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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접하게 된/책

반전이 있는 동아시아

by 심심한 똘이장군 2017. 8. 7.

흔히들 우리는

아시아를 우리나라가 포함된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로 구분한다.

그리고 과거의 화려했던 동남아시아의 역사는 무시하고,

동북아시아 중심의 역사를 앞선 역사로 인식하고 있다.

과연 우리는 아시아 국가를 얼마나 알고 있을까?


특히 한국, 중국, 일본은 각 국의 위세의 부침에 따라

평화적인 교류가 있기도 했지만, 침략과 지배, 피지배라는 아픔의 역사들을 가지고 있다.

그 역사적 과정을 통해서 문화와 역사가 공존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중국내에서 일본과 한국 문화의 영향을

일본내에서 중국과 우리나라 문화의 영향을

우리나라내에서 중국과 일본 문화의 영향을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최근에도 서로간의 문화, 경제적 교류는 쉼없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중국, 일본에 대해 우리는 근현대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다.

그리고 잘 모르는 부분도 분명 존재한다.


중국, 일본이 이러한 상황인데

타이완, 홍콩에 대해서는 그 정도가 더 심하다.

해외여행으로 더 가까워졌다고는 하나,

화교영향권, 중국인이겠지라는 생각으로 접근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의외로 간략하지만,

그들을 조금이라도 알기에 필요한 부분들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가볍지만 가볍지 않은 책

 

 

 

 

 

 

 

 

일본을 섬나라라고 깔보는 유일한 나라가 우리나라라는 우스게 소리가 있다.

심지어 우리나라보다도 넓은 국가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하지만 싫든 좋든 역사적 시각에서 보면

일본의 역사와 문명의 발달은 우리와 비슷하게 흘러왔다.

우리의 삼국시대에는 야요이 시대에서 아스카 시대를,

통일신라시대에는 나라 시대와 헤이안 시대라는 독자적인 문화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일본이 상대적으로 경제적으로 선진국으로 도약하게 된 것은

우리가 그토록 싫어하는 이토 히로부미가 권력을 장악했던 시기,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 분야에 있어 과감한 근대화 정책을 벌이던 시기였다.

역사의 가정에서 우리가 쇄국정책을 쓰지 않고 개방을 했다면, 일본과의 격차가 존재하지 않았을까? 일제의 침략이 없었을까?

알 수 없다.

개방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 모든 분야에서의 개혁이나 변화가 없었다면, 역사적 가정은 무의미했을지도 모르겠다.

일본이 싫고 좋고의 문제가 아니라 일본은 일본 자체의 변화의지를 통해 다른 국가보다 빠르고 높게 성장했음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중국에는 국부가 세명 있다고 한다

첫 번째 국부는 중국을 제국에서 공화국으로 바꾼 쑨원

오랜 세월의 투쟁과 좌우의 포용하는 협력을 통해 청나라 황실을 무너뜨리고 중화인민공화국의 기틀을 마련한 ‘쑨원’

그의 삼민주의‘민족, 민권, 민생’사상과 행보는 이후의 중국, 타이완, 홍콩, 마카오에 이르는 많은 지역에서 존경을 받게 되는 역사적 결실을 보게 되었다.

두 번째 국부는 중국을 공산국가인 신중국으로 바꾼 마오쩌둥

그러나 마오쩌둥에 대해서는 중국인들이 긍정적인 생각만 가지고 있지는 않다고 한다.

‘공칠과삼’이라고 하여 국부로 칭하기는 하지만 잘못된 3가지 정책에 대해서 비판도 하고 있다고 한다.

과의 대부분이 문화대혁명 등을 통한 과도한 국민들의 희생이었다고 하니, 힘없는 국민들의 희생에 대해서는 후세에서도 비난을 받게 되는 것은 정치체제의 형태와는 상관없는 불변의 진리인가 보다.

세 번째 국부는 공산주의 중국을 시장경제 체제로 바꿔 놓은 덩샤오핑.

흑묘든 백묘든 고양이는 쥐를 잡기만 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국민들의 경제적 행복을 중요한 정책적 목표로 삼았던 덩샤오핑은, 과감하게 죽의 장막에 있던 중국을 서방세계와의 교류를 통한 시장경제 도입을 통해 경제대국으로 발전시켰다

 

 

 

중국은 여전히 공산당 일당체제의 공산주의 국가로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와 같은 대다수의 외국인들은 과연 중국에 대해 공산국가로서의 불편함과 이미지를 가지고 있을까

총GDP 규모 세계 2의 국가와 많은 글로벌기업들의 진출 및 공장설립, 정치, 경제력의 확장, 다양한 관광지까지 공산국가라는 이미지는 어디에서도 느끼지 못한다.

물론 외국인에 대해서만 적용되는 부분이 다수 존재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염연히 중국은 공산국가로서 중국 정부조직도 공산당에 의해 관리되어 진다

중국 공산당은 약 8,000만명의 공산당원, 2,217명의 전국대표대회, 중앙위원회(중앙위원 205명, 후보위원 171명), 중앙정치국위원(25명), 상무위원(7명), 총 서기(1명)의 피라미드 형태의 조직이 중국을 관리하고 있다.

한편 전국인민대표대회를 통해 공식적 국가원수인 ‘국가주석’, 내정 및 경제를 담당하는 ‘국무원 총리’, 인민해방군을 관할하는 ‘군사위원회 주석’ 이 선출된다.

그런데 공산당을 기반으로 하는 중국에 있어서

‘주석’이 높을까? 공산당을 대표하는 ‘서기’가 높을까?

미묘한 문제인데, 그 사람의 권력지형에 따라 ‘주석’이 높기도 하고 ‘서기’가 높기도 하고, 그때그때 다르다고 하니, 우리와는 사뭇 다른 국가운영체제임을 실감하게 된다

 

 

과연 중국의 성장, 특히 공산당에 의한 계획경제가 계속적인 성공을 거둘수 있을까? 저자는 중국의 한계를 ‘저임금에 기반한 산업화의 한계’, ‘날로 심각해지는 계층 및 지역간 불평등’ 그리고 ‘중국의 아킬레스건 톈안먼’ 을 극복하지 못할 경우 발생될 문제로 지적하고 있다.

 

 

 

 




 




타이완은 중국과 별개의 나라다. 하지만 국제적으로 나라로 인정받지는 못하는 것이 타이완의 현주소다.

그렇다면 중국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면 그렇지도 않다.

중국문화라고 하기에는 많은 부분이 동남아시아와 일본의 문화가 섞여 있기도 하다.

우리가 아는 타이완은 장제스에 의해 통치되어진 중국인 국가로 인식되어 지고 있다.

하지만 실제 타이완인들은 본인들을 중국인이라고 인식하지 않고, ‘타이완’ 이라고 불리길 원한다고 한다.

타이완은 본토 중국인들이 도하하기 이전에 이미 토속인들에 의해 동남아시아와 일본, 우리나라등과 교역이 이루어지고 있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상도와 전라도를 합친 크기의 타이완은 중국과 인접한 지역을 제외한 남부나 동부지역은 과거부터 거주하던 ‘내성인’, ‘고산족’주민이 더 많은 구성원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영국의 식민지 시대, 일본의 50년 점령시절에도 수많은 희생을 당했던 타이완 국민들은

우리의 광주민주화운동과 같은 타이완의 1947년 2월 28일의 사건으로 중화민국으로부터 많은 학살을 당하게 된다.

더욱이 장제스를 중심으로 한 본토 중국인의 폭압적, 차별적, 세습적, 비민주적인 정책으로 인해 많은 희생이 뒤따르면서 본토 중국인에 대한 거부감과 함께 타이완 자체에 대한 자긍심과 독립심이더 강해진 것 같다.

 

사실 타이완은 우리나라의 군부 독재시절을 뛰어넘는 철저한 독재와 탄압의 시절(1949년 이후 38년간의 계엄령)이 있었다고 한다.

그 시기동안 수많은 본성인과 토속인들의 민주화 요구 운동과 희생을 통해 1987년부터 민주화의 봄을 맞이하고, 다당제가 도입되었다고 하니, 우리나라의 정치적 역사와 많은 부분들이 오버랩되는 느낌이다.

최근에는 오히려 우리나라의 민주화가 퇴보된 느낌마저 드는 상황에서 타이완의 민주화는 우리보다 공고해 보인다.

과거로의 회귀를 원칙적으로 못하게 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고 하니, 과거의 고통과 잘못을 타산지석으로 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 한번 느끼게 된다.

 

 


 

 

중국이 맞긴 한데, 중국의 국가시스템과는 다른,

중국속의 유럽, 영국의 모습을 하고 있는 홍콩.

중국과 영국의 전쟁에 따른 희생의 이면을 가지고 있는 홍콩.

영국의 점령과 통치, 그 속에서의 억압과 희생.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홍콩인들의 치열한 싸움을 통해 홍콩은 영국수준의 복지와 인권을 신장시켜왔다.

하지만 중국이면서도 독립된 특별자치구인 홍콩의 미래는 2047년이후에는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지금도 중국공산당의 내정간섭이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영국이 중국에 홍콩을 반환하는 대신 50년간 현 체제 유지를 조건으로 했다)

공산당 일당독재 국가로서 홍콩 시민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중국본토에 대한 외국자본 통로로서의 홍콩의 중요서이 줄어들면 홍콩에 대한 특별대우는 줄어들 것이 예상된다.

아울러 순조로운 홍콩의 경제성장에도 불구하고 극심한 빈부 격차와 치솟는 물가는 홍콩의 미래에 대한 우려를 자아내게 한다.

 

홍콩이 짝퉁의 천국으로 유명했던 때가 있다.

물론 지금도 홍콩여행을 가면 짝퉁시장을 둘러보는 것도 투어코스중에 하나긴 하지만 말이다

홍코이 짝퉁 천국을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만큼 진품을 생산하는 능력도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1970년대 홍콩은 밀려드는 중국본토 인력으로 인한 값싼 풍부한 노동력을 바탕으로 세계 거의 모든 명품을 만드는 공장이었다.

결국 기술력이 있으니 짝퉁도 만들었다는 것인데, 우리나라가 70년대 산업화를 거쳐 80년대 호황기때 짝퉁생산지로서의 화려한 명성(?)를 떨쳤던 때가 떠오른다.

홍콩은 사실 지금은 굳이 짝퉁 천국의 오명을 쓰지 않더라도 쇼핑천국으로서의 이미지를 구축하고 있다.

각종 면세제도 등으로 반값 명품구입이 가능할 정도라고 하니, 단순히 경찰력이 아닌 제도변경으로서도 충분히 국가이미지를 바꿀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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