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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떠나고 싶은 여행/캄보디아

앙코르와트

by 심심한 똘이장군 2014. 2. 9.

밀림 속에서 잠들어 있는 동남아시아 최대 유적

 

앙코르와트는 인도차이나 반도의 캄보디아에 있는, 동남아시아 최대의 역사 유적 중 하나이다. 유적은 톤레사프 호수에서 북쪽으로 약 2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앙코르 산(언덕) 정상에 자리잡고 있다. 주변에는 많은 사원 유적과 왕도였던 앙코르톰 유적도 있어서 이 지역 전체 유적을 앙코르 유적군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정글에 묻혀 있던 앙코르와트를 처음 학술적으로 조사했던 인물은 프랑스 출신의 박물학자인 앙리 무오였다. 그는 1860년 1월에 현지를 방문한 후 열병에 걸려 그 다음해인 1861년 10월에 숨을 거두었지만, 그의 사후 잡지에 게재된 조사 일지는 유럽에서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래서 1863년부터 본격적인 조사가 이루어지게 되었고, 많은 유물들이 프랑스로 건너가 조사·전시되었다.

그러나 프랑스 학자들의 조사가 이루어지면서 오히려 앙코르와트에 대한 수수께끼는 한층 더 깊어지게 되었다.

1860년대 당시, 현지인들은 크메르 문화의 전통을 완전히 잃어버렸고, 앙코르와트를 누가 건설했는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또한 유적의 존재마저도 모르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 가운데 캄보디아의 역사 자료는 전란으로 인해 대부분 사라져버렸고, 앙코르와트 건설의 수수께끼를 풀 수 있는 방법은 유적지과 함께 서 있는 비문에 새겨진 글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비문마저도 해독이 대단히 어려워서, 그 내용을 명확하게 밝히기 위해서는 1930년대까지 기다려야만 했다. 그 때문에 비문이 해독되기 이전에는 앙코르와트의 건설자로 로마인이나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에 참가했던 그리스인의 후예 등이 거론되었고, 심지어는 마야나 아스텍 문명설마저 주장하는 학자도 나타났다.

그러나 비문이 해독됨으로써 앙코르와트는 캄보디아의 크메르 왕조가 건설했다는 것이 분명해졌고, 나아가 그 외의 유적을 포괄하는 크메르 문명의 실체가 드러나게 되었다.

 

힌두교가 탄생시킨 독특한 건축물

앙코르와트는 크메르어로 왕성(앙코르)와 사원(와트)이라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진 왕도의 핵심적인 종교 건축물이다. 외형적으로는 동서 1,500미터, 남북 1,300미터의 대단히 잘 정비된 장방형 건축물로, 유적의 외부는 폭 190미터에 이르는 해자(垓字 : 성 주위로 물길을 내서 두른 물웅덩이. 주로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한 용도로 건설했다-옮긴이)가 둘러쳐져 있다.

내부는 중앙에 있는 제사당을 회랑이 3중으로 둘러싸고 있는 구조이며, 제사당은 모두 다섯 개의 탑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중앙탑은 높이가 65미터에 이른다. 3중으로 둘러싸고 있는 회랑의 한쪽 면에는 힌두 신화와 전설을 주제로 한 부조가 새겨져 있지만, 인도 유적에 남아 있는 조각이나 부조와는 크게 다른 크메르만의 독자적인 양식이다.

앙코르와트는 종교 건축물이며, 그 구조도 힌두교 세계관에 기초를 두고 있다. 우선, 제사당 중앙에 우뚝 솟아 있는 탑은 성스러운 산인 메루를 표현한 것이며, 동시에 외형은 연꽃의 꽃봉우리를 형상화한 것이다. 그리고 제사당을 둘러싸고 있는 회랑은 대지와 산맥을 뜻하며, 바깥쪽의 해자는 바다를 암시한다.

결국 앙코르와트는 '세계' 그 자체를 표현한 사원이며, 동시에 왕권을 나타내는 기념물인 것이다.

앙코르와트는 붉은 흙으로 기초를 다진 다음 그 위에 사암을 여러 겹으로 높이 쌓았는데, 붉은 흙은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었고(해자를 만들면서 나온 흙), 사암은 태국에서 수로를 통해 들여왔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이유로 다른 유적들이 모두 동향인 반면 앙코르와트는 서쪽을 향해 서 있다.

 

반란, 전쟁, 방치된 유적

크메르 왕조는 앙코르와트를 건설한 12세기가 최전성기였지만 이후 급격한 몰락의 길을 걸었다. 캄보디아의 기후는 우기와 건기로 구분되는데, 풍부한 수량을 자랑하는 톤레사프 호수는 우기가 되면 홍수를 일으키고, 건기가 되면 호수 밑바닥이 드러날 정도로 가뭄이 들었다(건기에는 호수 면적이 우기의 3분의 1로 줄어든다고 한다). 그 때문에 크메르의 지배자들은 많은 저수지와 수로를 건설해서 건기에도 농사를 지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농민들은 농사 외에도 수리시설을 유지하는 일도 해야 했기 때문에 삶은 피폐해지고 마침내 지배자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더욱이 태국과의 전쟁이 발발하면서 병사로 징발된 농민들은 수리아바르만 2세 사후 반란을 일으켰다. 농민들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크메르 왕조의 국력은 크게 쇠퇴했고, 그후 왕권 쟁탈전이 벌어져 왕조는 분열의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이때를 놓치지 않고 말레이 계통의 참파 국이 군사를 이끌고 침공해왔다. 이리하여 1177년, 마침내 크메르는 침략자들에게 점령되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그후 수리야바르만 2세의 후예인 쟈야바르만 4세가 크메르의 재건을 꾀했지만('앙코르톰'편 참조), 그의 사후에는 줄곧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다.

결국 1431년 태국의 아유타야 왕조가 크메르를 점령함으로써 크메르 왕국은 몰락하고, 그 다음해부터 이 위대한 유적은 방치되고 말았다.

 

소승불교로의 전환

불교도였던 쟈야바르만 4세는 이전의 힌두교를 버리고 소승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왕도 앙코르에서 힌두교는 사라지게 되었고, 1432년부터 버려진 도시가 되었던 앙코르와트는 소승불교 사원으로 다시 태어나게 되었다. 그로 인해 앙코르와트 서쪽에는 프레아 포안(千體佛)이라 불리는 불상만을 모신 회랑이 존재한다.

앙코르와트의 존재는 중국과 일본 등에 간간이 알려지기도 했으나 19세기에 앙리 무오에 의해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캄보디아의 밀림 속에서 깊이 잠들어 있었다. 그때 이후 수 차례에 걸친 발굴 조사를 통해 그 전모가 어느 정도 드러나기는 했으나 아직까지도 많은 수수께끼를 간직하고 있다. 현재는 유네스코와 일본의 조사단이 유적 발굴에 힘을 쏟고 있다.

 

지금 보이고 있는 곳이

죽기전에 가보아야 할 명소로 꼽히는

앙코르와트의 모습입니다.

한쪽면이 1.3km ~ 1.5km 에 있는 사각형의 사원입니다.

사원의 정중앙에 5개의 석탑이 솥아 있습니다.

가운데의 석탑은 다른 것보다 좀더 크고, 높습니다.

그리고 천문학등을 이용해 방위를 정했는데

그 정확도가 현재의 방위와 동일하다고 하니 과학적으로도 뛰어났던거 같네요.

 

믿거나 말거나 있지만

서쪽 방향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가면,

이집트의 피라미드와

남미의 잉카, 마야문명 유적지의

중심선과 일직선으로 연결된다고 합니다.

  

 

 

해자를 지나는 길위에서

해자를 이루는 물로 아이를 씻기는 모습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시각으로는 물이 깨끗해 보이지 않습니다만,

그들에게는 일상이어서 신경을 안 쓰는 것 같습니다.

 

상수도와 식수문제등은 항상 건강과 직결되어 보건의료체계에서는 빼놓을 수 없는 개선 사업일 수 밖에 없습니다. 

 

 

앙코르와트의 외곽 건축물에 서서히 다다릅니다

 

 

 

 

 

 

 

외곽 건축물을 지나면

앙코르와트라고 하면 흔히 알고 있는 건축물이 눈에 들어옵니다.

일직선상의 길을 중심으로

좌우가 대칭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믿거나 말거나 시리즈 하나 더

해자의 모습과 앙코르와트의 규모로 인해

평지에 앙코르와트를 쌓고, 바깥의 해자를 만든것으로 알고 계신데

사실 이곳은 습지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곳을 건축하지 위해 현재의 간척과 같은 매립작업을 한 후에

앙코르와트를 건축했다고 하네요.

실로 엄청나게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하는 작업일 수 밖에 없었을 겁니다.

그리고 매립지 위에 지은 건축물이

그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무너짐없이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니 그 또한 더 놀라울 수 밖에 없습니다

 

 

으잉~~~

사진을 찍다보니 아빠들은 다 빠졌습니다 ㅜㅜ

 

 

 

 

 

앙코르와트에 있는 야자수 나무는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킬링필드 때에는

야자수의 저 날카로운 줄기에 많은 아이들이 희생되었다고 하네요

 

 

 

이곳은 포토포인트 입니다

포토포인트라는 말은 배경으로서의 아름다움도 있지만

쉼터가 있다는 말이기도 하죠...

물론 전통의상이나 기념품을 살 수 있는 공간도 있구요.

 

이곳에서 파는 기념 뱃지나 냉장고 자석이

여행 마무리에 들리는 가게보다 저렴하다는 사실!!!

 

 

 

 

 

 

 

 

 

 

야자수 음료는 아무리 먹어도

방송에서처럼 그렇게 맛나다는 느낌을 받지는 못합니다.

이 여행, 저 여행 계속계속 먹어봐도 맛은 여전히 ~~~~

사기먹방을 본 걸까요?

 

 

 

사원 여기저기에는 원숭이들이 많습니다.

사람을 겁내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준 야자수를 날름날름 잘도 먹습니다

사원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탐욕의 원숭이를 보는 듯 합니다

 

 

 

 

야자수 안쪽의 하얀 것을 먹어보는데

그냥 아무 맛 없는 무맛이 납니다. ^^

그런데 원숭이는 이걸 엄청 잘 파 먹습니다

 

 

 

잠시 쉬었으니

본격적으로 앙코르와트 안으로 출발 ~~~~

 

 

 

앙코르와트 안의 벽면에는

그들의 신앙과 역사에 대한 이야기들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굉장히 정교한 조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인물의 표정, 부착물, 그리고 나뭇잎의 하나하나까지 새겨져 있습니다

 

 

 

이 긴 벽들의 둘레를

역사로 채워놨습니다.

 

 

 

 

지금은 이렇게 색깔이 일부만 남아있지만

과거에는 전체가 다 이렇게 색이 입혀져 있었다고 합니다.

오랜 세월의 끝에 이제 색이 바랜거죠

 

곳곳에 신화속 전쟁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원숭이 군대의 싸움도...

선과 악의 싸움

 

 

크메르의 역사를 좀더 알았다면

조각속 이야기를 좀더 잘 이해할 수 있었을텐데

그러질 못해 많이 아쉽습니다.

 

 

 

 

 

 

크메르인의 전성기 이후에

외국의 침략, 종교적인 문제등으로

유적의 아래부분은 이런식으로 깍이고 패여나갔다고 합니다

 

 

 

신화와 역사속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이제 앙코르와트 중앙석탑을 오르는 곳이 나오게 됩니다.

걷는 것에 지친 아이들은 중앙석탑에 오르지 않고 옆에서 휴식

 

 

 

우리의 중2 아들은 여기서 쓰러지나요

 

 

 

자 이제 메인 석탑을 향하여 출발...

헐 경사가 너무 가파릅니다.

이곳에서는 어린 아이들은 올라가지 못하도록 막고 있네요.

 

과거에는 신성한 사원인 이곳에 방문하기 위해서는

긴 바지를 입지 않으면 올라갈 수 없다고 했다는 데요

현재는 반바지도 크게 뭐라고 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칠부바지정도는 입어줘야 하겠죠

 

 

석탑들이 있는 공간으로 오르니

그 높은 곳에도 이렇게 넓은 공간들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길들이 사방으로 뚫려있는 정방향의 대칭구조네요

 

 

정중앙에는 기도를 하는 곳도 있습니다

 

 

 

 

 

 

이곳저곳을 둘려보면서

잠시 그늘에서 여유를 느껴봅니다

건축물 조형미와 웅장함

정교함과 크메르인의 흥망성쇠

그 모든 것들이 여행에서 느끼기에는 부족한 시간, 그래도 여유시간이 있어야 그것들을 음미해 볼 수 있습니다

 

 

 

 

 

 

 

 

 

 

 

위에서 내려다 본 앙코르와트는

밀림지역에 있음을 다시한번 알 수 있게 합니다.

그리고 여러 높이의 단계로 구성되어 있음도 알 수 있구요

그 옛날 이러한 높이의 사원은 얼마나 신성시 되었을까도 되새겨지게 됩니다.

 

 

 

 

 

 

 

 

 

 

 

 

 

 

 

 

 

 

 

 

 

 

 

 

 

 

 

 

앙코르와트 또한 이곳저곳이 유실되어 보수공사가 한창입니다.

그 예전의 기술보다 지금의 복원기술이 더 좋을까요?

의문스럽습니다.

우리나라의 복원도 항상 문제가 발생하죠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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