업화세력이 취임했다)
이 싸움이 끝나지 않는 이유는 국민이 두 세력 모두를 인정하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시대와 가치를 대표하면서 적대적으로 대립하는 두 세력을 모두 인정하는게 가능한 일인가? 그렇다. 산업화 시대와 민주화 시대는 모두 우리의 과거다. 대한민국은 박정희 시대와 김대중, 노무현 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둘 중 하나만을 긍정한다면 역사와 현실의 절반을 부정하는 셈이라 온전한 역사인식이라 하기 어렵다.
산업화도 민주화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대한민국은 반세기 동안 둘 모두를 성취해 근본적으로 다른 사회가 됐다. 우리는 '난민촌'에서 출발했지만 산업화 시대의 '병영'을 지나 시민 각자의 개성과 다양한 문화가 꽃피는 민주주의 '광장'으로 옮겨왔다. 나는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룬 힘이 대중의 욕망이었다고 주장했다. 욕만의 위계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자아실현의 욕망이 동력이었다. 자아실현을 하려면 '살아가는 방식'을 스스로 선택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감당해야 한다.


"모든 민주주의 는 자기 수준에 맞는 정부를 가진다." 자유롭고 민주적인 국가의 정부는 주권자인 국민의 수준을 반영한다는 뜻이다. 프랑스 정치가 알렉시스 드 토크빌에게 저작권이 있다는 이 말의 역도 성립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토크빌의 말은 민주주의 국가에만 적용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표현의 자유를 탄압하고 언론을 통제해 여론을 조작하며 정부를 찬양하는 교과서로 아이들을 세뇌하고 공포를 조장해 대중을 길들이는 독재체제에서는 정부가 국민의 수준을 반영하지 않는다. 그 체제에서는 독재자의 수준과 국민의 수준 모두를 반영한다. 흘륭한 정부는 선출하는 능력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그 자체를 쟁취할 능력도 국민의 수준에 넣어야 마땅하다.


민주적 제도가 있다고 해서 민주주의가 이뤄지지는 않는다. 그에 맞는 생각을 하고 그에 맞는 행동을 해야 성숙한 민주사회를 만들 수 있다. 제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길게 보면 제도는 의식과 행태의 산물이지만 단기적으로는 특정한 제도가 그에 맞는 의식과 행태를 북돋우기 때문이다. 한국 민주주의는 1987년 가을 여야 정당들이 합의하고 국민이 승인한 제도의 틀 안에서 작동해왔다. 그 제도의 틀을 '87년 체제'라고 하자. 87년 체제는 민주주의 혁명의 산물이지만 민주화 이전의 낡은 문화와 결합해 민주주의 성숙을 더디게 했다.


포퍼도 모든 종류의 혁명에 반대하지는 않았다. 전제정치를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세우는 정치혁명은 열렬히 옹호했다.
민주주의는 최선의 인물이 권력을 장악해 최대의 선을 실현하도록 하는 제도가 아니라 최악의 인물이 권력을 잡아도 악을 마음껏 저지르지 못하게 하는 제도다. 그것은 현실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악을 최소화함으로써 사회를 지속적으로 개량해나가는 데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이다. 이렇게 본다면 전제정치를 타도하고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민중이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불가피하고 정당하다. 단, 민중의 저항권 행사는 독재를 타도하고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세우는데서 멈춰야 한다. 대한민국의 정치혁명은 포퍼가 지지한 바로 그 혁명이었다.


일본 정부의 수출규제 사건은 우리가 국민국가 시대를 살고 있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줬다. 냉전 해체 이후 30년의 '신자유주의 세계화'도 그 현실을 바꾸지 못했다. 세계시장을 주도하는 삼성전자와 LG 디스플레이 경영자들도 자본에 여전히 국적이 있음을 절감했을 것이다. 인류 전체를 규율하는 '세계제국'이 들어서지 않는 한 우리는 국민국가에서 살아야 한다. 우리의 국민경제는 자유무역의 흐름을 타고 국제 분업체제 안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해야 하며, 우리 정부는 국민적인 합의를 이뤄 그 부작용인 양극화 또는 격차의 확대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실패하든 성공하든, 대한민국은 그 길을 갈 수밖에 없다.


고령화와 화석에너지 고갈이라는 위기요인은 우리에게 거시적인 변화와 미시적인 혁신을 요구한다. 우리는 두 위기요인을 안고 가면서 경제적 양극화를 완화하는 해법도 찾아야 한다. 필요한 변화와 혁신을 제때 이루지 못하면 심각한 경제, 사회적 위기를 맞게 될 것이다. 누가 어떻게 그 일을 해낼 것인가? '위대한 지도자'는 답이 아니다. 고령화, 에너지 위기, 양극화를 극복하는 데 필요한 변화를 이루려면 민주주의 제도와 절차를 통해 국민의 공감을 받아야 하는데, 이것은 산업화나 민주화보다 훨씬 더 어렵고 복잡한 과제다. 각자의 욕망, 신념, 이기심 대신 타인에 대한 연민, 교감, 공감을 바탕으로 상호이해와 협력을 이뤄야 할 수 있다. 시민들이 자신의 욕망을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관리하면서 우선순위를 조정하지 않으면 어떤 지도자도 그 일을 해낼 수 없을 것이다.


역사에는 연습이나 실험이 없으며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는 바꿀 수 없다.

우리의 민주주의가 위기에 빠졌거나 퇴행했다는 비판이 나왔지만 겉으로 드러난 양상이었을 뿐이다. 보수정당 집권기에도 우리의 민주주의는 그런대로 잘 작동했다. 대통령과 정부가 헌법을 무시하고 법치주의를 파괴하는 행위를 했지만 권력의 제한과 분산, 상호견제를 통해 국가기관이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부당하게 침해하지 못하게 하는 제도는 무너지지 않았고 국민의 생각과 행동양식은 발전했다. 우리의 민주주의는 앞으로 더 성숙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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