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일제의 강제병합이 있을 구한말 시기의 조선(대한제국)의 국민들은 나라의 운명만큼이나 삶의 등불이 위태롭게 흔들리고 있었다.
조선의 땅에서 살아남기 어렵다 조선의 국민들은,
중국으로 러시아로, 그리고 머나먼 미국땅 하와이로 옮겨가 새로우 삶을 살아가기를 희망했지만,
그곳에서의 그들은 나라없는 이방인에 불과했을 뿐이다.
그리고 1905년 1003명의 조선사람들은 미국 땅 아래 낯설기만 한 멕시코를 향해 간다.
자신이 속한 나라가 있는 서양배 속 서양인 선원들의 삶이 활기찬 반면, 그 배 속의 조선인은 사회적 의미나, 실용적 가치모두 담보할 수 없는 불안함만 존재할 뿐이었다.
줄무늬 셔츠를 입은 독일 선원들은 무심한 얼굴로 제 할 일들을 하고 있었다.
그들에겐 바다에서 삶을 시작하고 끝마치는 자들 특유의 냉소적 활력이 있었다.
자신이 하는 일의 사회적 의미 같은 것에는 아무 관심도 없으나
그것의 실용적 가치에는 거의 주술적이라 할 정도의 가치를 부여하고 언제나 힘차게 일했다.
조선이 망해가던 시기, 일본이 조선의 외교권을 빼앗고, 주권까지 빼앗아 갔던 그 처참하고 아팠던 나라만큼이나 조선의 땅에서는 더이상 희망을 찾을 수 없던 많은 이들은 말못 한 사연 속 막연한 희망을 품고 도착한 멕시코의 삶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물이 흔하고 지반이 단단한 땅에서 이주한 조선인들을 가장 먼저 괴롭힌 것은 바로 물의 부족이었다.
하늘과 땅, 그 사이를 강산(江山)이라 부르던 사람들이었다.
강과 산이 없는 세상을 그들은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유카탄엔 그 두 가지가 모두 없었다.
김영하의 2003년도 작품인 <검은 꽃>은 그렇게 강산이 없는 멕시코에 던져진 조선 이민자들이 삶을 이야기 한다.
90년대에 “애니깽‘이라는 영화의 말을 들어온 터이지만 그들의 삶이 직접화된 이야기는 처음 접한다.
그들이 일하던 에네켄 농장작업을 누군가는 꿈에서라도 나올까 봐 “어저귀” 라고도 했고, 누군가는 “애니깽”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의 후손들은 멕시코 이민 1세대인 그들을 “애니깽”이라고 한다.
작가는 그들의 삶에 소설적 희망을 남기지 않는다.
삶은 개척하려고도, 적응하려고도 하지만 결국 그들 앞에 남아 있는 건 나라없는 자들의 죽음뿐이었다.
조장윤과 같은 임오군란으로 해산된 구식군대 소속 군인들의 삶과 멕시코에서의 무관학교 운영.
보부상을 쫓아 다니던 고아 소년에서 멕시코 혁명군, 과테말라 혁명군에 참여하는 김이정의 삶
마지막 조선 궁궐 악사인 박옥선의 삶
도둑의 삶에서 멕시코 지주의 오른팔이 되었다 혁명군에 의해 죽게되는 최선길의 삶,
사제 서품을 받았던 신부에서 신내림을 받아야만 했던 박광수의 삶.
대한제국 황제 가문의 피붙이로 구원을 기다리다 끝내 쓸쓸히 죽음을 맞이하는 이종도.
그리고 권리를 가진 여성으로서의 삶을 꿑꾸지만 끝내 그렇지 못한 이연수....
멕시코의 삶에는 세상의 모든 왜곡과 현실이 펼쳐졌다.
미국과 그를 받치는 하위 국가로 연결되는 거대 자본의 횡포,
마야인과 조선인을 한 덩이로 묶어주는 토속신앙
궁중의 악사와 인천의 강신무와 산골의 상쇠가 유카탄의 황무지에서 전직 신부를 위해
피리를 불고 춤을 추고 장구를 쳤다.
고된 노동에 지친 여자들은 혈관을 따라 흐르는 친숙한 곡조와 어깨뼈에 새겨진 장단에 몸을 맡겼다.
삽시간에 움막 마당은 국적을 초월한 카니발적 광란에 휩싸였다.
천구교와 개신교간의 갈등과 고난외에는 구원을 주지 않는 신에 대한 미움
순간 바오로는 분명히 깨달았다.
그의 신은 정녕 질투하는 신이었다.
샤먼으로 비롯된 싸움에서 신은 어떤 권능도 보여주지 않았다.
조선과 일본과 멕시코가 각기 저지른 그 모든 죄악을 이들이 계속하고 있다는 것을 번연히 알면서,
신은 토라진 여자아이처럼 질투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라를 잃고 싶지 않았지만
나라 잃은 국민이 되어간 그들의 죽음마저도 온전하지 못한 현실
차라리 무국적은 어때? 이정은 고개를 저었다.
죽은 자는 무국적을 선택할 수 없어.
우리는 모두 어떤 국가의 국민으로 죽는 거야.
그러니 우리만의 나라가 필요해.
우리가 만든 나라의 국민으로 죽을 수는 없다 해도 적어도 일본인이나 중국인으로 죽지 않을 수는 있어.
국가를 만들고 국가에 속하기를 원하는 멕시코 이민 1세대 애니깽.
그러나 그들은 국가를 선택할 수도, 그렇다고 국가의 선택을 받지도 못한다.
언제부터 개인이 나라를 선택했지? 미안하지만 국가가 우리를 선택하는 거야.
그렇다면 국가를 영원히 사라지게 하면 어떨까?
모든 사람들이 국가의 테두리에서 벗어나는 꿈
그렇지만 그 혁명 또한 영원할 수 없다.
국가가 영원히 사라질 수 있을까?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혁명이 시작되고부터 이미 멕시코엔 국가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살육이 살육을 부른다.
힘을 가진 자들은 모두 멕시코시티로 진격한다.
그것이 곧 이 길고긴 혁명의 시작과 끝이다.
벌써 수십만이 죽었다.
이것은 국가 때문에 벌어진 일인가 아니면 국가가 없기 때문에 벌어진 일인가.
대한제국이 있었지만 우리는 행복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의 멕시코도 마찬가지다.
어디에서나 피비린내가 진동한다.
더 센 국가가, 일본이, 그리고 미국인, 약한 나라를 지배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내전을 지원한다.
국가야말로 만악의 근원이다.
그런데 국가는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가 대지주들, 저 카우디요들을 몰아내고 혁명을 완수하면 또다른 카우디요들이 정권을 잡을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하느냐? 쏘아 죽이는 수밖에 없다.
혁명을 지속하려면 그 수밖에 없다. 영원한 혁명, 바로 그것이다.
나라가 영속할 수 없는 것처럼.
사람이 영원할 수 없는 것처럼,
현실의 멕시코 속 조선인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퇴로를 찾고 삶의 길을 만들어고, 그 숫자만큼이나 많은 결말을 맺는다.
이 나라가 영속하기 어려울 것을 너무도 잘 알았기 때문이었다.
더위와 습기로 가득 찬 이 용광로 같은 밀림이 종내는 모든 것을 녹여버릴 것이 분명했다.
사람, 계약, 민족, 국가, 심지어 슬픔과 분노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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