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어쩌다 접하게 된/책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 박준

by 심심한 똘이장군 2019. 5. 25.

돌은 부처처럼 오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은 부처처럼, 돌처럼 오래 살아갈 수 없다.

길지않은 짧음이기에 이별은 슬프다.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은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폐가 아픈 일도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눈이 작은 일도

눈물이 많은 일도

자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하는 것은

 

땅이 집을 잃어가고

집이 사람을 잃어가는 일처럼

아득하다

 

나는 이제

철봉에 매달리지 않아도

이를 악물어야 한다

 

이를 악물고

당신을 오래 생각하면

 

비 마중 나오듯

서리서리 모여드는

 

당신 눈동자의 맺음새가

좋기도 하였다.




여름에 부르는 이름

 

방에서 독재를 했다

기침은 내가 억울해하고

불안해하는 방식이었다

 

나에게 뜨거운 물을

많이 마시라고 말해준 사람은

모두 보고 싶은 사람이 되었다

 

팔리지 않는 광어를

아예 관상용으로 키우던 술집이 있었다

 

그 집 광어 이름하고

내 이름이 같았다

 

대단한 사실은 아니지만

나는 나와 같은 이름의 사람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했다

 

벽면에서 난류를

찾아내는 동안 주름이 늘었다

 

여름에도 이름을 부르고

여름에도 연애를 해야 한다

 

여름에도 별안간 어깨를 만져봐야 하고

여름에도 라면을 끓여야 하고

여름에도 두통을 앓아야 하고

여름에도 잠을 자야 한다

 

,

잠을 끌어당긴다

선풍기 날개가 돈다

 

약풍과 수면장애

강풍과 악몽 사이에서

 

오래된 잠버릇이

당신의 궁금한 이름을 엎지른다





연화석재

 

저녁이면 벽제에서는

아무도 죽지 않는다

 

석재상에서 일하는

외국인 석공들은 오후 늦게 일어나

울음을 길게 내놓는 행렬들을 구경하다

 

밤이면

와불의 발을 만든다

 

아무도 기다려본 적이 없거나

아무도 기다리게 하지 않은 것처럼

깨끗한 돌의 발

 

나란히 높인 것은

열반이고

 

어슷하게 놓인 것은

잠깐 잠이 들었다는 뜻이다

 

얼마 후면

돌의 발 앞에서

손을 모으는 사람도

먼저 죽은 이의 이름을 적는 사람도

촛불을 켜고 갱엿을 붙여오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돌도 부처처럼

오래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