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속 나, 그녀, 그리고 모든 흰 것들
한 페이지, 한 페이지마다의 이야기들은
각기 분리된 이야기 같기도 하지만 하나하나가 희미하지만 투명하게 연결된 이야기들이다,
소설같기도, 시집같기도, 자신의 살아온 에세이 같기도 하지만
이야기는 책 제목처럼 ‘흰’ 것에 의해 연결되어진 이야기들이다.
‘나’에게 있어 ‘흰’
문, 강보, 배내옷, 달떡, 안개, 흰도시, 어둠 속에서 어떤 사물들은, 빛이 있는 족, 젖, 그녀, 초
‘그녀’에게 있어 ‘흰’
성에, 서리, 날개, 주먹, 눈, 눈송이들, 만년설, 파도, 진눈깨비, 흰 개, 눈보라, 재, 소금, 달, 레이스 커튼, 입김, 희 새들, 손수건, 은하수, 하얗게 웃는다, 백목련, 당의정, 각설탕, 불빛들, 수천 개의 은빛 점, 반짝임, 흰 돌, 흰 뼈, 모래, 백발, 구름, 백열전구, 백야, 빛의 섬, 얇은 종이의 하얀 뒷면, 흩날린다, 고요에게,R UD계, 갈대숲, 흰나비, 넋, 쌀과 밥
그리고 ‘모든 흰’
-, 당신의 눈, 수의, 언니, 백지 위에 쓰는 몇 마디 말처럼, 소복, 연기, 침묵, 아랫니, 작별, 모든 흰
그렇게 날카로운 시간의 모서리-시시각각 갱신되는 투명한 벼랑의 가장자리에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간다. 살아온 만큼의 시간 끝에 아슬아슬하게 한 발을 디디고, 의지가 개입할 겨를 없이, 서슴없이 남은 한 발을 허공으로 내딛는다. 특별히 우리가 용감해서가 아니라 그것밖엔 방법이 없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도 그 위태로움을 나는 느낀다.
'흰'이라는 것으로 연결되었다고 생각된 관계는
삶과 죽음이라는 관계가 숨어 있다.
'태어남 - 배냇저고리 - 흰 젖 - 뽀얀 쌀밥 - 하얀 이 - 죽음 - 수의'
희고 투명한 것은 시작이면서 끝과 연결된다.
죽음을 덧밟고 살아가는 삶은 그래서 위태롭고 아슬아슬하다.
마침내 혼자 아기를 낳았다. 혼자 탯줄을 잘랐다. 피 묻은 조그만 몸에다 방금 만든 배내옷을 입혔다. 죽지 마라 제발, 가느다란 소리로 우는 손바닥만한 아기를 안으며 되풀이해 중얼거렸다. 처음엔 꼭 감겨 있던 아기의 누꺼풀이, 한 시간이 흐르자 거짓말처럼 방긋 열렸다. 그 까만 눈에 눈을 맞추면 다시 중얼거렸다. 제발 죽지마. 한 시간쯤 더 흘러 아기는 죽었다. 죽은 아기를 가슴에 품고 모로 누워 그 몸이 점점 싸늘해지는 걸 견뎠다. 더 이상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나와 그녀의 삶.
누군가는 첫 젖을 먹었으나 두 시간을 버티지 못한 채 싸늘한 주검이 된다.
인간의 언어를 몰랐던 그 아기가 들었던 유일한 언어 “제발 죽지마”
무슨 의미인지도 모른 채 그렇게 죽어간다,
첫 젖이 나와 아기의 입술에 물려봤을 때, 놀랍게도 아직 숨이 붙어 있었따. 의식 없는 상태로 아기가 젖을 물고 조금씩 삼켰다. 점점 더 삼켰다. 여전히 눈을 뜨지 않츤 채. 지금 자신이 넘어오고 있는 경계가 무엇인지 모르는 채.
그리고 누군가는 첫 젖을 먹으며 죽음의 경계에서 삶의 경계로 넘어온다,
마치 “죽지마, 죽지 마라 제발” 이라는 의미를 온전히 이해한 것처럼,
삶은 그렇게 이어졌다.
먼저 죽었던 아기가 살았다면
삶의 존재가 되지 못했을 살아있는 아기.
‘내가 살아 있다면, 당신이 존재하지 않아야 하고, 당신이 아직 살아 있다면, 지금 나는 이 삶을 살고 있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둘의 존재는
파괴된 석벽위에 다시 쌓아올린 건물처럼
누군가의 희생위에 살아가는 삶이다,
죽었으나 살아가는, 살아가지만 죽어있는,
연결의 끈에 기반한다.
그 사람에 대해 처음 생각한 것은 그날이었다.
이 도시와 같은 운명을 가진 어떤 사람. 한차례 죽었거나 파괴되었던 사람. 그을린 잔해들 위에 끈덕지게 스스로를 복원한 사람. 그래서 아직 새것인 사람. 어떤 기둥, 어떤 늙은 석벽들의 아랫부분이 살아남아, 그 위에 덧쌓은 선명한 새것과 연결된 이상한 무늬를 가지게 된사람.
그녀
그 아기가 살아남아 그 젖을 먹었다고 생각한다.
악착같이 숨을 쉬며, 입술을 움직거려 젖을 빨았다고 생각한다.
젖을 떼고 쌀죽과 밥을 먹으며 성장하는 동안, 그리고 한 여자가 된 뒤에도, 여러 번의 위기를 겪었으나 그때마다 되살아났다고 생각한다.
죽음이 매번 그녀를 비껴갔다고, 또는 그녀가 매번 죽음을 등지고 앞으로 나아갔다고 생각한다.
죽지마, 죽지 마라 제발,
그 날이 그녀의 몸속에 부적으로 새겨져 있으므로.
그리하여 그녀가 나 대신 이곳으로 왔다고 생각ㅎ나다.
이상하리만큼 친숙한, 자신의 삶과 죽음을 닮은 도시로
확언할 수도, 부인할 수도 없다. 그이나 나에게 때로 찾아 왔었는지. 잠시 내 이마와 눈언저리에 머물렀었는지. 어린 시절 내가 느낀 어떤 감각과 막연한 감정 가운데, 모르는 사이 그이로부터 건너온 것들이 있었는지. 어둑한 방에 누워 추위를 느끼는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니까. 죽지마. 죽지 마라 제발. 해독할 수 없는 사랑과 고통의 목소리를 향해, 희긋한 빛과 체온이 있는 쪽을 향해, 어둠 속에서 나도 그렇게 눈을 뜨고 바라봤던 건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죽음을 바탕으로 한 삶.
그래서 무엇보다도, 누구보다도 흰 삶이어야 하지만,
흰 것도 아니고, 투명한 것도 아닌 삶은 아니었는지
그 삶이 죽음에게 떳떳한 삶이였는지 확실치 않다.
엉망으로 넘어졌다가 얼어서 곱은 손으로 땅을 짚고 일어서던 사람이, 여태 인생을 낭비해왔다는 걸 깨달았을 때,
씨팔 그 끔찍하게 고독한 집구석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게 뭔가, 대체 이게 뭔가 생각할 때
더럽게도 하얗게 내리는 눈.
삶은 누구에게도 특별히 호의적이지 않다. 그 사실을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이마를, 눈썹을, 뺨을 물큰하게 적시는 진눈깨비. 모든 것은 지나간다. 그 사실을 기억하며 걸을 때, 안간힘을 다해 움켜쥐어온 모든 게 기어이 사라지리란 걸 알면서 걸을 때 내리는 진눈깨비. 비도 아니고 눈도 아닌 것. 얼음도 아니고 물도 아닌 것. 눈을 감아도 떠도, 걸음을 멈춰도 더 빨리해도 눈썹을 적시는, 물큰하게 이마를 적시는 진눈깨비.
가끔 그녀는 그것(흰 조약돌)을 꺼내 손바닥 위에 얹어보았다. 침묵을 가장 작고 단단한 사물로 응축시킬 수 있다면 그런 감촉일 거라고 생각했다.
확실할 수 없어 살아갈 수 없다.
삶과 죽음이 연결되어 있고, 죽음의 자리위에 삶이 있기에
영원할 수 없는 자신 안에 있는 무언가와 결별하려는 사람.
당신이 나를 언젠가 버리게 되듯
나도 나를 버리려고 한다.
너는 하얗게 웃었지.
가령 이렇게 쓰면 너는 조용히 견디며 웃으려 애썼던 어떤 사람이다.
그는 하얗게 웃었어.
이렇게 쓰면(아마)그는 자신 안의 무엇인가와 결별하려 애쓰는 어떤 사람이다.
물과 물이 만나는 경계에 서서 마치 영원히 반복될 것 같은 파도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동안(그러나 실은 영원하지 않다-지구도 태양계도 언젠가 사라지니까), 우리 삶이 찰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또렷하게 만져진다.
부서지는 순간마다 파도는 눈부시게 희다. 먼 바다의 잔잔한 물살은 무수한 물고기들의 비늘 같다. 수천수만의 반짝임이 거기 있다. 수천수만의 뒤척임이 있다(그러나 아무것도 영원하지 않다)
왜냐하면, 당신은 언젠가 반드시 나를 버릴 테니까.
내가 가장 약하고 도움이 필요할 때,
돌이킬 수 없이 서늘하게 등을 돌릴 테니까.
그걸 나는 투명하게 알고 있으니까.
그걸 알기 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되었으니까.
하지만 삶의 끝을 희망하는 그곳에 삶의 시작이 놓여있다,
차가운 공기는 어느 순간 생명의 따뜻함으로 변한다,
굽이진 모퉁이, 모퉁이들의 삶을 지나다보면 모퉁이 돌아 새로운 길을 걷다보면,
지나온 모퉁이들을 잊어버리게 된다,
그렇게 삶은 다시 죽음의 터 위에서 시작된다.
어느 추워진 아침 입술에서 처음으로 흰 입김이 새어나오고, 그것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 우리 몸이 따뜻하다는 증거. 차가운 공기가 캄캄한 허파 속으로 밀려들어와, 체온으로 덥혀져 하얀 날숨이 된다. 우리 생명이 희끗하고 분명한 형상으로 허공에 처져나가는 기적.
만일 삶이 직선으로 뻗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느 사이 그녀는 굽이진 모퉁이를 돌아간 자신을 발견할 지도 모른다. 문득 뒤돌아본다 해도 그동안 자신이 겪은 어떤 것도 한눈에 보이지 않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지도 모른다.
죽음위에 채워진 삶이라도 죽음 자의 삶이 아닌 산 자의 삶.
그래서 죽음에 부끄럽지 않으려 했던 희고 투명한 삶이,
희고 투명하지 않더라도,
그 삶을 다시 죽음으로 밀어넣지 않으려 한다.
살아있는 자의 삶이 죽은 자에게 빚진 삶이 아니기에,
삶은 죽음에게 말하고 싶다.
“죽지 말아요, 살아가요”
아니, 이말은 죽음이 삶에게 오히려 하고 싶었던 말이었는지 모른다.
당신의 눈으로 바라볼 때 나는 다르게 보았다. 당신의 몸으로 걸을 때 나는 다르게 걸었다. 나는 당신에게 깨끗한 걸 보여주고 싶었다. 잔혹함, 슬픔, 절망, 더러움, 고통보다 먼저, 당신에게만은 깨끗한 것을 먼저. 그러나 뜻대로 잘되지 않았다. 종종 캄캄하고 깊은 거울 속에서 형상을 찾듯 당신의 눈을 들여다봤다.
이제 당신에게 내가 흰 것을 줄게,
더럽혀지더라도 흰 것을,
오직 흰 것들은 건넬게.
더 이상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게.
이 삶을 당신에게 건네어도 괜찮을지.
말을 모르던 당신이 검은 눈을 뜨고 들은 말을 내가 입술을 열러 중얼거린다. 백지에 힘껏 눌러쓴다. 그것만이 최선의 작별의 말이라고 믿는다. 죽지 말아요. 살아가요.
흰 벽의 카페에서
하얗게 부서지는 햇살을 맞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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