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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접하게 된/책

코끼리의 무덤은 없다 - 조디 피코

by 심심한 똘이장군 2018. 10. 16.

소설에는 적지않은 사람들이 등장한다.

13살 소녀 제나

제나의 엄마인 엘리스

심령술사인 세레니티“,

앨리스 실종사건의 담당형사였떤 버질

제나의 아버지인 토마스

토마스, 엘리스와 함께 코끼리 보호소에서 일했던 기드온 카트라이트“, ”그레이스“, ”네비

그리고 이러저러한 사람들

 

그렇지만 이야기는 제나, 세레니티, 버질, 그리고 엘리스의 시각에서 각각 진행된다.

각각의 이야기는 가느다란 실처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 이야기는 종반으로 갈수록 굵은 실타래가 되어간다.

그리고 생각하지 못했던 방향으로 이야기는 결말이 난다

극적인 반전이 없는 영화 식스센스를 상상할 수 없는 것처럼

500 페이지가 넘는 이야기는 마지막에 다가서서야 등장인물 각자의 행동, 각자의 말에 대한 의미를 이해하게 된다.

그리고 반전의 묘미를 선사한다.

    



이야기의 구조는 식스센스의 이미지를 떠오르게 할 수 밖에 없다.



죽은 자의 혼령이나는 소재, 죽은 자와 산 자의 관계,

삶의 공간의 죽은 자의 존재가 항상 함께 하고 있다는 내용들은 영화의 소설판이라는 착각이 들 정도다.



제나는 엄마를 잃었다. 나는 신뢰를 잃었다. 버질은 신념을 잃었다.

우리 세 사람은 잃어버린 조각들을 가지고 있었다.




버림받은 경험이 있는 사람은 그런 일이 또 일어날 거라고 예상한다. 그래서 그 사람이 당신한테 중요한 존재가 되기 전에 가까워지는 걸 멈춘다. 그래야만 그 사람이 당신의 세계를 이탈해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엄마를 잃은 소녀를 도와주는 심령술사, 전직 형사의 이야기는 현 시점의 이야기지만,



그 순간 나는, 그 애가 날 찾을 인연이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내가 그 애의 엄마를 찾게 될 거라는 것도.


그들이 찾고 있는 것은 과거 시점의 사건에 대한 이야기이다.



하지만 이야기는 단순히 죽은 자와 산 자 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코끼리라는 매개체를 통하고 있다.

그래서 코끼리의 습성에 대한, 죽음을 대하는 자세에 대한 설명들이 디테일하게 되어 있다.

그리고 코끼리의 감수성과 기억력, 인지력은 인간의 그것보다 뛰어나기도 하다.





코끼리들이 죽음을 이해한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물론 우리 인간들처럼 죽음을 준비하지는 않을지 모른다. 인간의 종교 교리에 등장하는 정교한 사후 세계 같은 내세를 상상하지도 않을지 모른다. 코끼리들에게는 슬픔이 더 단순하고 더 명쾌하다. 상실이 전부다.

 

코끼리들은 다른 동물들의 뼈에는 별 관심이 없고 자기네 코끼리들 뼈에만 관심을 보인다. 코끼리들은 오래전 죽은 동료 코끼리의 시신, 하이에나가 뜯어먹고 남긴 유해와 뼛조각들을 발견하면 서로 모여들고 긴장한다. 그 시체에 떼로 다가가 뼈를 어루만지는데, 꼭 경의를 표하는 것 같다



수년이 흘러 그녀의 유골이 바래지고 흩어지고 거대한 두개골이 메마른 강기슭 굽이진 데 박힐 즈음에야 무리도 그곳을 지날 때 으레 하던 짧은 묵념을 그만두었다. 최근 두개골을 구별하지 못한다면 어느 두개골이 자신의 어미인지는 중요하지 않다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모든 어미가 중요하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그의 말은 코끼리들도 생각하고 느끼고 원한을 품고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 모든 것이 이곳에서 내가 조롱당하는 믿음과 위험할 정도로 흡사했다,




코끼리 무리에서 새끼를 기르는 방식을 일컫는 말은 알로마더링인데, ‘온 마을이 나선다는 뜻의 신조어다. 알로마더링을 통해 젊은 암코끼리들은 새끼를 어떻게 돌보고 보호해야 하는지, 새끼가 위험에 빠지지 않고 탐험할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어떻게 마련해야 하는지도 배울 수 있다.

그래서 이론상으로 코끼리들은 많은 엄마를 두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새끼와 친엄마 간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특별하고도 침범할 수 없는 끈끈함이 있다.

야생에서 두 살 이하의 새끼는 어미가 없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야생에서 어미의 역할은 어미가 되기 위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딸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야생에서 어미와 딸은 누구 하나가 죽을 때까지 함께 지낸다.




엄마라면 돌봐야 할 누군가가 있게 마련이다.




나는 코끼리 역을 맡고 있었던 반면, 마우라는 죽은 아들에 대한 애도를 그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인간적으로 행동하고 있었다. 야생에서 코끼리들의 애도와 관련해 가장 놀라운 사실 중 하나는 슬퍼할 마늠 슬퍼하다 어느 순간 탁 높을 줄 아는 능력이다. 인간들은 그렇게 할 수 없는 것 같다. 우리는 내세가 무엇이든 그곳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날 거라고 기대한다. 코끼리들은 현세의 기억만 가질 뿐 그런 희망은 갖지 않는다. 어쩌면 그래서 코끼리들이 다음으로 넘어가기가 더 쉬운 건지 모른다.




기억은 비디오 녹화와는 다르다. 기억은 주관적이다. 일어난 일을 문화적인 맥락에 따라 기억한다. 얼마나 정확한지는 중요하지 않다.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느냐가 중요하다.


사람의 기억은 주관적이다.

아무리 객관화 하려고 한다 하지만, 나에게 의미있는 것들, 내가 기억하고 싶은 것들 중심으로만 기억을 편집한다.

그러기에 더 객관적인 진실들을 놓쳐버리는 경우들이 많다.





나는 용서와 망각이 서로 배타적이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 소설 또한 마찬가지다.

기억의 상실 속에서 무엇이 진실인가는 안개 속에 위치해 있다.

기억의 상실이 의도한 것인지? 망각에 의한 것인지? 알수 없다.

그리고 누가 용서할 사람이고, 누가 용서받아야 할 사람인지 혼란스럽다.

그러나 누군가의 기억에는 존재하고 있다.




아이들은 볼 수 없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이 가진 또 하나의 문제가 이것이다.

아이 앞에서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는다는 것

 



상처 받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는 사람들을 상처 주고 있었다. 그리고 자제를 할 수 있을 만큼 강인하지도 못했다.



다소 지루할 수도 있는 분량(5백 페이지가 훌쩍 넘는, 그 안에서도 1부와 2부로 구분된다)의 이야기는 종반에 충격적 반전으로 흥분을 이끌어낸다.

어쩌면 실망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식스센스급 까지는 아니어도 적절한 반전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혼령과 유령 사이에는 분명한 경계가 있다고 생각해왔다. 혼령은 존재의 다른 차원으로 순조롭게 입성하는 반면, 유령은 이승에 정박해 있을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전에 만난 유령들은 완고했다. 때로는 자신들이 죽었다는 사실도 깨닫지 못했다. 그런 혼령들은 자기네집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소리가 들리면 그 사람들이 귀신이라고 추정하곤 했다. 유령들은 갇혀 있는 존재들이어서 나는 그들을 자유롭게 해주겠다고 자청했다.

하지만 그때는 그들이 무엇인지 알아볼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이제까지 나는 혼령과 유령 사이에는 분명한 경계가 있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죽은 자와 산 자의 간격이 얼마나 좁은지는 미처 모르고 있었다.


실제라 믿었던 기억이 한낮 거짓들의 편집된 사건들일 수 있지만,

이 전의 이야기 하나하나는 진실을 향한 발판이었다.

그리고 각 이야기들 속에는 진실의 힌트들이 살짝살짝 숨겨져 있었다.

열성적으로 활동했던 제나“, ”버질이 실은 죽은 자였다는 사실과 죽은 줄 알았던 엘리스가 실제는 살아 있다는 사실.

그리고 죽은 자와 산 자들이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이 모든 이야기들이 심령술사 세레니티를 통해 죽은 자와 산 자가 대화를 하고 서로에게 다가가는 과정이 밝혀지면서 이야기는 종결이 된다.

    



사랑했지만 떠난 사람을 생각하고 있다면 당신은 이미 그와 함께 있는 것이다.


떠난 사람과 남은 사람의 사랑이 사라지지 않음을 말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