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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접하게 된/책

공정하다는 착각 - 마이클 샌델

by 심심한 똘이장군 2022. 8. 11.

능력주의의 이상은 불평등을 치유하려 하지 않는다.

불평등을 정당화 하려 한다.

< 원제는 The Tyranny of Merit: What’s Become of the Common Good? (능력주의의 폭정: 무엇이 공공선인가?) >

 

저자는 묻는다.

"지금 서 있는 그 자리, 정말 당신의 능력 때문인가?"

 

최근 사회는 능력 만능주의에 빠져있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불평등에 대해 오랫동안 참아온 것은 누구나 노력하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었기 때문이겠지만)

좌냐 우냐, 진보냐 보수냐 상관없이 자신이 능력만 있다면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는 맹목적 신념이 민주주의 최고 가치인 것 마냥, 당연한 것인 것 마냥 인식하고 있다.

새정부도 "공정과 상식"이라는 화두로 창출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공정을 위해서는 개인의 능력에 의해 평가받아야 하는 시스템을 만들면 된다고 생각하는 듯 하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능력주의에 의한 성과(결과)는 온전히 개인의 노력에 바탕한 능력만이 반영되는 것일까?

어느 집안에서 태어나고, 어떤 혈연, 지연, 학연이 있는가에 따른 요인들을 개인의 능력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의도치 않은 행운들이 반영되는 것까지도 능력이라고 할 수 있을까?

어떠한 능력(운동, 공부 등)을 보다 더 가치있게 인정하는 사회에 태어났느냐에 따라 보상이 달라질 수 있음도 능력에 기인한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각 개인의 노력과 능력이 같다해도 시작의 출발점이 다른 상황에서의 결과물의 차이를 우리는 과연 능력주의가 제대로 실현된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샌델은 미국 명문대 입시에 있어 부자집안의 자녀들이 더 많이 합격한다는 사례를 들기도 한다.

그리고 왜 트럼프에 대해 덜 가지고, 덜 좋은 직업을 가지고 있는 백인들이 지지를 하고 있는 지에 대한 나름의 설명도 한다.

그런데 그런 상황은 놀랍도록 우리 사회와 똑 닮아 있다.

(우리가 미국식 제도들을 근간으로 하는 사회여서이기도 하겠지만)

심지어 정치, 경제, 사회 전반적인 인사들의 프로필을 보면, 부와 명예의 대물림이 더 강화되고 뚜렷함을 볼 수 있다.

그런 결과로 인해 사회는 더더욱이나 계층이동이 어렵게 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개천에서 용 나기가 더이상은 불가능한 사회라는 자조들이 여기저기 들리는 세상이니 말이다.

그러하기에 능력주의가 불평등을 정당화 하는 수단에 불과하다는 주장도 어느 정도 설득력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는 원칙적으로 모든 시민이 자신의 재능과 노력이 허용하는 한 성공할 수 있도록 기회의 평등을 이룩했노라"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해보자.

사회적 이동성이 완벽한 사회는 두 가지 점에서 이상적이다.

첫째, '자유'의 아이디어가 일정하게 충족된다. 우리 운명은 태어난 환경에 속박되지 않으며 우리 손에 달려 있다.

둘째, 우리가 성취한 것은 우리가 얻을 만한 것이라는 점에서 희망을 준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의 선택과 재능에 따라 뻗어갈 수 있다면, 성공한 사람은 성공할 만하니까 성공했다고 말하는 게 공정하리라.

그러나 그 강력한 매력에도 불구하고 비록 완벽하게 실현된 능력주의라 해도 정의로운 사회일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능력주의는 부자와 빈자의 차이가 벌어진다고 해서 문제가 있다고 여기지 않는다. 단지 부자의 자식과 빈자의 자식이 장기적으로, 능력에 근거하여 서로 자리를 바꿀 수 있어야 한다고 볼 뿐이다.

능력주의에서 중요한 건 '모두가 성공의 사다리를 오를 평등한 기회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사다리의 단과 단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는 문제가 안된다.

능력주의의 이상은 불평등을 치유하려 하지 않는다. 불평등을 정당화 하려 한다.

 

능력주의가 과도해지면서 능력과 도덕 판단력의 연결고리가 끊어지기 시작했다는 점에 주목한다.

능력으로 편을 가르고, 한 편이 성과를 독점하면서, 능력과 성과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계급이 생기고, 이를 세습화하기 위한 범법적 시도가 출현하고, 이를 독차지한 사람들의 오만이 극치를 이루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탈락한 사람들은 부의 상실만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자존심을 잃고 굴욕감을 갖게 되어, 이것이 심화되면서 사회적, 정치적 긴장을 유발하게 된다는 것이다. 포퓰리즘의 근원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관료적 능력주의는 계층이동 가능성을 감소하게 하고, 

포퓰리즘적 저항을 만들게 된다.

이런 과정에서 성공의 결과가 자신의 능력만으로 이룬 것이라는 승자의 오만과 패자는 자신이 못해서 잘못된 결과가 발생되었다는 패자의 패배의식, 자기연민을 이끌게 되는 "능력주의적 오만함"을 야기시키게 된다

 


능력주의적 오만은 승자들이 자기 성공을 지나치게 뻐기는 한편 그 버팀목이 된 우연과타고난 행운은 잊어버리는 경향을 반영한다.

정산에 오른 사람은 자신의 운명에 대한 자격이 있는 것이고, 바닥에 있는 사람 역시 그 운명을 겪을 만하다는 것이다.

이런 태도는 기술관료적 정치의 도덕적 자세이기도 하다.

우리가 가진 몫이 운의 결과라고 생각하면 보다 겸손해지게 된다.

그러나 완벽한 능력주의는 그런 감사의 마음을 제거한다.

또한 우리를 공동 운명체로 받아들이는 능력도 경감시킨다. 

우리의 재능과 행운이 우연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할 때 생기는 연대감을 약화시킨다.

그리하여 능력은 일종의 폭정 혹은 부정의한 통치를 조장하게 된다.


정치지도자들은 오래 전부터 책임에 대해 거론해왔고, 전형적으로는 시민 개인이 그 나라와 동료 시민들에게 갖는 책임을 들먹였다.

이제 책임이란 "우리 스스로 자신을 돌봐야 한다는 책임이자, 그렇게 못할 경우 겪게 될 고난에 대한 책임"을 의미하게 되었다.

복지국가는 이제 책임을 면해줄 방파제로서 충분하지 않으며, 전보다 더욱 개인에게 책임을 물리고 있다.

잘못된 행동이 아닌, 운이 나쁜 탓에 곤경에 놓인 사람에게만 복지 수혜 자격을 제한하는 조치가 대표적인 '각자 능력대로 대접하려는' 시도의 일환이라 할 수 있다.

 

"정의란 무엇인가" 에서 처럼  이 책에서도 미국 사회의 여러가지 사례들을 들어 많은 질문들이 주어진다.

그리고 그 질문들은 정답을 말하기 어려운 것들이다.

해답을 찾기위한 과거에서부터의 철학적 관점에서의 접근들도 소개하고 있지만,

그러나 여전히 공정, 정의라는 것은 지구에 존재하는 사람의 수만큼이나 다양한 답이 존재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정하다고 단정할 수 없는 능력주의가 왜 주요 아젠다로 등장하는 것일까?

샌델 교수는 사회적 방향이 '경제적 성장'에 중심을 두고 있고, 개인들 또한 이에 맞추려다 보니 '일의 존엄성'이 떨어졌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기에 일의 존엄성을 회복하고 사회적 연대의 끈을 강화함으로써 능력주의로 인한 불공정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각각의 직업에 사회적 존경이 부여될 수 있도록 직업의 의미와 역량을 계발하고, 서로를 이해하고 타협할 수 있는 정보를 널리 보급하고 공유하며, 동료 시민들과 공적 문제에 대해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조건의 평등"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조건의 평등'은 모든 사람이 동일한 임금과 부를 가져야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들은 그들이 어떤 계층일지라도 공공의 삶 속에서 이해관계를 공감하며 공동선에 대해 깊이 고민하는, 민주주의적인 평등의 눈으로 고개를 들고 서서 동료시민들을 바라 볼 수 있는 존재 방식과 문화를 배우는 것에 대해, 충분한 민주주의적 접촉 기회를 가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샌델 교수는 이번 책도 어떤 딱 떨어지는 (우리가 이해하기 쉽고 공감할 수 있는) 정답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다른 철학자들의 철학적 관점이나 시민운동가들처럼, 시민으로서의 연대와 선한 영향력에 대한 공론화를 목적으로 하는 것같다.

그렇더라도 각자가 한번씩은, 아니 앞으로도 계속적으로 되새기며 고민해 볼 주제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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