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
실연당했습니다.
스위치를 꺼버린 것처럼 너무 조용해요.
혼자 있으면 손목을 그을 것 같은 칼날 같은 햇빛.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영화제를 주최합니다.
실연 때문에 혼자 있기 싫은 분들은 저랑 아침 먹어주실래요?
누군가. 특히 실연당한 사람에게 있어
이런 식의 초대글은 유쾌하지 못하지만,
그냥 흘려보낼 수 없는 끌림을 유발하게 된다.
그래서 모이게 된 21명의 사람들.
"실연당한 사람들을 위한 일곱시 조찬 모임"은
행위의 주체가 되기도 하고
행위의 객체가 되기도 하고,
주체와 객체가 혼재된 공간이기도 하다.
작가 프랑소와 사강을 좋아하는 아버지에 의해 사강이라는 이름을 갖게 된 윤사강 (지훈의 모노카메라를 갖게 된)
그리고 프랑소와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를 읽고 있는 지훈 (윤사강의 슬픔이여 안녕이라는 책을 갖게 된)
그리고 실연과 인연의 끈을 하나로 연결할 수 있다는 기획을 하게 되는 정미도
실연은 슬픔이나 절망, 공포 같은 인간의 추상적인 감동들과 다르게 구체적인 통증을 수반함으로써 누군가로부터의 거절이 인간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상처를 남길 수 있는지를 증명하는 것이라는 글속의 문구처럼,
그 아픔을 잊어버리기로 마음먹은 사람에게 있어 추억이 있는 물건은 고통의 기억일 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아픔을 고통속에서 새로운 사람을 찾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이 책.
참신한 시작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공감과 과거의 경험에 대한 추억에도 불구하고
주인공들의 사랑과 실연.
그리고 새로운 인연이라는 의식에 맞춰
너무 우연적인 요소들을 많이 넣은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실연의 아픔이, 관계의 아픔을
마치 치유되어져야 만 한다는 목표의식에 맞춰 전개되는 느낌이다.
하지만 실연의 아픔이, 관계의 아픔이란 것이
꼭 치유되어져야 만 하는 것일까?
책의 마지막,
프랑소와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이라 작품의 제목처럼
슬픔에 대하여 안녕(hi) 하면 되지 않을까.
굳이 강제하지 않고 말이다.
시간에 묻어져야 하는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