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인 최원형은 과잉소비의 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소비 방식, 나아가 우리 삶 전체에 대한 통찰이 절실하다고 말합니다.
소비라는 행위를 위해서는 생산이라는 행위가 전제되어야 합니다.
또한 생산을 위해서는 무엇인가의 투입을 전제해야 하구요.
그 무엇이라는 것이 원재료 일 것이고, 원재료의 대부분은 지구로부터 얻어지는 것입니다.
저자는 이것을 단순히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쉼 없는 착취의 구조'라고 말합니다.
세상 모든 물건은 지구에서 나오는 물질로 만듭니다. 그렇게 꺼내서 만든 물건은 얼마 못 가 버려지고 한정된 지구 어딘가에 쌓여 갑니다. 언제까지 우리가 지구에서 자원을 꺼내 쓸 수 있을 것이며, 쓰레기를 버릴 공간이 지구에 남아 있을까요?
정말 필요해서 만든 물건인지, 필요를 만드는 물건인지 두 '필요'의 차이를 잘 살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세대가 살아가오 있는 현재의 환경은 미래 세대도 살아가야 할 바로 그 공간이기에 , 미래세대가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 환경을 물려주어야 하는 의무도 있을 것입니다.
권리와 의무의 균형!
이 글은 주어진 권리를 향유하면서 잊어버리고 있는 의무에 대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금 당장 실행해야만 하는, 그러나 누구나 알고 있기에 실행하지 않는...
바로 그런 의무 말입니다.
소비한다는 건 지구에 있는 무엇인가를 쉼 없이 착취할 수밖에 없는 구조입니다.
그러니 착한 소비란 있을 수 없습니다.
다만 최소한의 소비로 비틀어진 구조가 다시 회복되고 순환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스터섬이 그저 안타까운 과거로 남을지 다시 반복되는 미래일지는 이제 우리가 어떻게 소비하며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지 않을까요?
에드워드 흄스는 그의 책 "배송 추적"에서 커피 하나의 이동 경로를 추적해 보니 4만 8,000킬로미터가 넘었다고 합니다. 가히 놀라운 거리입니다. 이러니 우리가 쓰는 물건 하나하나가 이동한 거리는 대체 얼마일 것이며, 그 거리에서는 또 얼마나 많은 탄소가 배출됐을까요? 이러니 물건 소비는 단순히 물건만을 소비하는 일일 수가 없는 거지요. 물건 뒤에 가려진 수많은 것을 동시에 소비하고 또 배출하게 되는 겁니다.
시스템이 바뀔 때까지 현 시스템에서 재활용률을 높일 수 있는 최선은 분리배출을 엄격하게 하는 것이지만, 이보다 선행돼야 할 게 있습니다. 바로 개개인의 재활용과 소비에 대한 인식 변화입니다. 재활용은 소비 이후가 아니라 최소한의 소비를 전제로 생각해야 합니다. 재활용은 만능이 아니며 소비의 면죄부가 돼서도 안 됩니다.
전부 가진 세대지만 행복이 오래가지 않는 까닭은 채워지지 않는 헛헛함 때문이 아닐까요?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질수록 우리는 내면의 균형을 잃기 쉽습니다. 물질의 가치가 삶의 질을 평가하는 기준이 돼 버린 사회는 점점 물질적인 욕망을 추구하도록 부채질합니다. 그러니 채우려 할수록 점점 헛헛해지는 내면을 직시하지 않고서야 물건의 소유를 멈출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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