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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접하게 된/책

자전거 여행 1, 2 - 김훈

by 심심한 똘이장군 2018. 7. 3.

자전거 여행

작가 김훈이 자전거로 전국을 돌며 써내려간 기행문이다.

자전거 페달을 밟고 있는 김훈의 몸과 페달에 연결된 바퀴를 통해 김훈은 땅과 연결된다.

자전거를 매개로 어느 땅, 어느 사물과 연결된 김훈의 글이지만 자전거는 하나의 수단일 뿐 다리를 수단으로 한다고 해서 작가의 생각이 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김훈의 글은 자전거를 통해 땅 위에 있는 글이지만, 자전거에서 내려 사람들과 그 장소에서 두 다리로 함께여야만 완성되는 글이다.

기행문은 그 장소와 그곳의 숨결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풀어쓴 것이다.

그런데 그 글에는 그곳 자체의 느낌만이 아니라 그에 파생되는 작가의 오랜 사색의 결과물들인 여러 생각들이 섞여서 녹아있다.

자전거 여행속 문장들은 그곳의 풍경을 떠오르게 하지만, 아쉬운 건 내 여행의 경험이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 그곳에 대한 경험이 없어 그 생각들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내 자신이다.

 

너무 화려한 수식의 문장이나 동일한 표현의 반복은 김훈 작가의 다른 작품에서처럼 여전히 아쉽지만 김훈 작가의 뛰어난 문장력에는 역시나 감탄할 수 밖에 없다.



자전거를 타고 저어갈 때, 몸은 세상의 길 위로 흘러나간다. 구르는 바퀴 위에서 몸과 길은 순결한 아날로그 방식으로 연결되는데, 몸과 길 사이에 엔진이 없는 것은 자전거의 축복이다. 그러므로 자전거는 몸이 확인할 수 없는 길을 가지 못하고, 몸이 갈 수 없는 길을 갈 수 없지만, 엔진이 갈 수 없는 모든 길을 간다.

구르는 바퀴 위에서, 바퀴를 굴리는 몸은 체인이 매개하는 구동축을 따라서 길 위로 퍼져나간다. 몸 앞의 길이 몸 안의 길로 흘러들어 왔다가 몸 뒤의 길로 빠져나갈 때, 바퀴를 굴려서 가는 사람은 몸이 곧 길임을 안다. 길은 저무는 산맥의 어둠 속으로 풀려서 사라지고, 기진한 몸을 길 위에 누일 때, 몸은 억압 없고 적의 없는 순결한 몸이다. 그 몸이 세상에 갓 태어난 어린 아기처럼 새로운 시간과 새로운 길 앞에서 곤히 잠든다.



영귀암절을 안고 있는 금오산은 마치 물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이제 막 바닷가에 도착한 거북의 모습이다. 이 거북이 등 위에 절을 싣고 바다로 나아가려 하고 있다. 거북의 앞발 한 쌍은 벌써 물속에 담가져서 땅을 밀쳐내고 앞으로 나아가려 하는데, 거북은 수천 년 동안 땅에 들러붙어서 바다로 가지 못한다. 거북은 머리를 들어서 먼바다를 보고 있고, 절도 먼바다를 바라보면서 갈 수 없는 바다로 종을 때려서 소리를 보낸다.



흙과 밭은 사랑과 고난의 자리로서 인간에게 주어졌다. 이 흑은 하느님의 몫이 아니라 버림받은 인간의 몫이다. 손바닥으로 주물러야만 한줌의 진흙은 한줌의 경작지로 바뀐다. 하느님의 가락지는 진흙 속에 숨어 있고 사람들이 그 가락지를 찾지 못해도, 이 사랑과 고난이 사람들을 그 땅에 붙잡아서 정주하게 한다.




봄의 무덤들은 평화롭다. 푸른 보리밭 속의 무덤들은 죽음이 갖는 단절과 차단의 슬픔을 넘어선 지 오래다. 그 무덤들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죽음은 바람이 불고 날이 저물고 달이 뜨고 밀물이 들어오고 썰물이 빠져나가는 것처럼 편안한 순리로 느껴진다. ~~~ 중략 ~~~ 죽음이, 날이 저물면 밤이 되는 것 같은 순리임을 아는데도 세월이 필요한 모양이다.



장비가 있어야만 몸을 살릴 수 있고, 장비가 없어야만 몸이 나아갈 수 있다. 출발 전에 장비를 하나씩 점검해서 배낭에서 빼 버릴 때, 몸이 느끼는 두려움은 정직하다. 배낭이 무거워야 살 수 있지만, 배낭이 가벼워야 갈 수 있다. 그러니 이 무거움과 가벼움은 결국 같은 것인가. 같은 것이 왜 반대인가. 몸이 그 가벼움과 무거움, 두려움과 기쁨을 함께 짊어지고 바퀴를 굴려 오르막을 오른다.



유가의 산은 인간의 마을에 가깝다. 퇴계의 등산 코스인 청량산과 소백산은 인간의 삶을 새롭게 해주는 도덕적 소생력으로서만 아름다울 수가 있었다. 퇴계의 산은 인간의 마을이 이루어내야 할 꿈의 원형이었으며, 그 산은 마을에 이르는 정확한 하산로를 갖는 산이었다. 그는 은둔과 적멸로서의 산을 부정했고, 산에 가서 계곡 물을 퍼먹고 구름과 안개를 마시며 살려는 자들을 경멸했다.

그러므로 한산자는 길 없는 산으로 올라가는 뒷모습이 아름답고 퇴계는 길 있는 마을로 내려오는 앞모습이 아름답다. 동양의 산들은 거기에 의탁된 마음의 힘으로 높거나 깊어서, 산은 때때로 교조적이었다.



면옥치는 산맥 속에 박힌 별처럼 아름다웠다. 그리고 그 아름다움은 꺼질 듯이 위태로워 보였다.




산은 적막하지 않으면 산이 아니다. 산의 아름다움은 오직 적막을 바탕으로 해서만 말하여질 수 있다. 서울의 산은 적막하지 않다. 서울의 산은 도심과 가깝고, 일상과 잇닿아 있다. 노적봉이나 만경봉 꼭대기에는 어린이들도 올라와서 논다. 휴일의 산이 군중으로 뒤덮이는 인산이라 하더라도 산에는 여전히 적막과 일탈의 유혹이 있다. 삶이 고단하고 세상이 더럽고 마음속에서 먼지가 날릴수록 산의 유혹은 더욱 절박하다. 그 유혹은 흔히 하산길에 깨어져버리는 몽환이기도 하지만, 새로운 삶에 대한 유혹이 없다면 누가 비지땀을 흘리며 이 만원 지하철 속 같은 인산을 오르겠는가.



나무는 개체 안에 세대를 축적한다. 지나간 세대는 동심원의 안쪽으로 모이고 젊은 세대가 몸의 바깥쪽을 둘러싼다. 나무껍질 바로 밑이 가장 활발히 살아 있는 세대이다. 이 젊은 세대가 뿌리의 물을 우듬지까지 끌어올려 모든 잎들을 빛나게 하고 나무의 몸통을 키운다. 그리고 이 젊은 세대는 점차 기능이 둔화되고 마침내 정지되어 동심원의 안쪽으로 숨어들고, 나무껍질 밑에는 다시 새로운 세대가 태어난다. 젊은 바깥쪽을 둘러싸고 늙음은 안쪽으로 고인다.

나무의 늙음은 낡음이나 쇠퇴가 아니라 완성이다. 이 완성은 적막한 무위이며 단단한 응축인 것인데 하늘을 향해 곧게 서는 나무의 향일성은 이 중심의 무위에 기대고 있다. 무위의 중심이 곧게 서지 못하면 나무는 쓰러지고 거죽의 젊음은 살 자리를 잃는다. 중심부는 존재의 고요한 기둥이고 바깥쪽은 생성의 바쁜 현장인데, 새로운 세대의 표층이 태어나면 생성과 존재가 사명을 교대하면서 나이테는 하나씩 늘어간다. 동심원 속에서 늙음과 젊음이, 전위와 후방이 순탄한 질서를 이루어 나무는 곧게 서서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또 잎을 떨군다.




산은 수직의 공간을 단절시키고 강은 수평의 공간을 소통시킨다. 삶은 강물처럼 흐르고 또 흘러서 날마다 새롭게 흔들리는 것이지만, 삶은 그 흐름의 종합으로서 산처럼 우뚝하고 영원하다.

강은 인간의 것이 아니어서 흘러가면 돌아올 수 없지만, 길은 인간의 것이므로 마을에서 마을로 되돌아올 수 있었고, 모든 길은 그 위를 가는 자가 주인인 것이어서 이 강가마을 사람들의 사랑과 결혼과 친인척과 이웃은 흔히 상류와 하류 사이의 물가 길을 오가며 이루어졌다. 그러므로 이 늙은 길은 가가 아니고 로도 아니며 삶의 원리로서의 도이다.




수만 년을 물의 흐름에 씻긴 바위들은 그 몸속에 흐름을 간직하고 있었다. 모든 연약한 부분들을 모조리 물에 깎인 그 바위들은 완강한 단단함으로 물속에 박혀 있었는데, 그 단단함은 유연하고 온화한 외양으로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 바위는 박혀 있는 바위인 동시에 흐르는 바위였고, 존재 안에 생성을 간직한 바위였으며, 가장 유연한 형식으로 가장 강력한 내용을 담아내는 바위였다.



왜 땅이 없고 집도 없느냐? 라고 인수 아버지한테 물었다. 인수 아버지는 본대 없었다라고 대답했다. 나는 또 한번 속으로 울었다. 누구나 본래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삶은 얼마나 더 가난해지고 얼마나 더 경거해야 옳을 것인가.

    



갯벌이 주는 공간 정서는 비논리적이다. 언어를 걸칠 만한 표적이 없고 논리를 비빌 언덕이 없다. 그리고 갯벌의 생태는 끝없이 질퍽거리고 뒤섞이는 진행형이다. 이 불안정이 갯벌의 안정성이다. 



염전은 바다를 밀어낸 인공의 들이고, 수산업과 농업의 사이에 끼여 있는 완충의 평야다. 염전을 잡거나 기르지 않고, 캐거나 따지 않는다. 염전은 기다리는 들이다. 온 들판에 펼쳐놓은 바닷물이 마르고 졸여져서, 그 원소의 응어리만으로 고요해질 때까지 염부는 속수무책으로 기다린다.






배는 엔진의 힘으로 나아가지 않고, 저 자신의 위치를 스스로 아는 힘으로 간다. 엔진은 동력을 생산해내지만 이 동력이 방향성의 인도를 받지 못하면 동력은 눈먼 동력일 뿐, 추진력이 되지 못한다. 그래서 엔진이 생산하는 동력은 이동의 잠재적 가능성일 뿐이다. 여기에 방향이 부여되었을 때 이 잠재적 힘은 물 위에서 배를 작동시키는 현실적 추진력으로 작동한다.



무너진 고달사의 폐허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그 폐허에서 용머리는 포효하고 있다. 욕망은 땅 위에 찬란한 것들을 세우기도 하고 그 찬란한 것들을 폐허로 만들기도 한다. 


길이 표정은 그 길이 거느린 물의 표정을 닮는다. 산맥을 넘어가는 길은 골과 골을 휘돌아 흐르는 계곡물의 표정을 닮고, 큰 강의 하류를 따라 내려가는 길에는 점점 넓어지는 세계로 나아가는 자유의 완만함이 있다.



도산서당의 건축구조적 특징은 그 염결한 단순성에 있다. 도산서당은 맞배지붕에 홑처마 집이다. 그것이 그 건물의 전부이다. 그 서당은 한옥이 건축물로서 성립될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들만을 가지런히 챙겨서 가장 단순하고도 겸허한 구도를 이룬다. 그 맞배지붕과 홑처마는, 삶의 장식적 요소들이 삶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부화를 용납지 않는 자의 정신의 삼엄함으로 긴장되어 있고, 결핍에 의해 남루해지지 않는 자의 넉넉함으로써 온화하다. 그 서당 안에서 퇴계의 공부방은 2평을 넘지 않는다. 인간이 지상에 세우는 물리적 구조물은, 그 안에서 삶을 영위하는 자의 절박한 내적 필연성의 산물이라야 한다는 것을 도산서당의 구조는 말해주고 있다.



도산서당의 구조가 삼엄한 이념형이라면 하회마을은 그 이념형이 삶의 현장에서 너그럽게 적용되면서 삶의 다양한 국면을 포용하고 쓰다듬는 생활의 조직원리로 작동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회의 집들은 감추어진 삶과 드러나는 삶의 꿈을 동시에 구현한다. 길은 연결과 드러남의 구도이고, 칩은 차단과 감춤의 구도이다. 길이 여러 집을 에돌아서 대문에 당도할 때, 그 길은 드러남과 감춤의 기능을 동시에 수행하는 것이다. 그 기른 익명성에 매몰되어 다만 기계의 신호에 따라 작동하는 고속도로가 아니다.

하회의 길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며, 이웃에게로 돌아가는 길이다. 그 길은 감추어진 삶과 드러나는 삶의 사이를 지나서 인간의 안쪽과 바깥쪽으로 함께 뻗어 있는 길이다.



하회의 길들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며, 이웃에게로 돌아가는 길이다. 그 길은 감추어진 삶과 드러나는 삶의 사이를 지나서 인간의 안쪽과 바깥쪽으로 함께 뻗어 있는 길이다.



우물 속의 물과 아궁이 속의 불은 언제나 새롭게 빚어지는 원소들이다. 이 새로움은 우물과 아궁이라는 늙음의 형식 속에서 빚어진다. 새로움의 내용은 늙음의 형식 안에 편안하게 담긴다.

안방은 물, 불, 밥, 생명 같은 원형질의 공간이다. 안방은 땅속과 깊이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그 밑으로는 하늘과 통한다. 마루는 어떤가. 마루는 고래의 불길이 닿지 않고, 땅으로부터 일정한 높이로 떨어져 있다. 그래서 마루는 서늘하고, 불길이 닿지 않아도 습기가 없다. 마루는 안방보다 훨씬 더 사회적인 공간이고, 공적으로 진화한 공간이다. 마루는 움집의 추억이나 땅속의 원형질로부터 먼 거리를 진화해 왔다.

마루가 이룩한 진화의 내용은 그 서늘함에 깃든 공적 개방성이다. 그리고 마루가 이룩한 진화의 정도는 마루와 땅 사이의 거리, 그 빈공간의 높이다. 사람이 신발을 벗지 않고도 편하게 걸터앉을 수 있는 높이에서 마루의 진화는 완성된다.

마루 위를 지나는 대들보와 마루 천장에 드러난 서까래는 이 공적 개방성의 공간 위에 논리적 안정감을 부여한다. 그래서 마루는 세상을 맞이하는 공간이며, 더 넓은 공간과 소통되는 공간이다. 비록 작은 평수의 마루라 하더라도, 마루는 그 열려짐의 크기로 세상 전체를 향한다. 그렇게 해서, 안방에서 문지방을 넘어서 마루로 나올 때 우리는 더 크고 더 넓은 삶의 새로운 질감 속으로 들어선다.



이순신의 칼에는 “한번 휘둘러 쓸어 버리니, 피가 산하를 물들이는 구나”라는 검명이 새겨져 있따. ‘물들일 염’ 자의 공업적 이미지는 이순신의 무인다운 내면의 한 본질이라고 할 만하다. ‘펜은 칼보다 강하다’는 말은 펜을 쥔 자들의 엄살이거나 자기기만이기가 십상이다. 그말은 정치적이다. 칼을 쥔 자들은 ‘칼이 펜보다 강하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문은 세계를 개조하는 수단으로써의 무를 동경한다고 말하는 편이 오히려 정직하다.

이순신의 칼은 인문주의로 치장되기를 원치 않는 칼이었고, 정치적 대안을 설정하지 않는 칼이었다. 그의 칼은 다만 조국의 남쪽 바다를 적의 피로 ‘물들이기’ 위한 칼이었다. 그의 칼은 칼로서 순결하고, 이 한없는 단순성이야말로 그의 칼의 무서움이고 그의 생애의 비극이었다. 그리고 이 삼엄한 단순성에는 굴욕을 수용하지 못하는 인간의 자멸적 정서가 깔려 있다. 그는 당대 현실 속에서 정치적 여백이 없었다.




서울 세종로 네거리에 동상으로 서 있는 이순신의 갑옷은 장식적 미의식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어 보인다. 이순신의 갑옷은 투박하고도 단순하다. 그의 갑옷은 공격적 기상을 조형화하지 않는다. 이순신의 갑옷은 일본 무사들의 갑옷처럼 날아오르지 않고, 억눌려 있다. 그 갑옷은 다만 적을 죽이기 위해서 죽지 않아야 하는 사람의 자기방어의 실용성만으로 고요하다. 그의 갑옷을 억누르는 것은 시대와 역사 전체를 혼자서 책임져야 하는 사람의 한없는 경건성이다.



문경새재 제1관문

영남 유림들에게, 문경새재는 자아와 현실 사이를 차단하고 있는 상처의 고지였다.

그들은 새재를 넘어서 세상으로 나아갔고, 다시 새재를 넘어서 자신에게로 돌아왔다.


수원 화성의 성벽에서 쓰임새는 드러남 속에 숨어 있고 드러남은 쓰임새 속에 숨어 있다. 쓰임새와 드러남이 서로 숨고 또 숨겨서 함께 드러나는 것은 아름다움의 강력함과 강력함의 아름다움이다. 수원 화성에서는 아름다움은 강력함으로 발현되고 강력함은 아름다움으로 발현된다. 그리고 그 양쪽을 현실의 땅 위에서 공간화해내는 힘은 땅의 기초를 다지는 일의 토목공학적 성실성과 자재를 쌓아올리는 일의 건축학적 과학성과 일과 사람과 자금과 노동과 시간과 환경을 조직하고 관리해내는 행정작용의 꼼꼼함이다. 수원 화성을 이루어내는 정신의 힘은 거대한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이 꼼꼼함이고 전체와 세부를 일관하는 정돈된 지향성이다. 정신과 기술을 다르지 않고 아름다움과 강력함이 다르지 않고 삶고 꿈이 다르지 않다. 수원 화성은 땅 위의 성곽이고, 마음속의 왕도이다.




하늘재 아래 오래된 백자 가마 아궁이 속에서 불길은 없었던 생명을 빚어낸 숨을 불어넣는 여성성의 힘으로 타올랐고, 가마의 내부구조와 그 구조물들의 기능은 거대한 인공의 자궁처럼 보였다. 이 인공은 섬세하고도 치밀한 전략의 소산이지만, 가마는 그 전략을 불과 바람과 연기의 흐름 속에 완벽하게도 순응시켜서, 전략의 구조를 노출시키지 않는다. 가마는 단지 밋밋한 산비탈에 순하게 엎드린 흙더미처럼 보인다. 가마의 천장은 둥근 돔이다. 불길은 이 돔 안에서 고이고 돌고 흐른다. 불길은 물길과 같다. 억지로 할 수가 없는 것이다.



“군인과 총에 대해서 아이들에게 말하지 않았나?”

“말하지 않았다. 내 아이들이 군대 전체와 국가 궈력 전체를 증오하게 되는 것이 두려워서 그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목발을 보면 무슨 생각이 드는가?”

“깨어진 구둣가게 꿈이 생각난다. 그러나 이 목발 때문에 나는 세상과 이웃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게 되었다.



< 선암사 화장실 내부의 게시문 >

대소변을 미련없이 버리듯, 번뇌 망상도 미련없이 버리자.

이럴 수만, 이럴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으랴,

대소변을 누듯 망집의 욕망도 훌훌 우리 몸 밖으로 내던질 수 있다면

똥을 누는 일은 드러내놓고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파트 변소처럼 감옥 같은 공간에 갇혀서 해야 할 일도 아닐 성싶다. 똥을 누는 것은, 배설물을 밖으로 내보내는, 자유와 해방의 행위다. 거기에는 서늘함과 홀가분함이 있어야 한다. 선암사 화장실은 이 자유의 낙원인 것이다. 이 화장실에 앉으면 창살 사이로 꽃 핀 매화나무며 눈 덮인 겨울 숲이 보인다. 화장실 위치는 높아서 변소에 앉은 사람은 밖을 내다볼 수 있지만, 밖에 있는 사람은 안을 들여다볼 수 없다.




아양동 미륵불의 손은 어떠한 수인이라고 할 수도 없이 투박하고 넓적하다. 고려의 농촌마을로 내려온 미륵은 권세 높은 사찰의 불상들이 누리는 모든 장식과 비례를 벗어버리고 기다림을 포기할 수 없는 백성들의 간절함만으로도 무덤덤하고 친근하다.



얼굴 표정들은 자신의 안쪽을 들여다보기도 하고 또는 바깥을 내다보고 있기도 한데 모두 말을 걸어올 듯이 살아 있다. 표정들은 모두 저마다의 내면을 드러내고 있지만, 그 많은 표정들은 결국 인간의 얼굴이라는 동일한 마당으로 모여든다.

얼굴이야말로 살아 있는 인간의 몸과 살아서 작동되는 마음이 만나서 빚어지는 또하나의 완벽한 자연이라는 것을 이 박물관에서 알 수 있다. 얼굴은 그 표정으로써 나에게 말을 걸어왔는데, 나는 말로써가 아니라 표정으로써만 그 표정들에 응답할 수 있었다. 나는 그 얼굴들의 표정과 나의 표정 사이를 말로써 건너가고 싶었다. 그래서 나는 이 박물관에서 아무런 말도 확보하지 못한 채 바쁘기만 바빴다. 표정들은 전할 수 없는, 그러나 분명히 들려오는 목소리로 말을 걸어왔다.

그 얼굴들은 모두 이 세계가 인간의 얼굴을 닮기를 기원하는 얼굴들이었다. 인간 쪽으로 돌아서지 않은 이 세계를 향해서 이쪽으로 돌아오라고 미소지으며 유혹하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 얼굴들은 그리움이나 결핍의 간절함을 드러낼 때도 그 그리움으로써 자족한 풍경을 빚어내고 있었다. 얼굴은 인간의 빛인데, 이 빛은 세계의 어둠을 비추는 빛이다.

 

얼굴박물관에 전시된 얼굴들은 드러난 표정인 동시에 내면의 풍경이다. 드러남과 감추어짐이 일치할 때 얼굴은 하나의 자연에 도달한다. 이 자연은 겉과 속, 나와 내 밖의 세계를 연결시킴으로써 운명의 힘을 느끼게 한다. 명리학이 인간의 얼굴에서 전생의 흔적과 운명의 암시를 감지할 수 있는 까닭도 이 얼굴의 자연성에 있을 것이다. 얼굴의 자연성은 필연인 동시에, 그 필연과 더불어 조화로운 자유를 느끼게 한다. 어떤 얼굴은 보는 사람의 시선을 얼굴의 안쪽으로 끌고 들어간다. 그때 보이는 것은 얼굴의 표정이 매개해주는 얼굴의 내면이다. 또 어떤 얼굴은 바깥쪽 세상을 내다보고 있는데, 그 얼굴의 시선은 바라보는 자의 안쪽으로 넘어들어와서, 바라보는 자는 자신의 안쪽을 들여다 보게 된다. 그때 보이는 것은 그 얼굴의 표정이 열어젖혀주는 자신의 내면이다. 그래서 얼굴들의 표정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나의 표정으로 거기에 응답한다. 얼굴은 저 자신의 내면을 드러내지만, 그 드러냄으로써 타인과 교신하고 타인을 영접하고 타인과 소통한다. 얼굴은 언어인데 이 언어는 말과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니라 몸가 마음으로 살아가는 생애의 표현물이다. 그러므로 표정에 관하여 말하려는 말은 말에 미달할 것이다.





다시는 거울을 들여다보지 말자고 나는 그 얼굴박물관에서 다짐했다. 내 얼굴과 표정은 나 자신의 불가피한 드러남일 테지만 이 드러남은 나의 자연현상인 것이어서 나 자신이 그것을 들여다보아야 할 까닭은 전혀 없을 것이다. 내 얼굴은 나에게 보일 필요가 없는 자연현상으로서 홀로 고요히 하나의 풍경을 이루고, 그 풍경에 세상의 풍경이 비치고, 이 비침을 통해 나는 세상과 소통할 수 잇을 것이다. 얼굴박물관의 얼굴들은 거울을 들여다보지 않는다.


염노인은 사람이 죽어서 산으로 가는 이 마지막 사업을 ‘입산’이라고 말했다. 그의 ‘입산’이라는 말 속에서, 산은 삶이 다하는 자리에서 펼쳐지는 평화의 깊이로 느껴졌고, 그래서 위로받아야 할 쪽은 상여 속에 누워서 입산하는 죽은 자가 아니라 빈 상여를 메고 하산해야 하는 산 자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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