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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접하게 된/책

개 - 김훈

by 심심한 똘이장군 2022. 3. 24.

컹컹컹,

멍멍멍,

우~우~우~

여러가지의 개 짖는 소리,

우리는 개 짖는 소리의 의미를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개소리에도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저 눈치 밝은 사람들만이 몇 가지 행동과 소리의 고저장단에 의해 그 의미를 유추해 볼 뿐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반면 개들은(소설 속 '보리'는 말이다) 사람의 말을 알아듣는다.

대다수의  눈치 밝은 개들은 개들의 소리에 반응하고 행동한다.

 

김훈의 '개'는 사람보다도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개의 이야기이다.

태어남과 함께 세상을 알아감과 언젠가는 죽음에 이르게 될 길이 뻔한 이별에 대한 이야기이다.

 

개의 눈으로 바라본 사람의 세상은,

개의 눈으로 바라본 개의 세상과도 틀리지 않다.


우리 엄마한테는 슬픈 이야기가 많다. 엄마 젖꼭지를 물고 있을 때, 그 한정 없는 따스함과 편안함 속에도 슬픔은 있었다. 그 행복과 곧 헤어져야 한다는 슬픔은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처럼 완벽한 평화 속에는 본래 슬픔이 섞여 있는 모양이었다.


태어남은 죽음과 연결되어 있다.

행복 또한 슬픔과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반대되는 개념으로서가 아니라 연결되는 개념으로서 존재한다.

삶이라는 건 그 연결의 개념을 배우는 과정이고, 배움의 끝에는 결국 죽음이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싸움은 슬프고 외롭지만, 이 세상에는 피할 수 없는 싸움이 있다. 자라서 다 큰 개가 되면 그걸 알게 된다.

피할 수 없는 싸움은 끝내 피할 수 없다.


피할 수 없는 싸움은 결국 싸움으로 귀결되듯,

피할 수 없는 운명은 그 운명에 부딪힐 수 밖에 없다.


사람들은 개처럼 저 혼자의 몸으로 세상과 맞부딪치면서, 앞다리와 뒷다리와 벌름거리는 콧구멍의 힘만으로는 살아가지를 못한다.

나는 좀 더 자라서 알았다.

그것이 사람들의 아름다움이고 사람들의 불쌍함이고 모든 슬픔의 뿌리라는 것을.



사람들은 결국 이런 식으로 죽음을 인정하는 모양이었다.

인정이라기보다는, 그렇게 술을 따르고 절을 함으로써 인정할 수 없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 자기네들을 스스로 위로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땅속에 묻힌 주인님이 무덤 앞에 차려진 소주와 과일을 먹으려고 흙을 털고 걸어 나오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인정할 수 없지만 피할 수 없고,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죽음처럼,

그리고 피할 수 없는 이별도 다가온다.

 

하지만 이별과 죽음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누군가의 삶들은 계속되어질 것이다.

지금까지 지내왔던 것처럼, 지금까지 함께 했던 것처럼.

그것또한 세상의 본래처럼 피할 수 없는 것이기에...


내 마지막 날들은 며칠 남지 않았다.

할머니가 떠나면 나는 어디론가 가야 할 것이다. 어디로 가든 거기에는 산골짜기와 들판, 강물과 바다, 비 오는 날과 눈 오는 날, 새벽안개와 저녁노을이 나에게 말을 걸어오고, 세상의 온갖 기척들로 내 콧구멍은 벌름거릴 터다.

거기서 나는 달리고 냄새 맡고 싸워야 한다. 어디로 가든 내 발바닥의 굳은살이 그 땅을 밟고, 나는 그 굳은살의 탄력으로 땅 위를 달릴 것이다.

그기고 거기에는 여전히 흰순이와 악돌이들이 살아 있을 것이다. 그 개들이 살아 있는 것은 이 세상의 본래 그러한 모습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개도 눈치가 있다.

개눈치에는 마음이 있다.

사람들이 사람의 마음을 모르고 눈치없는 행동을 하는 것은

그저 '지나가는 개가 웃을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