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3종류의 사랑이 순차적으로 그려진다
처음 이글은 개인의 사랑이 주요 시작점이 된다.
개인의 사랑은 이 글 전체적으로도 계속적으로 그려진다.
개인의 사랑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여성과의 사랑을 이룰 수 없는'수도사의 사랑'이니 뭔가 이슈가 될 수도 있겠다 싶고, 호기심을 유발할 수도 있겠다 싶을 때,
‘수도사의 사랑’이라는 낯익은 퍼즐 옆에 ‘타인에 대한 사랑’ 이라는 또 하나의 퍼즐을 펼쳐 놓는다.
주인공 요한 수사를 비롯하여 소설에 등장하는 미카엘, 안젤로, 토마스 수사 등은 각각의 목소리로 타인에 대한 사랑을 대변한다.
특히 미카엘은 철탑 위의 여성 노동자를 비롯하여, 성장의 한복판에서 고통 당하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는다.
그것은 타인에 대한 사랑이기도 하지만,
자연스럽게 종교가, 사회가 외면하는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관심과 사랑으로 옮겨간다.
각종 사회 이슈에 자기의 소리내기를 멈추지 않는 작가의 목소리 이기도 하다
이성에 대한 금지된 사랑과 타인에 대한 헌신적 사랑의 이야기 속,
불현듯 찾아든 이별(여인과의 이별, 미카엘과 안젤로의 죽음)속에 또다른 사랑이 찾아든다.
‘인류에 대한, 인류를 위한 사랑’이 그것이다.
그것도 우리의 영원한 아픈 역사인 한국전쟁, 삶과 죽음이 맞닿아 있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에서 일어났던 일에서 였다.
흥남철수. 각종 기뢰가 매설되어 있는 흥남부두 한 가운데에서 한 외국인 선장의 결단과 헌신으로 14,000명의 한국인은 목숨을 구하고, 새로운 생명과 시작을 하게 된 바로 그 사건에서 인류에 대한 사람은 꽃피어난다.
그리고 이런 인연은 개인의 인연에서,
베네딕도 수도원이 미국의수도원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또다른 인연의 꼬리를, 끊어질 수 없는 인연과 사랑을 이야기 한다.
마리너스 수사. (미국 수도원의 수사이자, 흥남철수때 많은 생명을 살려냈던 바로 그 선장)
소설적 연결고리들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나간 것에 대해서
너무 작위적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정리하려던 순간
마지막 작가의 말은
현실이 더 소설 같을 수 있음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소설의 배경에는 세 사람이 서 있다. 첫 번째는 두말할 나위 없이 마리너스 수사님이다. 그에 대한 내 모든 소설의 서술들은 아주 작은 각색을 제외하면 고스란히 사실이며 실은 내 전언보다 훨씬 더 극적인 일들이 그 안에 잉태되어 있다.’
"당신이 진리를 사랑한다면 모든 것보다 더욱 침묵을 사랑하십시오"
관계란 건 참 이상하다. 한번 역할이 맺어지면 대체로 그 역할이 고정되어 진행된다.
한번 내가 누군가의 고민을 듣는 것으로 관계가 시작되면 대체로 그를 만나 나는 그의 고민을 들어주는 자가 되고,
내가 누군가에게 고민을 털어놓는 것으로 관계가 시작되면
대체로나는 고민을 털어놓아야 할 때 그를 찾아가게 된다.
"어떤 사람에게 일어난 모든 일은 어떤 궁극적인 의미, 다시 말해 초월적인 의미를 가져야만 한다.
인간은 그 초월적인 의미를 알 수 없지만 그저 믿어야만 한다.
궁극적으로 중요한 것은 아모르 파티, 즉 운명에 대한 사랑이다."
태어나기 전에 인간에게 최소한 열 달을 준비하게 하는 신은 죽을 때는 아무 준비도 시키지 않는다.
그래서 삶 전체가 죽음에 대한 준비라고 성인들이 일찍이 말했던가.
어떻게 죽을 것인가 생각하는 인간은 분명 어떻게 살 것인가를 안다.
죽음이 삶을 결정하고 거꾸로 삶의 과정이 죽음을 평가하게 한다면 내 삶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하는 수 없이 그런 질문에도 직면하게 되었는데,
그때는 그저 이 모든 것을 신에 대한 원망으로 돌리고 싶었다. 그것이 훨씬 수월한 일이니까.
이름의 신비를 아십니까?
저는 왜 하느님이 아담에게 동물들의 이름을 손수 붙이라고 했는지 그때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이제 어떤 의미로 서로 맺어진다는 것으로 뜻하지요,
인형에게 애완견에게 혹은 고양이에게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것들이 나와 관계를 맺게 되고 모든 관계를 맺은 것들은 추억이라는 것을 공유하게 되듯이 말이지요
빵이 없는 사람의 불행은 빵 하나로 해결되지만
빵이 너무 많아 불행한 이의 불행은 대책이 없다
우리는 '주여 왜?'라고 신에게 질문해야 한다.
죽음 앞에서, 운명 앞에서, 어처구니없는 자연재해 앞에서, 이름 모를 불치병으로 고통받으면서 죽어가는 갓난아이 앞에서, 우리는 신에게 물을 수 있다.
'대체 어떻게 이러실 수가 있습니까?'하고,
동시에 우리는 또 우리 자신에게도 똑같이 질문할 수 있으며 질문해야 한다.
독재 앞에서, 불의한 권력자 앞에서, 정의로운 사람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짓밟히는 그 현장 앞에서, 생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단지 '더 많은 이윤을 위해 가난한 사람들의 삶을 박탈하는 자본가 앞에서, 가난하기에 치료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갓난아이 앞에서 '대체 어떻게!' 우리가 그것을 그저 무심히 참아내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견딜 수 있는 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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