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관점에서 무언가를 말하면 흔히들 ‘페미니즘’이라는 단어를 연결한다.
나는 페미니즘 이라는 단어를 좋아하지 않는다.
여성이냐 남성이냐를 나누고 양 성 간의 차별을 없애자고 하는 것은 남녀간의 소극적 관점이 아니라 인간과 인권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성들이 주장하는 여성들에 대한 차별이 없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당신의 신 속’ 그녀의 이야기는 여자에 대한 이야기라고 한정하기보다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이혼
“
오래전 그녀는 이혼하는 꿈을 꾸었다.
이 책은 이렇게 도발적으로 이혼이라는 단어로 시작한다.
유대 민담이라고 소개된 릴리트에 대한 이야기는 굳이 이 소설의 진행상에 꼭 등장해야만 하는 꼭지였을까 하는 의문은 있다.
하느님이 남자의 밑에 깔리기를 거부하고 동등하고자 했던 릴리트를 사탄으로 쫓아내고, 태생부터 남자의 일부로서 남자의 부속이 되어야만 하는 하와의 이야기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작은 시각에 머물게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 말이다.
(물론 이런 시각이 분명 종교적인 부분, 사회적인 부분에 존재한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지만 말이다)
아쉬움은 뒤로 하고...
“
릴리트는 유대 민담에 등장하는 인물로, 최초의 여자이자 아담의 첫 아내였다. 민담에 따르면, 하느님은 릴리트를 아담의 갈비뼈가 아니라 아담과 똑같이 흙으로 빚은 뒤 코에 생기를 불어넣어 만들었다. 그러니가 최초의 남자 아담과 최초의 여자 릴리트는 같은 모습이었던 것이다. 첫날밤, 아담이 동침하려 했지만 릴리트는 그의 밑에 깔리고 싶어하지 않았다. 자신과 같은 흙으로 만들어진 아담을 주인이자 남편으로 섬기기를 거부한 릴리트는 하느님의 노여움을 샀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나 사탄이 되었다. 얼마 뒤 하느님은 흙이 아니라 아담의 갈비뼈로 여자를 만들었고, 그렇게 해서 최초의 여자이자 아담의 아내는 릴리트가 아닌 하와가 되었다.
.
어머니에 대한 아버지의 일상적인 폭력의 테두리 속에 있던 민정의 결혼과 이혼, 남녀에 대한 생각은
어릴 적 꿈 이야기처럼 주체로서의 삶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공고히 하게 했다.
“
꿈 속 남색 줄무늬 넥타이를 맨 남자가 자신의 아버지였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이혼하지 못한 체 그 삶 속에서 허우적 거린채
“
부부가 그렇게 무서운 거란다
라며 자조하는 엄마에 대해 분노하고,
“
눈빛을 흐리는 어머니를 바라보며 그녀는 뒤늦게 깨달았다. 스스로가 이혼을 원하는 지 원하지 않는지조차 판단할 수 없는 지경까지 어머니가 가버렸다는 걸. 자신의 기분과 감정이 어떤지조차 모르는 지경까지 어머니가 가버렸다는 걸.
“
그러나 화가 나 미칠 것 같은 사람은 어머니가 아니라 그녀였다.
시가 목적이 아니라 이름을 버림으로써 아버지를 버리고자 했던 것이 목적이었던 속내를 밝히기도 한다.
자신의 이름을 버림으로써
엄마를 대신해 아버지로 부터의 테두리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민정의 모습은
그녀가 꿈꾸었던 엄마의 모습이기도 하다.
“
등단할 때 그녀는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을 버렸다. 잡지사에 등단 소감과 함께 필명을 써 보내며, 그녀는 자신이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을 버리기 위해 그토록 시를 쓰고 등단이라 는 걸 하고 싶어했음을 깨달았다.
민정이 그녀의 남편과 이혼하기로 하는 이유는 쉽게 납득이 가지 않지만, (남자의 시각으로 비난 받을 수도 있게지만)
이야기 속 민정과 그 주위의 사람들이 이혼에 대해 생각하는 감정과 혼란
“
이혼하고 싶은데 너무 두려워요
이혼 이후에 살아가야할 삶의 혼란과 여진에 대한 두려움들은
많은 가족들이 이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부부가 그렇게 무서운 거라며 현실로 되돌아 가버리던 던 이전 세대들의 한계와 연결되어 있다.
“
쉽지가 않네...
이혼의 여진 속에 있구나,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하지만 민정은 여기서 한 발을 내딪는다.
결혼이 영혼과 영혼의 연결이고,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도구로 생각하는 남편앞에
“
네가 날 버리는 건 한 인간의 영혼을 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그러므로 앞으로 네가 쓰는 시는 거짓이고, 쓰레기야.
자신이 남편의 영혼을 구원해 줄 수 있는 신도 아니고,
그러기 위해 결혼한 것도 아님을 당당히 밝힌다.
이제 그녀는 이전 세대의 틀이나 주위의 시각에서 벗어난 주체로서의 삶을 위한 이혼을 실행할 수 있을 것이다.
“
나는 당신의 신이 아니야.
당신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찾아온 신이 아니야.
당신의 신이 되기 위해 당신과 결혼한 게 아니야.
‘이혼’이라는 소제목처럼 이야기는 결혼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
남자와 여자가 아닌 인간으로서, 주체로서의 삶을 찾고자 하는 행동을 말한다.
그런데 민정은 이혼후에 시를 계속 쓸 수 있을까?
이혼의 여진 속을 꿋꿋이 견뎌내고 있을까?
궁금하다. 민정을 응원한다.
마지막으로 영혼을 구원하는 결혼은 없는 것일까, 상대방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결혼이 아닌 나 자신과 상대방의 영혼 모두가 구원되기 위한 결혼을 희망해 본다.
읍산요금소
“
읍산요금소는 침대에서 무덤까지 풀코스로 이어지는 햇빛요양원에 입소하기 위한 첫 관문인 셈이다.
폐쇄된 읍산요금소를 대체하고 있는 새로운 읍산요금소 박스안에서 하루종일 근무하고 있는 그녀.
읍산으로 흘러들어온 그녀의 삶은 침대에서 무덤까지 풀코스를 이어가는 햇빛요양원을 찾아오는 노인들의 삶과 다르지 않다.
회귀를 기약할 수 없는 늙은 철새와도 같은 불안감은 차안 노인들의 얼굴이 아니라,
톨게이트 박스안의 그녀 자신의 얼굴에 비치는 블안감과 일치한다.
“
읍산요금소를 통과과려면 반드시 지불해야 하는 통행료는 몇백 원에서 만 몇천 원까지 천차만별이다. 그녀는 통행료 액수로 '노인'이 얼마나 멀리서 왔는지를 가늠한다.회귀를 기약할 수 없을 만큼 너무 멀리까지 날아온 늙은 철새의 불안 같은 것이 노인의 얼굴에 깃들어 있는 걸 확인하기 위해.
흘러들어온 읍산에서의 삶을 영위하기 위해 그녀는 통행료를 지불하듯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마치 도시로 흘러들어오는 차들이 통행료를 지불하듯,
하지만 그 대가는 그녀가 삶의 우위를 확보하게 해주는 보장이 되지 못한다.
그저 남보다 0.001초 뒤처진 삶을 살아가기 위한 참가비 같을 뿐이다.
그 0.001초 뒤처진 삶이 0.002초 뒤처진 삶이 되지 않기 위한 발버둥을 위해 계약직이었던 그녀는 상사와 잠자리를 했는지도 모르겠다.
검은색 그랜저의 남자(그녀 친구가 소개해 준 남자일지 모른다는 생각에도 불구하고)를 두려워 하지만 어쩌면 검은색 그랜저 속의 남자는 그녀가 읍산에서 0.001초의 뒤처진 삶이라도 살기위한 수단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읍산에서의 그녀의 삶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
부챗살이 펴지듯 분산되던 그녀의 시선이 도시를 빠져나가는 차들을 향한다. 그 차들은 통행료를 지불하지 않는다. 도시로 흘러드는 차들만 통행료를 지불하는 것이다. 읍산요금소 부스 안 그녀는 살고 있는 도시를 외면하듯 등지고 앉아있다. 도시를 등지고 앉아서, 도시로 흘러드는 차들을 맞는 것이다.
“
그녀는 자신에게 아무리 안간힘을 써도 극복 못하는 0.001초가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종종 요금소 앞으로 곧게 뻗은 도로가 단거리 육상경기 트랙 같다. 그녀가 끝끝내 0.001초를 극복하지 못하고 물러난 트랙.
오늘도 그녀는
육년 전 폐쇄된 읍산휴게소 안에 있던 무표정한 어떤 여인처럼
빨간 립스틱을 덧칠하며 톨게이트를 지키고 있다.
읍산을 등지고 있으면서도 읍산에서 나가는 차들에게는 어떠한 행위도 하지 못하고 그저 늪과 같은 읍산으로 들어오는 차만을 바라볼 수 있는 톨게이트 속에서...
“
육 년 전 그녀는 바로 그 폐쇄된 요금소를 통과해 도시로 흘러들었다. 폐쇄된 요금소 부스를 지키던 여자를 그녀는 기억하고 있다. 새빨간 립스틱을 칠해 입술이 닭벼슬 같던 여자는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을 일절 거세당한 듯 무표정한 얼굴. 그녀는 어쩐지 그 여자가 폐쇄된 요금소의 부스를 여태 떠나지 못하고 지키고 앉아 있을 것 같다.
“
립스틱을 바르자 입이 얼굴과 겉돌면서 붉게 떠오른다. 그녀는 립스틱을 덧바른 뒤 도로에 두 눈을 고정시킨다. 석양이 깔려와 부레처럼럼 부풀어 보이는 도로 위로 차가 한대 나타난다. 차는 읍산요금소를 향해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어중간한 속도로 달려온다. 차 종류와 색깔이 잘 분별이 안 된다. 그녀는 방금 립스틱을 발랐다는 것을 망각하고는 립스틱을 덧바르며, 검은색 그랜저가 아니기를 속으로 간절히 바란다.
새의 장례식
“
그녀가 기억에서 지워버렸다면 나는 그녀에게 이 세상에 없는 존재나 마찬가지일 테니까.
머리 속 기억에서 지워버렸으면 하는 것들이 있다.
그것이 추억이라는 아름다움으로 포장되었던, 공포의 흔적으로 남았든.
기억에서 온전히 지워진다면 세상에 없는 일이 될거라고 믿고 싶지만, 살아가는 동안 완전한 지움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일지도, 죽음을 통한 소멸만이 완전한 지움을 완성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기억이라는 것들은 하나의 사실을 여러 개의 조각으로 나누어 보관하고 있는 것. 그래서 조각의 맞춤이 어긋날 수도 있듯 불일치하는 기억으로 남을 수도 있다.
“
그녀와 이혼한 뒤 내가 분명히 깨달은 것이 있다면 남녀 관계만큼 불확실하고 차가운 관계가 또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한때나마 아내였던 여자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생각지도 못했던 순간에 그녀가 불쑥 떠오르고는 했지만 그로 인해 발생하는 감정의 파장이 일상을 뒤흔들만큼 크지는 않았다.
폭력의 기억에 잠겨있는 여자가 있다.
그녀에게 있어 과거의 한 남자는 폭력으로 각인되어 있을 것이다.
그 남자의 폭력 또한 아버지로부터의 대물림된 폭력!!!
그 남자 또한 폭력의 기억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그 폭력은 남자에게서 여자에게로, 어떤 아버지로부터 한 소년에게로 대물림 되었다.
“
폭력이 장남인 그에게도 공평하게 대물림되었는지.
"폭력도 대물림된다는 말을 들어본 적 있습니까?“
그리고 그 대물림의 끝에
한 소년의 말에 쓰러져 죽게 된 ‘십자매’
(여자는 그렇게 믿고 싶었을 것이다. 남자 또한 그렇게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대물림의 끝은 죽음이었고, 죽음에 이르러서야 폭력의 대물림은 사라졌다.
그래서 십자매의 장례식에 초대되어져야 할 사람은
폭력을 대물림 하게 될 남자와 한 소년
그리고 죽음에 이르러서야 폭력의 기억에서 자유로와 질 수 밖에 없을 그녀였다.
죽음을 맞이한 십자매는
황폐한 그녀 자신이기도, 흰 손으로 장례를 치르는 한 소년이기도, 무덤을 파고 있는 남자 이기도 하다.
깨어진 어긋날 기억들이 새의 장례식을 통해 하나의 의식으로 동화되어지는...
“
아이는 죽은 십자매를 두 손에 들고 있고, 그쪽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땅을 파고 있고, 그녀는 십자매를 감쌀 손수건을 펼쳐들고 아이의 뒤에 서 있었습니다. 죽은 십자매의 장례식을 치르는 장면 같았습니다.
'어쩌다 접하게 된 >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블랙코미디 - 유병재 (0) | 2018.08.25 |
---|---|
사라지고 싶은 날 - 니나킴 (0) | 2018.08.21 |
국가란 무엇인가 - 유시민 (0) | 2018.08.17 |
상냥한 폭력의 시대 - 정이현 (0) | 2018.07.23 |
흰 - 한강 (0) | 2018.07.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