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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접하게 된/영화

물속에서 숨 쉬는 법

by 심심한 똘이장군 2018. 9. 29.

영화의 장소는 현대도시중 하나인 대구다.

영화의 제작지원이 이루어진 곳이 대구라는 특성이 반영되었을 뿐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현대화된 도시속 삶 속에서 서로 연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개별적으로 사는 현대인의 삶에 대한 모습이다.

자동차 부품공장에서 반장으로 일하지만 직원 한명을 선택해 권고 사직시켜야 하는 현태(장준휘). 난독증 판정을 받은 현태의 아들 영준(김현빈). 시름의 깊이를 알 수 없는 무표정의 지숙(조시내 분).

그리고 자동차 부품공장 인사과장 준석(오동민)과 산후우울증을 앓고 있는 준석의 아내 은혜(이상희).

이들 2가족 5명의 인물들은 물속에서 숨 쉬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현실에서 그저 하루의 삶을 견뎌나간다.



씨네 21 인터뷰에서 감독은 영화의 제목을 원작인 ‘하루(박성원 작가)’ 로 하지 않고 ‘물속에서 숨 쉬는 법’ 이라고 지은 이유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직관적으로 만든 제목이다. 물을 무서워하는 편인데, 수영장에서 몸 안의 숨을 다 뱉고 물속 바닥까지 내려가면 금세 갑갑해진다. 조금만 더 있으면 죽을 것 같은 느낌도 들고. 영화 속 인물들이 사는 세상이 내가 물속에서 느낀 갑갑하고 답답한 세상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는 게 힘들고 답답하지만 그럼에도 살기 위해선 숨을 쉬어야 한다. 어떻게 이 답답한 세상을 살아갈까, 그런 생각을 모두가 한번쯤 해봤으면 좋겠다는 의미로 지은 제목이다.



그런데 시종일관 깊은 물속과 같은 블루색 기운으로 물든 영화속 가족들의 이야기를 쫓다보면 이들이 과연 물속에서 숨쉬는 법을 체득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물속에서의 그들은 지금도 제대로 숨쉬는 법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해, 그것을 배우기 위해 발버둥 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하기에 지금의 그들은 물속에서 숨쉬는 것이 아니라 물 밖으로 나가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 것 같다.



영화는 갑갑한 삶의 하루를 표현하려는 듯 고정된 프레임 안에 5명의 캐릭터들을 가둬둔다.

푸른 빛 필터의 고정된 프렘임 안에서만 사람들은 움직일 뿐,,, 마치 외부와의 교류가 끊어진 고여있는 저수지의 물처럼 말이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절망으로 내몰린 마지막이 되어서야 카메라는 사람들을 따라 물이 흐르듯 움직인다.

 

마지막 엔딩에서 물속에서 유영하는듯 한 느낌을 주고 싶었어요. 이와 동시에 병원에 가득 차 있는 사람들도 각자의 사연과 하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는데요, 이러한 이유로 카메라에 움직임을 줬고 원래는 한 씬 한 컷으로 엔딩을 마무리 하고 싶었지만 기술적인 문제로 인해 컷을 나누게 되었어요.

 

감독의 의도에도 불구하고 내게 있어 영화의 마지막 카메라의 흐름은 죽은 자에게 있어, 죽음을 통해서야 비로서 흐르는 물처럼 자유로워진 삶이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영화속 5명의 캐릭터들은 각기 하루의 삶을 살면서 때로는 개별적이기도, 때로는 우연적으로 연결되어지는 고리속에서 수평적으로 배치된다.

캐릭터들의 수평적 배치는 결과적으로 순차적으로 흐르는 듯 보였던 시간이 어느 순간 과거의 시간과 만나는 “시간의 역전성”이라는 형식적 틀 속에서 5명의 캐릭터간 이야기는 시점의 이동과 시간의 역전을 통해서 A의 시점은 어느 순간 B의 시점, 다시 C의 시점, D의 시점으로 옮겨가면서 시간을 역전하며 과거와 현재가 연결된다

이야기는 개별적이기도 하지만 시간의 역전성 속에서 개개의 캐릭터들은 서로간에 우연성을 띈 연계성을 갖게 된다.

시간의 역전성을 만들어내기 위해 모자이크 방식(gv에서 언급되었던)의 편집을 통해 각 사건들은 교차, 충돌하게 되고, 놓쳤을 수도 있는 찰나의 순간들이 하나의 사건들이 되어가는 모습으로 펼쳐진다.

이야기는 우연같은 교차속에서도 필연적으로 관계를 맺지 않거나 거부하는 지나침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그 결과는 비극으로 마무리 된다.

영화는 철저히 주어진 결말대로 갈 뿐 우리가 꿈꾸는 조금의 희망도 허락하지 않는다.

수없이 교차되는 필연적 우연의 순간에 한번이라도 희망의 끈을 잡을 수 있는 것이 있었다면, 결말은 달라질 수 있었을까?

현태가 LP바에서 신청곡(김광석의 노래를 염두해 뒀다고 한다)을 들을 수 있었더라면, 견인스티커를 영준이 가져가지 않았다면, 전세금 입금을 서두르지 않았다면...

인생에 등장하는 많은 가정처럼, 영화속 이야기들은 많은 가정을 되새기게 한다.

하지만 그것은 가정일 뿐 현실이 되지 못한다.



“물속에서 숨 쉬는 법” 속 사람들은 그저 우리 일상의 평범한 사람들과 같다.

또한 슬픈 결말은 어느 누구의 특별한 잘못도, 책임도 아니다.

 

이들이 특별히 나쁜 사람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들은 그저 자신들의 일을 충실히 했을 뿐이다. 그들에게 잘못이 있다면, 일에 치인 나머지 도움이 필요한 주변을 돌아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영화가 이러한 현실에 처해질 수 밖에 없는 제도에 대한 비판을 가하지도 않는다.

그저 그 상황들에 대해 현실에 대한 날선 비판을 세우는 대신, 무력하게 현실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보여줌으로써 이야기를 마무리할 뿐이다.



감독은 아리랑씨네센터에서 GV에서는 씨네21 에서보다는 다소 희망적으로 제목에 대하여 이야기 한다.

(이번에는 감독은 참석하지 못해 장준휘 배우가 감독의 이야기를 대신 전했다. 하지만 기억력의 한계로 인하여 이것이 올바로 옮긴 의도인지도 확실치는 않다. 원문을 전달받을 방법은 없을까? ㅠㅠ)

    

 

타인화되고 개별적인 삶 속에서 그래도 연대를 통해 물 속에서 살아가는 법을 이야기 하고 싶었다. 타자화된 개인의 연대를 통해서 현실의 제약을 넘을 수 있음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

 

 

블루톤의 영상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우울하다는 느낌보다 갑갑하다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갑갑한 현실이지만, 그래도 현실에서 조금이나마 희망이 싹트기를 빌어본다.

그래야 살아가는 것이 서럽지 않을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