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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접하게 된/책

시선으로부터, -정세랑

by 심심한 똘이장군 2022. 2. 20.

박상영 소설가의 ‘내 생에 이토록 한국의 현대사를 정통으로 관통하는, 그러면서도 경쾌함과 꼿꼿함을 잃지 않는 인물을 본 적이 있었던가“는 서평이 있었지만,

한국전쟁, 하와이이민 생활, 독일 생활, 파리생활, 그리고 다시 한국 생활로 이어지는 심시선의 삶의 괘적은 우리 한국의 현대사를 지나가지만 관통한다기 보다는 훓고 지나가는 정도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오히려 소설의 전개는 심시선의 현대사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남은 자들이 어떻게 심시선의 삶을, 언어를, 글을 기억하는지,

그녀의 자녀와 손자, 손녀들의 삶이 그들이 기억하는 심시선과 어떻게 엮여져 있는가에 더 중점을 두고 있는 듯 하다.

 

시선의 글, 인터뷰로 시작되는 챕터들마다에는

명혜와 태호, 명은, 명준과 난정, 경아

화수(-상헌)와 지수, 우윤, 규림과 해림

과 시선의 삶이 연결되어 있다.

 

개성적이면서도 조화되는 그들의 삶은,

전쟁, 남성우월주의, 권력속에 숨겨진 폭력, 편견, 사회약자, 출산과 여성, 환경오염 등 등

깨어진 삶의 파편들이 버려지지 않은 채 독립적으로 남겨있으면서도 생채기를 남기지 않았던 시선의 삶을 하나씩 닮아있다.

 

처음에 책의 서두에 왜 이런 가계도가 있나 의문스러웠는데,

심시선과 그의 자녀, 손자/손녀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전개 특성상 많은 인물이 등장하다보니 도움이 된다.


문장의 아취가 비슷한 작가 없이 독특한 비결은

아마도 바닥에 떨어진 그릇처럼 깨져 있기 때문일 겁니다.

한국어, 어릴 때 배웠던 일본어, 영어, 독일어가 머릿속에서 다 섞였는데 조화롭게 섞이지 못하고 여기저기 골이 있습니다.

골과 절벽에 제 나름대로 흔들다리 같은 것으 걸어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균열에 땜질해서 쓰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독특하게 보일 뿐일 겁니다.

그럴 수 있지요.

사람들은 의외로 흠 없는 것만큼이나 완전히 파괴되었다 다시 이어붙인 것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니까요.


빚나는 재능들을 바로 곁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었다.

누군가는 유전적인 것이나 환경적인 것을, 또는 그 모든 걸 넘어서는 노력을 재능이라 부르지만 내가 지켜본 바로는 질리지 않는 것이 가장 대단한 재능인 것 같았다.

매일 똑같은 일을 하면서 질리지 않는 것.

수십 년 한 분야에 몸을 담으면서 흥미를 잃지 않는 것.

같은 주제에 수백수천 번씩 비슷한 듯 다른 각도로 접근하는 것.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이 들을 밀어주었으니까.

세상을 뜬 지 십 년이 지나서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의 조각이 우리 안에 있으니까.

시선으로부터 시작된 그들 각자의 삶은,

억압과 차별의 시선을 거부하고 싸우면 살았던 시선의 삶을 넘어

남의 시선따위에 억압되지 않는 삶을 살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