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어쩌다 접하게 된/책

상냥한 폭력의 시대 - 정이현

by 심심한 똘이장군 2018. 7. 23.

이제는 친절하고 상냥한 표정으로 상처를 주고받는 사람들의 시대라고 저자는 말한다.

 

7개의 단편속 이야기들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보통사람들의 일상에서 겪을 법한 일들이기도 하지만,

나의 일이 아니기에 반대로 비현실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일들이 펼쳐진다.

그 일들을 주인공들은 자기 나름의 방식대로 대처해 나간다.

누군가는 적극적일 수도 있고, 그저 그럭저럭 최악을 모면하는 방식을 택하기도 한다. 또는 아무결정도 하지 않은 체 그저 마주친 현상에 순응하기도 한다.

 

친절하고 상냥한 표정속에 상처를 주고받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상처를 치유하는 사람도, 상처를 그저 내버려두는 사람도, 또 다른 상처를 내는 사람 마저도

서로의 상처를 알아보지 못한 채 살아가는 것이 현실이다 





아버지의 옛 애인인 여자와의 인간적 관계, 그녀의 죽음에 따른 유산인 거북이와의 동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았던 주인공이 거북의 움직임을 보면서 자신의 속도에 대해 생각하게 되고,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일들을 생각하며 마흔 살의 아침을 눈물로 시작하기도 한다.

애초 연결되지 않았던 관계의 사람과 동물, 그리고 인형이 연결되며 각자의 속도로 살아가게 된다.

어느 순간 연결되었음을 알게 된 사람들의 단절될까 두려운 위태위태한 삶처럼...


미스조와 거북이와 나


나는 어떤 일에 대해서도 말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말은 뱉는 순간 허공에 흩어진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은, 가장 깊은 안쪽에 가만히 모아두고 싶다. 그것이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지라도.

 

나는 그럭저럭 살아간다. 이런 시대에 이렇게 살아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최악을 모면하며 살아가는 것을 그럭저럭, 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말이다.

 

거북이와 나의 눈이 마주쳤다. 까만 바둑알 같은 눈동자가 촉촉하게 접어 있었다. 그제야 나는 무엇인가 잘못되고 있음을 예감했다. 알다브라코끼리거북은 지구상에서 가장 오래 사는 동물이었다. 255세까지 산 거북이가 있다는 문헌도 남아 있다고, 언젠가 미스조가 말했다. 그렇다면 내가 죽은 후에도 이 아이는 살아 있을 것이다. 천천히 생명을 이어갈 것이다. 나의 모든 것을 눈에 담고 기억할 것이다.

 

바위야,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거북이는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느릿, 느릿, 느릿, 내가 선 곳과 반대 방향으로 기어갔다. ~~~이제 나는 열일곱 살짜리 알다브라코끼리거북과, 고양이 모양 헝겊 인형을 가진 마흔 살 남자가 되었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이 제멋대로 나를 침범하고 휘젓는 것을 묵묵히 견디게 하는 건 사랑이지만, 또 그 이유로 떠나기도 하지.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바위는 과연 거북이답게 않고 느릿, 느릿, 느릿, 자기의 속도로 온 방 안을 탐험하고 돌아다닌다. 바위의 움직임을 보고 있으면 나의 속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바위는 샥샥이 놓인 침대 근처로는 가지 않는다. 샥샥이야 바위가 무엇을 하든 개의치않고 제자리에 최선을 다해 누워 있다. 그런 의미에서 둘은 좋은 동거인이 될 여지가 충분했다.

 

샥샥과 나 사이에, 바위와 나 사이에 연결되어 있는 줄은 처음부터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리는 살아갈 것이고 천천히 소멸해갈 것이다. 샥샥은 샥샥의 속도로, 나는 나의 속도로, 바위는 바위의 속도로.

마흔번째 생일 아침, 나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들, 영원히 일어나지 않을 일들을 떠올리며 비로소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아이를 출산한 여자 고등학생(보미)의 엄마(지원)가, 아이의 아빠인 남자 고등학생(승현)의 엄마(미영)가 마주친 현실.

남의 불행의 증인이 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은 증인이 아닌 그 자신이 불행의 당사자가 된다.

미친 듯한 행동을 취할 수도 있지만, 아무것도 달라질게 없는 현실 앞에서 취할 수 있는 행동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자신이 해결하지 않고 누군가에 의해 자연스럽게 해결되어지기를 그저 기다리기만 할 뿐이다.

미숙아의 불완전함 만큼이나 주인공들의 위태롭고 불완전한 삶은,

우리의 삶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맞지 않는 뚜껑마냥 위태위태하게 우리를 덮고 있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아무것도 아닌 것


전 남편과는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에게 이끌리는 시기는 지나갔다. 그녀는 이제 어떤 사랑에도 생로병사가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상대에 따라 그 단계들을 유보시킬 수 있다는 것도 알았다.

 

빈소에 갈 시간을 내기가 애매하기도 했지만,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사이의 친구가 창졸간에 당한 불행을 눈으로 직접 확인 사살하는 증인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뭘 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려는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미친 짐승처럼 소리를 지를 수도 있고, 딸을 부둥켜안고 목 놓아 통곡할 수도 있고, 창문을 열고 아래로 뛰어내릴 수도 있었다. 그래도 달라질 게 없었다. 돌려놓을 수 없었다,

 

지원은 알았다. 밝고 화사하고 상냥한 어떤 세계가 자신의 인생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렸다는 사실을. 잠시 그런 것을 가장하거나 흉내 낼 수도 있겠지만 결코 진심일 수는 없을 것이다.

 

‘김보미 아기’는 불완전한 존재였다. 불완전하고 위태로웠다. 아기의 법적 보호자조차 되지 못하는 미성년자 김보미도 불완전하고 위태롭기는 마찬가지였다.

 

손바닥으로 가린 입술 사이에서는 무거운 장탄식도, 웃음도 새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다시 길 위로 나섰다. 사고가 났는지 도로에 정체가 심했다. 누군가 울린 경적 소리가 신호탄이 되어 운전자들이 너도나도 클랙슨을 눌러댔다. 참을 수 없을만큼 끔찍한 소리라고 지원은 생각했다. 운전대에 엎드려 울 수도 없었다. 하늘이 유난히 새파랬다. 파란 빛깔의 돔형 지붕이 이 세계를 뚜껑처럼 덮고 있는 것 같았다. 거대한 뚜껑이었다.









죽음은 바로 옆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지만, 그 죽음을 실행했는지, 실행하지 않았는지는 오직 한 명외에는 알수 없다.

극적인 파국이 없기에 변화없는 하루하루가 일상이 되어버린 삶.

나라는 존재의 미약함을 느끼게 할 만큼 세상은 나의 일상과는 상관없이 아무일 없이 돌아간다.

변화없는 일상이 천사의 존재때문인지? 악마의 존재때문인지? 알수 없겠지만

그저 또다시 살아가기 위하여 하루를 보낸다,

문제가 생기기 전에 걱정하는게 맞는건지, 생긴 후에 해결하는 것이 맞는지 수없이 고민하며...


우리 안의 천사


왜 너는 항상 미리 걱정하지? 문제는 생기기 전에 걱정하는게 아니라 생긴 후에 해결하는 거야.

 

이거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동생과 내가 함께 해야 합니다. 그래야 둘이 평생 서로 지켜보며 살아갈 것 아닙니까. 다시는 허튼짓 못 하도록. 선량하게 살도록. 우리가 그렇게 서로 돕고 의지하면서 살아간다면 아버지도 안심하실 겁니다.


죽이는 것과는 다릅니다. 시기를 조금 앞당기는 것뿐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으니까.

 

바깥이 캄캄해지는 사이 개의 생명이 서서히 끊어져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늙은 개가 죽어가는 방에 있었다. 그것은 내가 바로 곁에서 목격한 첫 번째 죽음이었다. 벽장에는 돈가방이, 냉장고에는 인슐린 주사제가 들어 있었다. 전부 남우의 것이었다. 남우는 유일한 가족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마지막 인사도 나누지 못했다. 진심과는 관계없이, 어떤 일들이 일어난다. 그런데 애니의 숨은 완전히 끊겼을까?

 

어떤 아이도 사라지지 않았다. 내가 잠시 한눈을 팔아도 세상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단죄가 또 유예되었다는 사실에 나는 안도하고 절망했다. 극적인 파국이 닥치면, 속죄와 구원도 머지않을 텐데. 또다시 살아가기 위하여 나는 바다 쪽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뗐다.







시간이 지나면 이해하게 되고 해결될까?

하지만 세상은 비밀과 암흑으로만 남아있어야 하는 것들도 존재하는가 보다.

그리고 추억은 순간의 장면으로, 향기로, 풍경으로 남아있게 된다.


영영, 여름


그날 저녁 나는 모래사장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해 질녘의 바다는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한없이 고요했다. 해사 서서히 이울어갔다. K에서 몇 계절을 지나도록 이곳은 한여름이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영영 여름일 터였다. K의 언어로 돼지가 무엇인지 아직 알지 못했다. 나는 이제 별명도 없는 소녀였다. 단단하고 부서지기 쉬운 것들, 부서지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생각하는 동안 해가 완전히 사라졌다. 어둑한 하늘에 해가 있던 흔적처럼 투명한 원의 테두리가 남았다. 어떤 비밀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라면 한동안 여기 더 머물러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하늘을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두 손바닥을 높이 쳐들고 허공에서 맞부딪쳤다.

쫙!

한 번, 그리고 한 번 더,

쫙!

순식간에 20년이 지나버렸다. 침묵만이 남은 미래에서 나는 암흑과 뒤섞일 때까지 앉아 있었다.





수많은 선택의 순간에서 결국 자신이 자초한 삶의 방식으로 우리는 살아간다.

물론 그 삶의 방식이 자신이 자초한 것이 아니라 흘러흘러 그렇게 되었다고도 한다.

불안해 하며 살아간다.

저 깊은 밑바닥의 삶을, 정점에서 나락으로 떨어질지 모르는 삶을.


밤의 대관람차


결정의 순간에 아무런 결단을 내리지 못하는 방식으로 결정해버리고, 전 생애에 걸쳐 그 결정을 지키며 사는 일이 자신이 자초한 삶의 방식이라고 양은 탄식했다.

 

좋지 않은 조짐이 있을 때 가장 나쁜 경우를 상상하는 건 사소한 불운을 생애 전체의 불행에 대한 복선으로 확대 해석하는 버릇과 비슷했다.

 

저는 겁이 나요. 정점에 거의 다다른 순간이 가장 무서워요. 창문을 부수고 뛰어내릴 것 같거든요.

 

누구나 죽는다. 언젠가 장의 부고도 받게 될 것이다. 장이 양의 부고를 받는 것이 먼저일 수도 있었다. 최후의 문장이 누구의 것이든 애도는 남아 있는 자의 의무였다.

그녀에겐 여전히 긴 오후가 남아 있었다.







2년마다 올려줘야 하는 전세금, 그리고 그와 함께 커져가는 대출금과 이자.

악순환의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 더 큰 대출을 받아 집을 산다는 건 현대사회의 흔하디 흔한 상황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황들이 굴레를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굴레의 끈들을 더 단단히 엮어버리는 행위라는 것을 애써 인식하고 싶어하지도 않는다.

그저 나의 불행을 다른 사람에게 이전하면 그만인 것 같은 상황은, 전세에서 자가로 대상만 바뀌었을 뿐 도미노게임의 길목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하기에 자기가 구입한 집을 한번도 보지 못하고 턱하니 계약한 이후에 발생한 불행에도 그저 앞으로 달라질 것은 없고, 지금처럼 살아가면 된다며 스스로 위로하게 된다.

삶은 그럭저럭 또다시 살아지게 된다.

이쪽의 굴레에서 저쪽으로 굴레로 옮겨서...


서랍 속의 집


이것은 커다란 도미노게임이며, 자신들은 멋모르고 중간에 끼어 서 있는 도미노 칩이 된 것 같았다. 중내는 모두 함께, 뒷사람의 어깨에 밀려 앞사람의 어깨를 짚고 넘어질 것이다. 스르르 포개지면 쓰러질 것이다.

 

집을 산다는 것은 한 겹 더 질긴 끈으로 삶과 엮인다는 뜻이었다. 부동산은, 신이든 정부든 절대 권력이 인간을 길들이기 위해 고안해낸 효과적인 장치가 분명했다. 돌이킬 수 없는 트랙에 들어서버렸다고 진은 실감했다.

 

달라질 것은 없었다. 오늘이 가고 내일이 오면 은행은 대출액을 입금할 것이고 그들은 부동산 등기를 마칠 것이다. 쓰레기 산은 깨끗이 사라질 것이고 그들은 여기서 살아갈 것이다. 진은 숨을 꼭 참은 채 한 발을 마루 위로 올렸다.





 

나의 실체를 드러내지 않고 이루어지는 관계들

사람에게는 사람이 필요하지만 그 필요성은 영화속처럼 애정어린 포용이 아니다.

그저 나의 한탄을 들어주는 사람, 원망의 대상이 되어주는 사람이 필요할 뿐,

그러하기에 나의 실체가 드러나면 그 관계는 단절되어야만 한다.


안나


처음 보는 사람들과도 금방 속을 터놓고, 도움과 농담과 우정을 주고받았다. 서로 아는 것이 이름과 나이뿐인 사람들과 말이다. 경이 자라온 세계에서 그건 그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경은 놀라웠고 그 놀라움은 이내 감동으로 이어졌다. 이름과 나이 정도만 오픈하면 더 이상 사생활을 공개할 필요가 없다는 점도 좋았다. 숨겨야 할 비밀스러운 사생활이 없다는 것과는 또 다른 문제였다.

 

사람에게는 사람이 필요하다. 원망하기 위해서, 욕망하기 위해서, 털어놓기 위해서.






'어쩌다 접하게 된 >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당신의 신 - 김숨  (0) 2018.08.19
국가란 무엇인가 - 유시민  (0) 2018.08.17
흰 - 한강  (0) 2018.07.20
자전거 여행 1, 2 - 김훈  (0) 2018.07.03
스파이 - 파울로 코엘료  (0) 2018.05.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