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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접하게 된/책

여행의 이유 - 김영하

by 심심한 똘이장군 2020. 9. 6.

여행에세이라면 여행지에 관련된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는게 일반적이지만, 

이책에서의 여행지는 에세이의 매개체일 뿐 여행지보다는 작가로서 여행에 대한 생각이 더 주를 이루는 책이다.

그래서 오히려 뻔하지 않은 여행에세이가 되었다고나 할까.

인간은 본능적으로 끊임없이 이동하는 운명을 타고 났고, 작가 또한 그 본능에서 자유롭지는 않을 것이다.

 

 


철학자 가브리엘 마르셀은 인류를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 여행하는 인간으로 정의하기도 했다. 인간은 끝없이 이동해왔고 그런 본능은 우리 몸에 새겨져 있다.


끝없이 이동하는 인류의 운명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했다. 유전자에 새겨진 이동의 본능. 여행은 어디로든 움직여야 생존을 도모할 수 있었던 인류가 현대에 남긴 진화의 흔적이고 문화일지도 모른다. 피곤하고 위험한데다 비용도 많이 들지만 여전히 이간은 여행을 포기하지 않고 있다. 아니, 인터넷 시대가 되면 수요가 줄어들 거라던 여행은 오히려 더욱 활발해지고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일상의 혼란과 답답함에서 벗어나기를 원한다.

여행을 꿈꾸고 실행에 옮기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나중에 여행을 돌아보게 되면 여행을 통해 얻게 된 것은 스스로에 대한 앎이지 않을까?

혼란 속에서 자신이 원했던 것이 무엇이고, 왜 그랬는지에 대한...

그리고 한 걸음 뒤로 물러서 봤을 때 자신의 모습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기대와는 다른 현실에 실망하고, 대신 생각지도 않던 어떤 것을 얻고, 그로 인해 인생의 행로가 미묘하게 달라지고, 한참의 세월이 지나 오래전에 겪은 멀미의 기억과 파장을 떠올리고, 그러다 문득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조금 더 알게 되는 것, 생각해보면 나에게 여행은 언제나 그런 것이었다.

 


여행이 약탈이라면 여행은 일상에서 결핍된 어떤 것을 찾으러 떠나는 것이다. 우리가 늘 주변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 뭐하러 그 먼길을 떠나겠는다. 여행지에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여행은 어쩌면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 점점 더 사회적으로 나에게 부여된 정체성이 때로 감옥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많아지면서, 여행은 내가 누구인지를 확인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를 잠시 잊어버리러 떠나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여행의 시작은 혼란과 답답함에 대한 도피였을 것이다.

그러나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곳은 언제나 현실의 일상이 될 수 밖에 없다.

현실의 일상을 삶의 터전으로 하고 있는 한에는 말이다..

그래서 여행의 최종목적지는 혼란하고 답답한 일상임을 인정해야 한다.

작가의 말처럼 여행을 통해 혼란하고 답답한 일상을 다시금 살아갈 힘을 얻는 것이 여행의 의미일 수 있으니까...


인간은 왜 여행을 꿈꾸는가. 그것은 독자가 왜 매번 새로운 소설을 찾아 읽는가와 비슷할 것이다. 여행은 고되고, 위험하며, 비용도 든다. 가만히 자기 집 소파에 드러누워 감자칩을 먹으며 텔레비전을 보는 게 돈도 안 들고 안전하다. 그러나 우리는 이 안전하고 지루한 일상을 벗어나 여행을 떠나고 싶어한다. 거기서 우리 몸은 세상을 다시 느끼기 시작하고, 경험들은 연결되고 통합되며, 우리의 정신은 한껏 고양된다. 그렇게 고양된 정신으로 다시 어지러운 일상으로 복귀한다. 아니, 일상을 여행할 힘을 얻게 된다, 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인류가 한 배에 탄 승객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 우주선을 타고 달의 뒤편까지 갈 필요는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인생의 축소판인 여행을 통해, 환대와 신회의 순환을 거듭하여 경험함으로써, 우리 인류가 적대와 경쟁을 통해서만 번성해온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달의 표면으로 떠오르는 지구의 모습이 그토록 아름답게 보였던 것과 그 푸른 구슬에서 시인이 바로 인류애를 떠올린 것은 지구라는 행성의 승객인 우리 모두가 오랜 세월 서로에게 보여준 신뢰와 환대 덕분이었을 것이다.

 

작가는 자신이 창조한 작품의 세계속으로 현실보다 더 의미있는 여행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리고 우리같은 독자는 그 여행에 조용히 동행하고 있는 존재일 것이다.

마치 외지인처럼 작품 속 풍경에 관여하지 않은 체 말이다.


작가는 대체로 다른 직업보다는 여행을 자주 다니는 편이지만, 우리들의 정신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자신이 창조한 세계로 다녀오는 여행이다. 그 토끼굴 속으로 뛰어들면 시간이 다르게 흐르며, 주인공의 운명을 뒤흔드는 격심한 시련과 갈등이 전개되고 있어 현실의 여행지보다 훨씬 드라마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