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친구, 성주의 적극적인 추천과 함께 선물받은 책.
"전복과 반전의 순간"
음악사의 역사적 순간과 그 이면을
강헌이 풀어주는 책.
누군가에게 책을 선물하기도 오래
누군가로부터 책을 선물받기도 오래되었던 거 같다.
20세기 이후
인간의 일상에
음악이
개입하지 않는
순간은
거의 없다
는 강헌의 말처럼
우리의 일상은 음악에 둘려쌓여 있고,
음악을 통해 우리의 생각들을 풀어내기도 하고,
시대의 정신을 반영시키고자 하기도 한다.
어떤 순간, 어떤 공간에도 음악은 유령처럼 존재하며,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에 깊은 흔적을 남긴다.
음악은 주체의 의지와 상관없이 수용하다는 점에서
시장의 지표만으로는 환산할 수 없는 파괴력을 지닌다.
절대자의 초월적 '신탁'이라는 베일
서구 엘리트주의의 산물인 '천재주의'라는 베일
음반 산업의 이윤동기가 창조해낸 '스타덤'이라는 환호의 베일
그렇지만 음악은 여전히 수많은 역사적 생산물 중의 하나이며,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조건에 의해 생성되는 예술적 욕망의 결과물일 뿐이다.
우리가 체제의 반항아로서 음악사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로큰롤
역시나 왜, 우리가 이런 인식을 하게 되었는지,
그 뿌리를 밝혀주는 첫 파트
재즈와 로큰롤,
노예의 후손인 하층계금 아프리칸 아메리칸과
한 번도 독자적인 자신의 문화를 갖지 못했던 10대들이
인류 역사상 최초로 문화적 권력을 장악한 혁명이었다.
재즈의 어원을 무엇일까?
그런데 재즈의 정확한 어원은 밝혀진게 없다고 한다. 신기하게도....
"Jass it up(아, 꼴려!)" 라는 남부 미시시피 강 유역 흑인들의 은어에서 왔다는 설
"자이브 에스(Jive ass 흑인 창녀의 매춘행위)" 에서 왔다는 설
"찰스"라는 이름이 재즈로 변형되었다는 설까지... (어이 없지만서도)
사실 재즈의 어원에 대한 명확치 않은 설에도 불구하고,
재즈는 시작되었고 발전을 거듭했다.
앵글로색슨계 동네의 흑인노예들이 인종적 차별성으로 인해,
흑인 여자 노예들을 건드리지 않았던 반면
프랑스계 사람들은 흑인 노예 여성들을 수시로 범했고,
그 결과 프랑스계 백인 남자와 흑인 노예 여자 사이에는 크레올이라는 혼혈아들이 태어나게 되었다.
프랑스계 백인들은 크레올에게
초등교육 수준의 기초적인 교육과 함께 서비스업종에서 일하게 해 주었다
이렇게 백인들로부터 교습을 받고,
백인들의 악기(트럼펫, 색소폰)로 연주했지만
이렇게 악기를 접한 크레올들의 후예가 결국 20세기에 이르러 재즈를 탄생시켰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의 래그타임을 재즈의 전신으로 보는 이론들이 많은데,
이 이론대로라면
결국 재즈는 백인들의 피아노 연주음악에서 출발하여 백인과 흑인들로 반쯤 섞인 크레올들을 거쳐서
오리지널 흑인들에게서 탄생하는 진화의 과정을 겪은 셈이다
스토리빌의 유흥가에서
바의 악대들은 바까지 온 젊은 남성들로 하여금 그곳의 매춘부들과 마지막까지 함께할 마음이 들도록
분위기를 이끌어내는 음악을 연주해야 했고,
그것이 바로 재즈였다.
한마디로 살아남기 위한 서바이벌 뮤직이 바로 재즈였다
음악사의
또다른
전복과 반전의 순간은
인류의 역사
어디쯤에서
어떤 모습으로
등장하게 될
것인가
블루스와 가스펠이 똑같은 근원적 장르라는 설명은 새롭다
블루스는 글자 그대로 슬픈 것의 복수형이다. 희망, 애끓는 사랑 등 세속적인 욕망이 담겨 있다
흑인들이 기독교라는 종교를 받아들여, 교회를 만들어서 성서를 해석하고 종교를 통해 위안을 받았다
그러면서 만든 노래가 가스펠(gospel. 신의 글자 God spell) 이다.
가스펠과 블루스의 차이라면
세속적인 욕망을 담은 노래가 블루스
신의 은총과 구원의 소망을 담은 노래가 가스펠!!!
재즈. 블루스와 함께 하는 용어 '빅 밴드'
앰프나 스피커 시스템들이 없었던 시절,
대도시의 넓디 넓은 클럽 홀의 공간을 울리는 소리를 내기 위해서
색소폰 여섯 명, 트럼펫 네 명, 이런 식으로 17인조에서 23인조 정도 규모의 재즈 오케스트라 악단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이런한 대규모 밴드를 '빅 밴드'라고 부르게 된다.
그리고 새로운 젊음의 문화를 상징하는 '로큰롤'
어떻게 로큰롤은 젊음이의 대표적 아이콘이 되었을까?
1955년 로큰롤은 인류문화사상 단 한 번도 무너지지 않았던 '룰'을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로큰롤이 무너뜨린 것은 바로 '어른들의 세계'
1955년이 될 때까지 인류가 존재하면 나타났던 모든 문화는
그것이 양반, 귀족의 문화이든
피지배계급의 문화이든
파푸아뉴기니의 문화이든
이집트 왕조 시대의 문화이든 상관없이
'어른들의 문화'였다.
즉 아이들은 그저 부모들이 누리는 문화를 모방하고 학습하면서 어른이 되어 갈 뿐이었다.
이러한 아이들이 자신들의 출구전략을 선택했으니 그것이 바로 '문화'
문화를 통해서 기성세대인 선생과 부모들에 대해 복수할 것을 꿈꾸고 실행한 것이
비백인적 행동, 바로 음탕한 흑인의 밑바닥 문화인 '리듬앤블루스'를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것이 로큰롤
리듬앤블루스에 제일 많이 나오는 음탕한 네 개의 동사인
rock, roll, shake, rattle 중 두 개의 단어로 이루어진
'록큰롤'
흑인 은어로 남녀 간의 성교를 의미하는 것으로, 단순히 바위가 구르다를 의미가 아니다.
그러니 그 자체부터가 얼마나 기성세대를 부정하고 있는지 알만하다.
그것도 백인의 음악으로서...
재즈는 아프리칸 아메리칸이라는 인종적으로, 계층적으로, 최하위 계급의 문화가
처음으로 문화의 주류로 진입한 사건이다.
로큰롤은 이전까지 아무런 문화적 권력을 소유하지 못했던 10대라는 마이너리터들이 문화의 주인이 된 사건이다.
마이너리티들의 정치적 혁명은 1789년 이후 성공하지 못하고 실패를 거듭해 왔지만,
문화의 영역에서 기성세대를 깨트린 첫 번째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1950년대 미국에서 로큰롤 혁명이 있었다면 1960년대 말 가난한 대한민국의 대학 캠퍼스에서는
통기타 혁명이라는 새로운 바람이 최초의 청년문화를 일군다.
통기타 음악은 순식간에 주류 음악 시장을 점령했지만 박정희 군부 정권은 이 청년문화를문화적 적대자로 규정했고,
이 젊은이들의 목소리는 제4공화국의 한낮에 처형되었다.
1960년에서 1970년대까지 한국 역사상 최초로 새로운 문화적 세대혁명인 '청년문화'가 일어났다.
통기타 음악, 포크 음악이라고 부르는 새로운 음악이 핵심이었던 청년문화는
다른 한 축으로서 '그룹사운드'의 시대를 함께 하기도 했다.
통기타 음악과 그룹사운드 음악, 이 두 개의 음악이 기존 어른들의 문화와 대결을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통기타 혁명은
정치적이고, 경제적이며, 문화적인 수많은 요인들이 영향을 미쳤고
이를 바탕으로 1980년대 이르러 하이틴 발라드 문화가 주류를 장악하게 된다
이후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아이돌 그룹이 중심인 본격적인 10대 음악 문화가 성립되게 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과정속에서 세대혁명의 최초의 음악 언어인 한국 포크 음악과 록 음악은 주변의 장르로 밀려나게 된다
1980년대 10대 여고생들이 조용필, 이문세, 변진섭 등을 스타로 만든 이유를 재미있게 설명한 장면.
ㅋㅋ
자신들의 문화적 수용행위가 결코 자신들의 성적 정체성을 폭로하는 것으로 작용되어서는 안되기에
비주얼이 별로인 발라드 가수를 스타로 만들게 되었다는....
난 이 부분에 대해서는 동의할 수 없는 이야기...
남자들이 그들을 좋아했던 건?
음악적 소양에 대한 이야기를 배제한 주장이라서 동의할 수 없다
20세기 말 이후 청년 엘리트들은 살인적인 생존경쟁에 휘말려
더 이상 문화적 대안에 대한 희망을 포기한 것으로 보인다.
청년세대의 위축, 대학의 정신적 황폐화의 결과라고 할 수 있겠다.
매스미디어가 주도하는 신자유주의적인 주류문화에 무장해제되고 흡수합병됨으로써
자본의 이윤동기만이 궁극적인 목적이 되는 문화로 퇴색하게 된다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는
음악적 신동이 아니라
빈의 궁전 한가운데서 시민 예술가를 꿈꾼 몽상가였고,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악성이 아니라
오선지 위에서 공화주의의 이상을 구현하고자 했던
현실주의자였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음악사적인 작품들의 이면들...
정말 새로운 시각에 깜짝 놀라게 된다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
빈에서 자유예술가로서의 끔을 가졌고, 성공하는 듯 했지만
모차르트는 이율배반적이었다
그는 자유예술가로서의 꿈을 가졌지만 자신을 억압하는 귀족 사회를 부정하지 않았다.
자신이 그 사회에서 동등한 대우를 받기를 원했다
그러면서도 막상 교황이 자기에게 준 '폰'이라는 기사작위를 사용하지 않았다.
작위도 궂이 쓰지 않고,
귀족들의 면전에 그들을 조롱하는 내용의 오페라를 발표할 정도였으면서도,
당시의 사회질서를 부정하지도 않는다.
모차르트에게 계몽주의에 대한 인문학적 이해가 있었더라면
자기의 희망이 궁정 사회에서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수 있었을 텐데
그에게는 자신의 상황을 규범화시킬 이념이 없었다.
귀족 중심의 사회에서 자신의 존재가 어떤 의미인지,
자신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자신을 정립할 이념의 부재.
모차르트의 삶은 '투쟁'이 되지 못하고 '투정'일 뿐이다.
고전주의의 완성자이자 낭만주의의 시발자인 베토벤
그가 일상적으로 가장 중요시했던 작업은 빈 인근의 농촌 지대를 돌면서 했던 민요 수집이었다
민중들의 멜로디를 주목하고 그것을 추적하고,
그 민요들을 자신의 기악 작품속에 끌어들여서 승화시켰다.
베토벤의 시대에는 시민계급이라는 새로운 청중이 등장했고,
귀족의 후원을 받지 않아도
공개 연주회를 통해서, 악보 출판을 통해서
자유로운 자신의 표현을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시대였다.
하지만 반대로, 그는 평생을 궁정악장이 되기를 꿈꾸었다.
그리고 그 꿈은 평생 이룰 수 없는 희망사항이 되었을 뿐이다.
한국의 대중음악사는
'현해탄의 동반자살'이라는 충격적인
센세이셔널리즘과 함껙 극적으로 개막한다.
<사의 참미> 신드롬의 배후엔
일본 제국주의 음악 자본의 음모가 똬리를 틀고 있었다.
이 신드롬을 징검다리로 하여
일본의 엔카 문화는 1935년 <목포의 눈물>을 통해
한반도 상륙을 완료했으며
엔카의 한국 버전인 트로트는 최초의 주류 장르로 등극한다.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충격보다 더 충격적인
역사의 이면,
음악사적 이면
동학농민운동의 전봉준이 체포되고 난 뒤
'새야 새야 파랑새야'라는 노래가 전국적으로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다.
이 노래가 '민속음악'의 시대와 새로운 '대중음악의 시대'를 가르는 경계선의 문지방을 밟고 있다.
'사의 찬미'라는 전대미문의 곡이 (이면이야 어찌 되었든)
전국적으로 히트를 치던 1926년 10월 1일
춘사 나운규의 '아리랑'이 엄청나게 많은 관객을 끌어모음으로써 한국 영화 시장의 시대가 열린다
이로서 대중문화에서 가장 중요하고 상징적인 쌍두마차라고 할 수 있는
대중음악과 영화가 1926년 폭발하면서 대중문화의 시장이 열린 것이다.
그런데 음악사적으로 중요한
'사의 찬미'의 등장과 대유행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했다는 무서움 음모론
음반 시장이 만들어지려면 어떤 조건이 있어야 할까?
음반은 소프트웨어다.
음반만 가지고는 시장 형성이 안된다
레코드판 한 장 가격이 쌀 한 섬 가격이었던 그 시기
값비싼 소프트웨어인 레코드판을 즐기려면
소프트웨어보다 훨씬 더 비싼 하드웨어가 전제되어야 한다.
즉 레코드판을 틀 수 있는 유성기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당시 축음기 회사는 일본의 독점적인 국영기업이었다.
한 여자와 한 남자의 죽음으로,
일본의 국가독점자본은 자신들의 미개한 식민지에
오디오 산업과 음반 산업을 동시에 열었다는 것이고,
그 레코드 회의사의 모회사이자 더 큰 이득을 본 일본 축음기 회사는 일본 국가의 회사였다.
이들의 죽음으로 가장 이익을 본 것은 일본 제국주의 정부인 셈이다
한국 근대음악, 죽음의 센세이션널리즘으로 열리다
한국 음악 문화의 근대가 '사의 찬미'로 인해 '죽음'이라는 자극적인 센세이셔널리즘,
음악 내부의 논리가 아닌, 음악 바깥의 쇼킹한 스캔들에 의해서 열렸다.
또한 그 쇼크 속에서 우리가 한 번도 검증해본 적 없는 서양음악이라는 텍스트가 무혈입성했다
서양음악의 문법에 대해 우리 식으로 짚어 볼 틈도 없이 얼떨결에 받아들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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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쯤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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