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어쩌다 접하게 된/책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 기형도 30주기 기념 시선집

by 심심한 똘이장군 2019. 11. 11.

29세로 젊은 시절을 마감한,

무엇보다도 한참 시적 능력을 뽐내야 할 시기에 뇌졸중으로 요절한 시인의 삶은 안타까움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지만,

한편으로는 그래서 그의 유작들은 더욱 신비하고, 그의 삶과 오버랩되어 곱씹어 보게 된다.

 

80년대라는 역사적 암측과 혼돈의 시기,

운동권의 시가 주류를 이루던 그 시기에

시인은 주류와는 다른 길을 간다.

그런 혼돈의 시대에 함께하지 못한 것에 아쉬워 했을지, 아니면 안도했을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의 시에는 자기 성찰들이 가득하다.

따뜻했으나 외로웠고, 외로웠기에 상처입고, 상처입었기에 괴로워했던 마음들이 그의 시 속에 흐른다.

 

기형도의 시는 밝지 못하다.

아니 오히려 읽을수록 그의 우울함이 내게로 전해져 온다.

그 우울함은 시대의 우울함이 아닌 것도 같고, 어찌보면 시대의 우울함에 기인한 것도 같다.

그의 시 “안개”의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처럼

그는 여전히 안개짙은 삶 속에 갇혀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길 위에서 일샘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을 느끼며 좌절했을지도 모르겠다.

“이젠 아무런 일도 일어날 수 없으리라”는, “희망”이 사라졌음에도 어느때부턴가는 눈물조차 흘리지 않는 자신에 대해 괴로워 했을지도 모르겠다.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 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물들은 소리 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 돌아갈 수조차 없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 ․․․․․․ 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홀린 사람

 

사회자가 외쳤다

여기 일생 동안 이웃을 위해 산 분이 계시다

이웃의 슬픔은 이분의 슬픔이었고

이분의 슬픔은 이글거리는 빛이었다

사회자는 하늘을 걸고 맹세했다

이분은 자신을 위해 푸성귀 하나 심지 않았다

눈물 한 방울도 자신을 위해 흘리지 않았다

사회자는 흐느꼈다

보라, 이분은 당신들을 위해 청춘을 버렸다

당신들을 위해 죽을 수도 있다

그분은 일어서서 흐느끼는 사회자를 제지했다

군중들은 일제히 그분에게 박수를 쳤다

사내들은 울먹였고 감동한 여인들은 실신했다

그때 누군가 그분에게 물었다, 당신은 신인가

그분은 목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 유령인가, 목소리가 물었다

저 미치광이를 끌어내, 사회자가 소리쳤다

사내들은 달려갔고 분노한 여인들은 날뛰었다

그분은 성난 사회자를 제지했다

군중들은 일제히 그분에게 박수를 쳤다

사내들은 울먹였고 감동한 여인들은 실신했다

그분의 답변은 군중들의 아우성 때문에 들리지 않았다



안개

 

1

아침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2

이 읍에 처음 와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북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 중 략 >

 

3

아침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를 그 읍의 명품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을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노인들

 

감당하기 벅찬 나날들은 이미 다 지나갔다

그 긴 겨울을 견뎌낸 나뭇가지들은

봄빛이 닿는 곳마다 기다렸다는 듯 목을 분지르며 떨어진다

 

그럴 때마다 내 나이와는 거리가 먼 슬픔들을 나는 느낀다

그리고 그 슬픔들은 내 몫이 아니어서 고통스럽다

 

그러나 부러지지 않고 죽어 있는 날렵한 가지들은 추악하다



엄마 걱정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 간 창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희망

 

이젠 아무런 일도 일어날 수 없으리라

언제부턴가 너를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흐른다

이젠 아무런 일도 일어날 수 없으리라

 

그러나

언제부턴가 아무 때나 나는 눈물 흘리지 않는다



레코오드판에서

바늘이 튀어 오르듯이

 

그것은 어느 늦은 겨울날 저녁

조그만 카페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누구를 기다리기로 작정한 것도 아니었다

부르기 싫은 노래를 억지로 부르듯

흑인 가수의 노래가 천천히

탁자에는 시든 꽃 푸른 꽃 위에는 램프

어두었다 벽면에 긴 팽이모자를 쓴

붉고 푸른 가면들이 춤추며

액자 때문은 아니었다

예감이라도 했던들 누군가

나를 귀찮게 했던들 그 일이 일어날 수 있었겠는가

나는 대학생이었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 그래서 더욱 무서웠다

가끔씩 어떤 홀연한 계기를 통하여

우리는 우리의 전 청춘이 한꺼번에 허물어져버린 것 같은

슬픔을 맛볼 때가 있듯이

레코오드판에서 바늘이 튀어 오르듯이

그것은 어느 늦은 겨울날 저녁

조그만 카페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마른 나뭇가지처럼 힘없이

천천히 탁자 아래로 쓰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