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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접하게 된/영화

옥자

by 심심한 똘이장군 2020. 3. 8.

옥자야

 

옥자라는 영화를 누군가는 육식에 대한 반대를,

누군가는 끔찍한 도축장속 세상은 자본이 독식하는 생태계를 상징하고, 공장형 축산업에 대해 통렬한 비판과 함께 폭력과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을

목적으로 하는 영화라고도 한다.



영화는 ‘옥자’라는 슈퍼돼지와 ‘미자’라는 한 소녀가 메인되어 이야기가 펼쳐진다.

이 둘은 자본주의(좋은 물건을 값싸게 공급하면 현명한 소비자가 돈을 주고 사간다)가 무엇인지,

대량생산체제가 무엇인지에 대한 개념자체가 전혀 없는 주인공들이다.

주어진 환경에서 평화롭게 고민없이 살고 있던 이들이 마주치는 자본주의는 악한 모습으로만 비쳐질 것이다.

 

강원도의 어느 산골에서 시작해

(자본주의 세계와는 전혀 상관없이 돌아갈 것 같은 산골 (인류의 시작과 함께 독립적 생존의 시기)에서)

자본주의 국가의 수도인 서울의 지하상가를 거쳐

(공산주의(북한)와 자본주의(대한민국)의 경쟁 속에서 자본주의의 승리의 시대를)

자본주의의 심장이라고 할 수 있는 뉴욕으로 이동하는 과정은

(자본흐름(월스트리트 등)의 최고 위치를 상징하는 뉴욕)

일면 자본주의의 전형적인 모습과 발전상을 보여주는 도구들로 비춰진다.


그러기에 영화속 거대 기업과 이에 저항하는 ALF의 모습은 자본주의와 반자본주의의 모습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옥자’에 대해 끔찍한 동물사랑을 보여줬던 ‘미자’가 거리낌없이 백숙을 먹는 것은 자본주의 이전 수렵시기의 모습으로 강원도가 설정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라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영화의 흐름이 그저 자본주의와 반자본주의 대립적 모습을 전해주고자 하는 것일까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든다.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라면 자본을 제일의 목적으로 운영하는 기업과 그에 종사하는 사람에 대항하는 ALF의 모습은 무정부주의나 공산주의 형태여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들이 행사하는 폭력이 혁명적 저항의 모습으로 해석되지도 않는다.

그저 자본주의 체제의 유지라는 틀 내에서 양심적인 자본주의의 모습을 일부 회복하고자 하는 모습으로만 비칠뿐이다.

(누군가는 그들의 폭력적 모습이 동물에 대한 폭력을 사람에 대한 폭력으로 바꾼 것이기에 선과 악의 대결로 영화를 구분짓기 어렵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한다)

 

감독은 오히려

이렇게 나쁜 면들을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그것들을 인식하게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은 (질좋고 값싼) 고기를 먹게 될 것이고,

대량생산체제와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그에 저항하지만,

그 속에서 삶의 만족감을 찾을 것이기에

자본주의 속 일반인의 삶은 부조리속의 조화를 찾는 것일 뿐이라고 역설하는 것은 아닐까?



자본주의 시스템을 거부하며 옥자를 탈출시키려 하지만,

결국 마지막에 옥자를 살리는 것은 힘과 권력, 저항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주요 시스템인 ‘수요와 공급’에 의한 거래(옥자와 금의 교환)이니 말이다.

(자본주의 기축통화를 달러라고 하지만 자본주의 발달의 근본 교환매개체는 금으로부터 출발했다)

 

내가 옥자를 살래요.

산채로

 

영화는 자본주의에 대한 저항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개선에 대한 이야기라고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