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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접하게 된/책

레 미제라블(불쌍한 사람들) - 빅토르 위고

by 심심한 똘이장군 2023. 4. 14.

수많은 이야기들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기억은

빵 한 조각을 훔쳐 인생이 망가진 장발장의 이야기로만 남아있는 "레 미제라블"

* 레 미제라블 : 불쌍한 사람들, 불행한 사람들

 

하지만 소설에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신의 사랑에 대한

법치주의와 민주주의(공화정)에 대한 다양한 고민들이 녹아있다

 

19년의 감옥살이 끝에 사회에 나오지만 어느 곳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장발장은 생각한다.

 

법이란 명백히 필요한 것이지만 법전에 의해 한 인간을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던져 버린다는 건 얼마나 쓰디쓴 일인가

 

"레 미제라블"은 하나의 거대한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는데, 그 안에는 종교적, 철학적, 역사적, 사회적, 심리적 고찰과 함께 온갖 탈선과 방종, 선과 악의 갈등들이 풍자적으로 그려져 있다.

이 소설은 역사적인 실제 배경의 사회를 바탕으로,

한 인간이 범법 행위로 인한 감옥생활과 그로 인한 비참한 삶. 거룩한 주교를 만나는 것을 계기로  번뇌와 더불어 끝없는 속죄와 희생을 거듭함으로써 성자의 위치로까지 부상하는 변모의 과정을 그려 내고 있다.

선과 악에 대한 명확한 판별 능력도 가지지 못했던 한 인간이 사랑의 거룩한 힘과 그 사랑에서 비롯되는 자기희생의 숭고함. 그리고 무한한 인내를 통해 평범한 인간이 본성 속에 내재하고 있던 선을 깨우치고 마침내 최고의 경지에 도달하는, 존귀한 인간성에 대한 이야기가 그려진다.

 

레미제라블에는 생각보다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한 명의 등장인물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신분을 속이기 위한)

그리고 그들간의 관계는 얽히고 설켜있다기에 이를 이해하는 것이 소설전체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레미제라블 인물 관계도

 

소설은 단순한 장편소설로서의 이야기 전개만이 아니라 저자인 '빅토르 위고'가 생각하는 인간, 제도, 사회에 대한 철학적 내용들이 들어있다.

죄와 그에 대한 형벌의 관계에 대한 부분에서는 '유전무죄'나 형벌이라는 것이 과연 무엇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다.

또한 사회는 과연 가진 자와 가지지 않은 자에 대해 공평한가에 대한 질문은 던진다.

그는 자신이 무턱대고 벌을 받고 있는 결백한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불행한 사건의 잘못이 자기 한 사람에게만 있었던가!
성실히 일한 자신에게 빵 한 조각이 없었다는 게 그저 아무런 일도 아니었단 말인가?
범죄를 저지르기는 했지만 지나친 그 형벌이 더 큰 죄악은 아니었던가?
과연 개인에 적대적인 사회의 악이 아니었는가 말이다!

정작 경계하고 위험한 것은

도둑, 살인자, 죄인처럼 겉으로 들어난 명칭이나 포장이 아니라

사회를 바라보는, 사람을 바라보는 편견과 사실을 사실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이라고..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점점 기득권이 되어가며, 편견을 제도화 해간다.

이 가련한 신부는 주를 믿는 신앙심만 가지고 빈손으로 가난한 산골사람들한테 갔다가 이제는 두 손에 성당의 보물을 하나 가득 가지고 돌아왔잖아. 
그러니까 도둑이나 살인자를 그렇게 무서워할 필요는 없어.
그런 건 그저 작은 위험에 불과하지.
우리가 정작 두려워해야 할 건 바로 우리 자신이야.
편견이 곧 도둑이고, 악덕이 살인자며, 가장 큰 위험은 우리 자신 내부에 있어. 우리의 목이나 지갑을 위협하는 것은 별것 아니야!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건 우리의 영혼을 위협하는 것이지.

레미제라블의 전반적인 이야기는 장발장으로 대표되는 개인의 자기성찰이 주를 이룬다.

관용과 사랑, 희생!

스스로는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러는 가운데 마음은 어느새 변해 가고 있었고, 다시 말해 주교의 관용이 그의 마음에 자리 잡아가고 있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그건 감옥에서 따라 나온 나쁜 습관의 마지막 찌꺼기였을 것이다.
충동적인 무의식 행위 말이다. 
그런 행위를 한 건 어쩌면 그 자신이 아니라 막 눈뜨고 있는 그의 지성이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며 빠져나오려는 순간 본능이라는 짐승이 먼저 튀어나오며 저지른 행위였을 것이다. 
그런 다음 그 지성이 뒤따라 나와 짐승의 행위를 보고는 기겁하며 놀라 자빠졌던 것이다. 
결국 악마 같은 그 마지막 행동은 그의 지성 속에 꿈틀거리던 혼돈을 정지시키고, 본능 속의 장발장을 쫓아낸 후 주교만을 남게 한 것이었다. 
주교는 이 가련한 사나이의 영혼에 찬연한 빛을 가득 채워 주고 있었다. 
장발장을 울고 또 울었다. 뜨거운 눈물은 멈출 줄 모르고 흘러내렸다. 그는 포효하듯 절규하며 울고만 있었다. 그러다 한순간 그의 뇌리에 빛이 떠오르며 자신의 삶과 영혼을 비추고 있는 듯했다. 
갑자기 무섭고 끔찍하게 느껴졌지만 그 빛은 부드럽고 발게 그의 영혼 위에서 머물고 있었다.

왜 이런 말을 하느냐고? 나만 입 다물고 있으면 되는데 말이지?
고발이나 수배를 당하고 있는 것도 아니면서?
아니야, 난 수배당하고 있다네, 누구에게냐 하면 바로 나 자신에게지. 내 앞길을 가로막고 있는 건 바로 나 자신일세.
나는 나를 끌어다가 스스로 포박하고 처형하고 있다네.
사람이란 자기 스스로를 붙잡을 때야말로 비로소 꼼짝없이 붙잡히는 것이지. 
옛날에 나는 살기 위해서 빵 한 조각을 훔쳤지만 이제 또다시 살기 위해서 이름을 훔치고 싶지는 않다네.

레미제라블의 또다른 재미는 사회, 종교, 정치, 경제, 철학적 문제에 대한 '위고'이 생각을 옅볼 수 있기 때문이다.

제도적 결함을 안고 있는 제도권 사회(종교, 경제를 포함한)와 그에 반항하는 폭동이라는 조직적 행위를 작가는 정당하다고 본다는 점이 흥미롭기도 하다.

정의를 기초로 하는 민주주의 국가에 있어서도 때때로 한 부분이 국가 권력을 약탈하는 수가 있으며, 그럴 때 전체가 궐기하여 권리 회복을 위해 무기를 들수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그의 생각은

지금의 보수주의자가 보기에는 급진적이라고 인식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빅토르 위고'를 급진적이라고 하는 보수주의자가 없다는게 보수주의의 편견일지도 모르겠다.

복잡한 미로와 같은 사회 구조 아래엔 수많은 동굴이 숨어 있다. 종교의 동굴이 있고, 철학의 동굴, 정치의 동굴, 경제의 동굴 등.
어떤 사람들은 사상의 곡괭이로 굴을 파고, 어떤 사람은 숫자의 곡괭이로, 또 어떤 사람은 분노의 곡괭이로 굴을 판다.
사람들은 이 동굴에서 저 동굴로 서로 부르고 대답하며, 각자의 이상을 찾아 그렇게 지하에서 헤매고 다닌다.
그들은 사방으로 가지를 뻗어 때로는 서로 만나서 친밀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때로는 동굴에서 서로 투쟁할 때도 있다. 

이 지하세계에서는 서로 무사무욕을 감춘다. 여기서는 악마가 머리를 내밀고 사람은 각자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한다.
맹목적인 자아가 으르렁거리며 먹이를 찾고 다 먹어치운다. 

다시 말해 사회의 밑바닥에는 커다란 죄악의 동굴이 있으며, 무지가 사라져 없어지는 날까지 그것은 계속 존재해 나갈 것이다.

 

1832년 6월 5일
폭동은 왜 일어나는가? 아무 이유가 없을 수도 있고, 또 모든 이유 때문일 수도 있다. 아스라이 발산하는 전기, 홀연히 솟아오르는 불꽃, 방황하는 힘, 스치는 바람, 이런 것들 때문일 수 있다.
폭동은 행정을 짓밟고 번영과 횡포를 짓밟으며 모든 것을 휩쓸어간다. 국가나 인생, 운면에 대해 반항심을 품고 있는 자들은 누구나 다 폭동에 가담할 수 있는 사람들이어서 폭동이 일어나기만 하면 몸을 떨기 시작하며 그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버린다.
폭동에 휩쓸리는 자도 거기에 대항하는 자도 다 같이 불행하다. 쌍방이 서로 부딪쳐 부서져 버리는 것이다. 폭동은 모든 것을 폭탄으로 만들수 있어, 하나의 돌멩이도 탄환으로 만들고 한 사람의 노동자도 장구능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다소의 폭동은 오히려 바람직한 것이라고, 교활한 정략가들은 그렇게 단정 짓는다. 그들에 의하면 폭동은 정부를 전복시키지 않으면서 도리어 더 공고히 해준다는 것이다. 폭동은 군대를 긴장시키고 시민들을 결속하게 하며 경찰의 능력을 향상시키고, 그러믕로써 사회의 구조를 정돈한다고도 한다. 운동도 적당히 하면 몸이 튼튼해지듯 폭동이 일어난 뒤엔 정부 권력도 한층 강화된다는 것이다.
세상에는 폭동과 반란이 있다. 같은 분노의 표출이긴 하지만 하나는 정당하고 하나는 부당하다. 정의를 기초로 하는 민주주의 국가에 있어서도 때때로 한 부분이 국가 권력을 약탈하는 수가 있으며, 그럴 때 전체가 궐기하여 권리 회복을 위해 무기를 들기까지 한다. 전체의 주권에 속하는 모든 문제들에 있어서, 부분에 대한 전체의 전쟁을 반란이고, 전체에 대한 부분의 전쟁은 폭동이다 튈르리 궁에 왕이 있느냐 국민의회가 있느냐에 따라서, 이 궁전을 공격하는 것은 정의가 되기도 하고 불의가 되기도 한다.

모든 것이 자기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해서 신을 원망해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