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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접하게 된/책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by 심심한 똘이장군 2017. 2. 25.

헝가리 작가의 책은 이번이 처음으로 기억된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소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원래는 작가가 오 년여에 걸쳐 쓴 각각의 소설 ‘커다란 노트’, ‘증거’, ‘세번째 거짓말’을 ‘비밀노트’, ‘타인의 증거’, ‘50년 간의 고독’ 으로 바꾸고 이를 합쳐서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라는 제목의 한 권의 책으로 만들었다.

이 책은 1부와 2부, 3부가 연결되어진 듯, 연결되어지지 않은 듯한 흐름을 보여준다.

실제와 상상의 세계가,

현실과 문학의 세계가

혼돈의 세계를 이루는 이야기

읽다보면 어디까지가 현실의 실제인지

어디까지가 상상의 문학세계인지 혼돈이 된다.

루카스는 실제하는 존재인지

클라우스는 실제하는 존재인지

아니면 루카스와 클라우스 둘다 실제하는 것인지, 아니면 상상의 존재인지

혼란스럽다


존재의 세가지8972915742_f.jpg


1부 ‘비밀노트’

헝가리 국경 소도시라는 공간에서의 9살 난 쌍둥이 형제 “클라우스와 루카스”의 이야기

전쟁이라는 시대상황 속에서 남편을 독살한 마녀로 불리는 ‘할머니’에게 맡겨진 둘.

전쟁의 참혹함, 할머니의 가혹함, 폭력 들 속에서 쌍둥이는 삶의 비참과 잔인함을 겪게 된다. 그리고 둘은 스스로 이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들을 단련해 나간다.

그 과정에서는 그들은 비밀노트를 작성해 나간다. 후에 그들이 소설과 시를 쓰게 되는 바탕이 되는...

“잘했음과 잘못했음을 결정하는 데에는 아주 간단한 기준이 있다. 그 작문이 진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 우리가 ‘당번병은 친절하다’라고 쓴다면,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당번병이 우리가 모르는 심술궂은 면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렇게만 써야한다. ‘당번병은 우리에게 모포를 가져다주었다.”

자신들이 보고 경험한 진실만을 쓰겠다는 그들의 약속은

또한 현실을 상상의 세계로 믿게 되는 단초가 되기도 한다.

개와 수간을 하는 장면, 남자들의 성노리개가 되는 여성들, 동성애자, 살인의 장면들.

전쟁의, 일상의 잔혹함을 써내려 가는 것이 너무나 일상적이고 평범하다.

선행과 악행을 구분하는 것이 모호하다. 심지어 이를 구분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형 클라우스(Klaus)와 동생 루카스(Lucas)의 이별로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내가 당한 몸의 상처는 중요하지 않아. 하지만 내가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해야 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내게는 참을 수 없는 상처가 될거야."




2부 ‘타인의 증거’

홀로 할머니 집에 남은 루카스의 사랑과 이별이야기.

‘타인의 증거’는 ‘비밀노트’보다는 덜 하지만 충격적이고 낯섬은 여전하다.

세상의 일반적인 선악의 관점과는 다른 루카스 생활방식.

다른 누군가에세 피해를 줄 생각을 가지지는 않지만,

자신의 생각이 맞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누구의 이야기도 듣지 않고 생활한다

(마티아스와의 관계, 야스민과의 관계, 클라라와의 관계, 그리고 살인)

반면 자신의 틀에 어긋나는 것들에 대해서는 아무 거리낌없이 살인도 저지른다.


"진정으로 원하는 일이라면, 언제 어디서든 시도할 수 있네. 아이는 핑계일 뿐이지"




3부 ‘50년간의 고독’

가장 충격적인 반전은 3부에 숨어있다.

실제라고 여겼던 1부와 2부의 이야기들을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세계로 돌려버린다.

이러한 전환은 사실 3부의 중간까지 이 책을 읽는 나를 혼란에 빠뜨렸다.

앞의 내용을 중간중간 다시 확인해 봐야 하는 상태였으니까.

그리고 실제를 상상으로 세계로 전환시키는 과정에서

1부와 2부에서 언급하지 않았던 루카스와 클라우스의 숨겨진 삶들이 펼쳐진다.

그런데 실제가 상상으로 전환되는 반전의 와중에,

중반이후 비현실의 세계는 다시한번 존재의 실제를 드러낸다.

누군가는 3부에서 1,2부의 이야기가 실제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썼다고 하지만,

나는 1, 2부의 이야기를 실제하던 것을 부정하고 싶던 클라우스가

결국은 현실을 인정하는 삶의 과정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시를 쓰는 클라우스는

마찬가지로 글을 쓰던 루카스을 부정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작가정신의 한 단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무엇을 쓸 수 있었겠는가? 내 생활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결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내 주변을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쓸 거리라고는 전혀 없었다. 누나는 끊임없이 나를 방해하고, 온갖 구실을 붙여서 내 방을 들락거리고, 누나는 내게 차를 날라다주고, 가구를 닦아주고, 내 장롱 안의 내 옷들을 정리해주었다. 누나는 내가 글을 얼마나 썼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내 어깨 너머로 넘겨다보곤 했다. 그래서 나는 종이를 자꾸 메워나가야 했다. 나는 무엇을 써야 할지 몰랐기 때문에, 아무 책이나 닥치는 대로 베껴놓았다. 가끔씩 누나는 내 어깨 너머로 그 문장들을 한두 장 읽어보고는 멋진 문장이라고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나를 격려했다.”

비로소 자기를 결박하는 누나를 살인함으로써 글을 쓸수 있었던 누군가처럼 현실을 부정해야만 자신의 작품세상을 완성할 수 있는 클라우스의 모습은,

 

작가 본인의 모습은 아니었을까?


"잊어버리게. 인생은 그런 거야. 모든 게 시간이 지나면 지워지게 마련이지. 기억은 희미해지고, 고통은 줄어들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