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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떠나고 싶은 여행/경기도

양주 관아지 - 옛스러움은 사라지고 휑함이

by 심심한 똘이장군 2020. 10. 3.

조선시대 중요한 지리적, 행정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양주.

과거 양주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160억원이 넘는 돈을 투자해서 복원한 양주 관아지는 양주의 예전 관청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인 부분이 있는 것 같다.

하지만 실제로 보여진 복원터의 모습은 예전의 모습이 거의 남아 있지 않은 현대물의 모습으로만 가슴에 와 닿는다.

시간이 지나 복원시설에도 세월의 흔적이 깃든다면 옛스러움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겠지만

아마도 내가 그 감흥을 느끼는 시기가 도래하지는 않을 것 같다.

모든 것을 너무나 깨끗이 복원한 시설은 옛스러움을 흉내내기에도 벅찬 느낌이다.

문화재 복원의 방향성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경기도기념물 제167호.

양주 관아지는 1506년 현 위치에 설치되어 1922년 시둔면으로 이전될 때까지 417년 동안 양주목을 다스리던 관청이 있었던 곳으로 2000년부터 2017년까지 5차례의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건물지 및 담장지, 배수시설, 출입시설 등의 유구와 평기와, 막새기와, 명문기와 등의 기와류 및 청자, 분청사기, 백자 등의 자기류, 상평통보 등 금속 유물들이 확인되었다.

양주 관아의 규모가 어떠하였는지는 “여지도서”, “경기읍지” 등을 통해 알 수 있는데, 이 중 양주목의 규모를 가장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는 “경기읍지”로, 약 31개의 관아 시설에 그 규모는 326여 칸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양주시는 1997년 양주목사의 집무처인 동헌의 복원을 시작으로 그간의 발굴조사 결과를 반영하여 동헌부 부속건물 및 내아에 대한 복원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2017년 동헌부 부속건물인 동행각, 서행각, 내삼문, 사령청, 외삼문, 중렴성문, 외렴성문과 양주목사의 관사였던 내아, 내아삼문에 대한 복원을 완료할 수 있었다.

또한 문화재보호구역 내 정비사업을 추진하여 무형문화재 통합공연잔, 주차장, 영주관아지 관리센터를 조성하여 양주관아를 찾는 관람객들의 관람편의를 도모할 수 있게 되었다.

매학당 동쪽으로는 18기의 양주목사 송덕비군이 위치하고 있으며, 매학당 뒤편으로 조선 22대 임금인 정조가 양주관아에 행차하여 활을 쏜 것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한 어사대비가 자리하고 있다.

매학당 동쪽 뒤편으로는 ‘금화정’이라는 정자가 위치하고 있는데 양주목사가 백성들을 사랑하여 함께 즐겼다는 ‘관민동락’의 사상이 배어 있는 장소이며 그 글씨가 정자 아래쪽 바위에 새겨져 있다. 1996년 현재 위치에 복원되었다.

양주의 읍치는 한양의 중심부에 있었으나 조선 태조 3년 조선의 도읍을 송도에서 한양으로 옮기면서 지금의 서울광진구일대인 대동촌으로 옮겼다가 다시 견주의 옛터인 지금의 양주시 고읍동으로 옮긴 후 중종1년(1506) 지금의 유양리로 옮기게 되었는데 현재 복원한 관아가 위치한 유양리 507번지는 매학당이 있던 곳으로 매학당은 목사의 정청이었습니다.

매학당은 외동헌과 내동헌이 있었는데 20여 칸의 규모였습니다. 외동헌은 목사가 정무를 보던 곳이고 내동헌은 그 가족이 생활하던 곳이며 동헌은 한식기와를 얹은 팔작지붕의 정면 7칸, 측면 3칸의 목조건물입니다. 계단을 올라 화강석 기단위에 주초를 두고 방형기둥을 세웠으며, 기둥 위 두공은 간결한 모양을 두 겹으로 얹인 건물입니다. 

[자료출처] 양주시청, 양주관아지 소개

 

 


외삼문

외삼문은 동헌이 시작되는 진입부, 즉 관아 동헌에서 가장 외부와 가까운 곳으로 관아 전면부에 설치하는 문이다. “여지도서”의 기록에 의하면 3칸 규모로 고취지소, 북을 치고 나팔을 부는 곳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경기읍지”에서는 6칸의 규모로 기록됨에 따라 초축 후 후대 증축된 것으로 추정된다.

중층구조이며 1층에 문이 설치되고, 2층에는 큰 북을 달아 아침 저녁으로 북을 쳐서 읍내에 시간을 알리는 장소였다. 2차 발굴 조사 결과 건물지가 확인되었으며, 6칸으로 규모로 복원되었다.

 


내삼문 및 좌우행각

내삼문은 관아의 정무가 행해지던 중심건물인 동헌으로 진출입하는 문이다. 외삼문을 지난 동헌 쪽으로 들어서면 먼저 내삼문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내삼문은 외삼문과 동헌 사이에 자리한다. 내삼문의 규모에 대해서는 “경기읍지”의 기록을 따르면 3칸으로 되어 있다. 또한 내삼문 좌‧우측으로 부속건물인 좌행각과 우행각을 두었는데, “경기읍지”에는 좌우행각 합쳐서 11칸으로 기록되어 있다.

내삼문 및 좌우행각은 양주관아지 2~3차 발굴조사에서 확인되었다. 발국조사결과와 “경기읍지”의 기록을 바탕으로 총 14칸의 규모로 복원되었다.

 


동행각, 서행각

행각은 궁궐, 관아, 사찰에서 가장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건물 옆에 세우는 보조건물로서 양주관아에서 근무하는 군인들이나 일꾼들이 대기하거나 물품을 보관하는 장소로 활용 되었다.

양주관아에는 4곳의 행각이 있는데 그 중 동행각은 동헌의 전면부 동편에 위치하고 있다. 동행각의 명칭은 “경기읍지”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총 11칸의 규모였다. 2차 발굴조사 결과 건물지가 확인되었으며, 발굴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14칸의 규모로 복원되었다.

서행각은 동헌의 전면부 서편에 위치하고 있다. 서행각의 명칭은 “경기읍지”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총 16칸 반의 규모이다. 2차 발굴조사 결과 건물지가 확인되었으며, 발굴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14칸의 규모로 복원되었다.

 


동헌이 관장하는 영역은 행정적인 업무와 재판이 이루어지는 영역으로 1997년 동헌을 복원하였으나 5차에 걸처 발굴조사결과 위치가 잘못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이 매화당앞에 지주돌로 설치되어 있는 위치가 정확한 동헌터의 위치라고 한다

 


외렴성문

외렴성문은 관아의 정무가 행해지던 중심건물인 동헌에서 뒤편 어사대나 금화정 등으로 출입하는 동헌에 부설된 출입문이다. “경기읍지”에 의하면 외렴성문의 규모는 1칸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양주관아지 3차 발굴조사 결과 동헌 북쪽에 출입유구시설이 확인됨에 따라 1칸의 규모로 복원되었다.

 


중렴성문

중렴성문은 관아의 정무가 행해지던 중심건물인 동헌과 수령의 가족이 거처하던 내아 사이에 자리하고 있는 협문이다. “경기읍지”에 의하면 중렴성문의 규모는 1칸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발굴조사 결과 유구위치는 확인되지 않았고, 문헌의 기록을 바탕으로 하여 1칸의 규모로 복원되었다.

 


내아영역

내아영역은 지방수령이었던 양주목사의 가족들이 거처하였다. 내아와 행랑채, 내아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관악건축 구조상 내아영역은 동헌의 서편에 위치하며, 내동헌 또는 서헌이라고도 불린다.

큰 ‘ㅁ’자 모양의 내아에서 양주목사와 그 가족들이 거처하였고, 양주목사 및 그 가족들이 내아와 동헌사이의 협문인 중렴성문을 통해 내아와 동헌을 다녔을 것으로 추정된다. 내아 아래쪽에는 행랑채가 있어 주로 심부름을 하는 사람들이 기거하거나 창고로 이용되었다. 또한 외부로의 출입을 위해 내아삼문을 두었다.

내아영역은 일제강점기 시기 일본인들의 주내면사무소로 사용되었고, 내아 전면부 쪽은 일제강점기 및 한국전쟁 당시 죄인이나 포로를 가두고 고문하는 장소로 이용되는 등 후대에 이르러 건물들이 망실되었다.

3차 발굴조사 결과 그 모습을 드러내면서 내아에 대한 복원 계획이 본격적으로 수립될 수 있었다. 현재는 내아와 내아삼문은 복원된 상태이며, 행랑채의 경우 건물지를 정비하여 보존하고 있다. 또한 내아 좌측에 양주관아의 원활한 관리를 위해 별도로 관리사를 신설하였다.

 


동헌의 오른편에는 각지에 흩어져 있던 양주목사들의 송덕비들을 모아놓았다. 비가 모두 18기인데 17기는 송덕비이고 나머지 1기는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유허비이다. 이 비들의 비좌는 화강암으로 새로 만든 것이다.

 


어사대비

어사대비는 조선 정조가 활을 쏘았던 곳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둔 비이다. 1792년 9월 정조가 광릉에 행차하던 길에 양주목사가 있던 관아에 3일간 머물면서 백성을 시무하여 민정을 살피고, 이곳에서 신하들과 함께 활을 쏜 뒤 잔치를 베풀었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당시 양주목사 이민채가 그때의 상황을 기록한 비석으로, 임금이 활을 쏘았던 곳이라 하여 비신전면에 ‘어사대’라 음각하였다. 비의 뒷면 끝부분에는 정조 16년 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도록 “숭정삼임자 십이월일립”의 글자를 새겼다. 또한 정조가 활을 쏜 내용과 활을 쏜 뒤 지은 고사와 환궁 후 내린 말씀을 관아 우측 벽에 게시하여 성덕을 찬양하며, 아울러 그 사실을 석비에 새기고 읍지에 기록한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거북 기단 위에 대리석으로 세워져 있는데 비의 규모는 높이 140cm, 넓이 55cm, 두께 23cm 이다.

 

 

관아지 뒤편 산책로를 따라 가다보면
임꺽정 생가터가 나온다.

생가터에는 생가는 존재하지 않고, 터에 보존비만 덩그러니 세워져 있다.

(생각에 대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기에 무작정 복원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기는 하다)

불곡산에 임꺽정봉도 있는 걸 보면, 임꺽정의 존재와 양주의 관계가 무척 밀접해 보이지만,

철원지역에 비해 임꺽정에 대한 소개는 충분해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