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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접하게 된/책

일인칭 단수 - 무라카미 하루키

by 심심한 똘이장군 2021. 3. 30.

소설은 “일인칭단수”라는 책제목처럼

일인칭인 나의 이야기들로 채워나간다.

매 편의 이야기들 속 일인칭단수인 나는 고등학교 시절, 대학생 시절, 사회초년생 시절, 중년의 시절까지에 존재한다.

그리고 일인칭 단수인 나는 현실 속에서, 때로는 과거에서, 혹은 꿈인지 현실인지 구분이 모호한 상황 속에 존재한다.

 

의도하던 의도하지 않던, 좋아하던 좋아하지 않던

자신의 민낯 위에 가면을 덫쓴 체 살아간다.

 

 

무라카미 하루키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하던 그의 글들

 

그런데 최근의 소설들은 왠지 이전의 하루키로부터 받았던 느낌을 주지 않는다.

매일 달기기를 하고 음악을 듣는 규칙적인 생활을 하면서 자신의 문학세계를 넓혀 나가고 있는 그이지만,

재즈나 클래식이 주요 매개체가 되는 설정이라든가,

시대상의 반영대신 개인적인 일상의 사소함 (꿈 같은 것)을 소설로 만들어내는 것은

그의 규칙적인 생활만큼이나 정형적이다.

 


돌베개에

열아홉 살 무렵의 나는 내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거의 알지 못했고, 당연히 타인의 마음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래도 기쁨이나 슬픔이 뭔지는 대충 알고 있다고 내 딴은 생각했었다. 다만 기쁨과 슬픔사이에 있는 수많은 현상을, 그것들의 위치관계를 아직 잘 분간하지 못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 사실은 종종 나를 몹시 불안하고 무력하게 만들었다.

 

벤다/베인다/돌베개

목덜미 갖다대니/보아라, 먼지가 되었다.

 


크림

지금까지 살면서 설명이 안 되고 이치에도 맞지 않는, 그렇지만 마음이 지독히 흐트러지는 일이 일어날 때마다(자주라고 할 정도는 아니어도 몇 번쯤 그런 일이 있었다) 나는 언제나 그 원에 대해-중심이 여러 개 있고 둘레를 갖지 않는 원에 대해-중심이 여러 개 있고 둘레를 갖지 않는 원에 대해-곰곰이 생각했다. 열여덟 살 때 그 정자의 벤치에서 그랬듯이, 눈을 감고 심장박동에 귀기울이면서.

 


찰리 파커 플레이즈 보사노바

 


위드 더 비틀스 With the Beatles

한때 소녀였던 이들이 나이를 먹어버린 것이 서글프게 다가오는 까닭은 아마도 내가 소년 시절 품었던 꿈 같은 것이 이제 효력을 잃었음을 새삼 인정해야 해서일 것이다. 꿈이 죽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실제 생명이 소멸하는 것보다 슬픈 일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때로 매우 공정하지 못한 일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우리는 우연의 이끌림에 따라 두 번 마주했다. 이십 년 가까운 세월을 사이에 두고, 600킬로미터쯤 떨어진 두 도시에서. 그리고 테이블에 마주않아, 커피를 마시고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평범한 담소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무언가를 - 우리가 살아간다는 행위에 포함된 의미 비슷한 것을 - 시사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국에는 우연에 의해 어쩌다 실현된 단순한 시사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을 뛰어넘어 우리 두 사람을 유기적으로 이어주는 요소는 없었다.

 


야쿠르트 스왈로스 시집

인생은 이기는 때보다 지는 때가 더 많다. 그리고 인생의 진정한 지혜는 '어떻게 상대를 이기는가'가 아니라 오히려 '어떻게 잘 지는가' 하는 데서 나온다.

 


사육제

머리가 약간 흐트러졌지만, 그것 말고는 평소의 그녀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요컨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외모를 여느 때와 다름없이 유지하고 있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텔레비전 화면에 비친 그녀의 얼굴에서는 평소에 볼 수 있던 생생한 무언가가 사라져 있었다. 혹은 의도적으로 가면 너머에 은닉하고 있었다.

 

우린 누구나 많건 적건 가면을 쓰고 살아가. 가면을 전혀 쓰지 않고 이 치열한 세상을 살아가기란 도저히 불가능하니까. 악령의 가면 밑에는 천사의 민낯이 있고, 천사의 가면 밑에는 악령의 민낯이 있어. 어느 한쪽만 있을 수는 없어. 그게 우리야. 그게 카니발이고. 그리고 슈만은 사람들의 그런 여러 얼굴을 동시에 볼 줄 알았어 - 가면과 민낯 양쪽을. 왜냐하면 스스로 영혼을 깊이 분열시킨 인간이었으니까. 가면과 민낯의 숨막히는 틈새에서 살던 사람이니까.

 


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

뭐니뭐니해도 제일 괴로운 건 누구와도 소통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원숭이와도, 사람과도 얘기할 수 없어도. 고독하다는 건 정말 슬픈 일입니다. 저는 원숭이 사회에도 속하지 못하고, 인간사회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도 저도 아니게 어정쩡하고 고독한 원숭이가 되어버린 겁니다. 살을 에는 듯한 나날이었습니다.

 


일인칭 단수

지금까지 내 인생에는 - 아마 대개의 인생이 그러하듯이 - 중요한 분기점이 몇 곳 있었다. 오른쪽이나 왼쪽, 어느 쪽으로든 갈 수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오른쪽을 선택하거나 왼쪽을 선택했다.(한쪽을 택하는 명백한 이유가 존재한 적도 있지만, 그런 게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경우가 오히려 많았는지도 모른다. 또한 항상 스스로 선택해온 것도 아니다. 저쪽에서 나를 선택한 적도 몇 번 있었다). 그렇게 나는 지금 여기 있다. 여기 이렇게. 일인칭 단수의 나로서 실재한다. 만약 한 번이라도 다른 방향을 선택했더라면 지금의 나는 아마 여기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거울에 비친 사람은 대체 누구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