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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접하게 된/기타

파더레스(fatherlessness) - 부성의 부재 또는 신의 부재

by 심심한 똘이장군 2024. 8. 11.

체홉의 사후 16년이 지나서 우연하게 발견되었다는 제목없는 희곡.

혈기왕성한 10대 시절 안똔체홉이 호기롭게 완성한 이 작품은 그러나 어느 곳에서도 공연되지 못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안의 등장인물들의 캐릭턱들은 이후의 그의 작품 속에 그대로 녹아 있는 것 같습니다다.

(몰락한 귀족과 영주, 피폐하고 공허하기만 한 지식인, 결핍된 애정에 대한 갈구 등등)

그들의 사회적 신분이나 사고 방식들은 <세자매>나 <벚꽃동산>, <바냐 삼촌>, <갈매기(챠이카)> 등에 그대로 차용된다고 할까?

이후의 그의 작품에 그대로 녹아져 있다고나 할까?

계몽주의적 주제와 대사들은 적지만 삶에 대한 관념, 고뇌, 비관 등은 여전합니다.

하지만 10대의 열정만큼이나 이 희곡은 뜨겁습니다.

 

제목없는 희곡 혹은 플라토노프 혹은 파더레스

체홉이 우수한 성적으로 모스크바 의대이 입학도 하기 전, 세상에 내던진 도전장이 바로 이 "파더레스(1878)" 이다.

열정 넘치는 니 18세 풋내기는 자신의 야심작을 당돌하게, 감히 국립 말리극장의 소속인 대스타 마리아 예르몰로바를 위해 썼다며 공연의뢰를 했으나 무심하게 거절되었고 그의 사후 20년까지 발견되지 않았던 희곡이다.

원본 발견 당시 이 희곡은 제목이 적혀있지 않았다.

따라서 극중의 인물인 쁠라또노프가 중심되기도 하는 구조라 영어권으로 넘어오면서 "PLATONOV" 라는 제목으로 불렸고, 러시아 권에서는 체홉의 편지 중 이 작품을 말할 때 언급된 단어인 'Безотцовщина(베즈앗쏩쉬나)' 즉 "아버지 없음(부정상실)"으로 명명되어 있다. 이번 숨겨진 4대 장막에서는 2시간 어레인지 연출판으로 "부정상실" 즉 "파더레스"로 제목을 붙이게 되었다.

젊고 매력적인 미망인 안나의 귀향기념 파티. 그를 사랑하는 혹은 채무관계인 혹은 친구들이 파티를 위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한다. 이들의 관계는 복잡하게 얽혀있지만 내색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광란의 파티가 시작되고 이 복잡한 관계가 서서히 드러나면서 주변 사람들은 혼돈에 빠지며 극단적인 선택과 행동을 하기 시작한다.

인류의 불확실한 미래와 상실의 시대는 바로 "아버지 없음"이다


연출가 노트

 

흔히 요즘 지금의 세대를 상실의 세대 즉 아비 부재의 세대라고 합니다

아버지라는 존재가 돈 버는 기계로 전락되거나, 혹은 아버지가 없어도 생존이 가능한 시대이며 편모슬하가 옛날처럼 그렇게 큰 일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없는 사회란 우리에게 어떤 의리로 다가오는 것일까요.

이미 문학에서는 이러한 테마가 오래전부터 다루어졌지만, 90년대 말 특히 일본에서 두드러지는 지배적인 테마가 된 적이 있습니다. 재일작가 유미리의 '가족시네마', 모리타 요시미츠의 '가족게임'이나 시게노 요시야의 다큐영화 '파더레스' 등은 바로 이러한 정서현상의 나타남이라고 볼 수 있지요

일본 세기말의 현상이 이제 우리에게 다가오는 듯 합니다.

하지만 전 단순히 사회적인 관점에서 좀 더 새로운 관점으로 이러한 문제를 해석하겠습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서로의 영혼이 교류되는 존재라고 가정한다면 지금같이 아버지에 대한 불신과 정체성의 혼돈은 무엇보다도 내 존재의 절반에 대한 위협이 되는 것입니다.

누군가 말했죠.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한 쪽이 다른 쪽을 물들여 버리는 것이 아니라 양쪽이 각자의 색깔을 하나로 용해시키듯 또 다른 세계를 각자의 생으로 더하는 일'이라고

그렇다면 우리는 아버지와 어머니로 부터 두 가지 영혼의 색깍을 받아 또 다른 존재로 살아갈 소중한 영혼인 것입니다.

우리 현대 사회는 그런 것을 풍족히 해결할 수 없는 극단적 핵가족입니다. 그러기에 내 색깔만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러한 상실감에 의해 치열한 갈구가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갈구가 바로 번식의 본능입니다. 불확실성한 미래에 대한 본능은 바로 SEX 즉, 사랑의 갈구가 되는 것입니다. 사랑이 부족하면 애정결핍이 나타나고 그것을 채우기 위한 본능적 욕구가 발생하게 되어 기형적인 표출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사회적 현상은 바로 부정의 상실이 원인라는 것이죠.

이것이 바로 체홉 초기작 "파더레스"의 주제와 가까워지는데 그것이 바로 신(아버지)에 대한 갈구로 귀결되어질 수도 있으니까요

이 작품은 결국 신의 부재를 말하고 있습니다.

신의 존재를 우리는 과학적으로 부정하더라도 마음 속의 신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이 바로 우리의 영혼이니까요.


 

오늘의 배우들은

주현주 (안나 역), 김원경 (플라토노프 역), 진민범 (세르게이 역), 김세윤 (싸쌰 역), 정유림 (소피아 역), 박준홍 (나꼴라이 역), 박장용 (뽀르피 역), 성가인 (마리아 역), 나신영 (따냐 역), 정승현 (오싶 역), 김현서 (메이드 역) 입니다

젊은 연극답게 젋은 배우들도 많고 극의 전개 때문일까요? 여성배우들도 많습니다.

한 두분을 제외하고는 그래도 얼굴이 낯설지만은 않은 배우들이네요.

(자세한 인물의 성격은 뒤에 카드뉴스로 확인하세요)

 

안똔체홉의 장극들을 동일한 무대에서, 비슷한 배우들을 통해 먼저 접해서 일까?

무대세팅이 흥미롭기도 하고 낯설기도 합니다.

(일반적인 무대는 대저택이 주가 되었었는데)

휴양지를 표현한 배경답게, 수영장도 있고...

 

작품의 첫 느낌은 "낯설음"!

기존의 체홉작품과는 너무나 다른 전개와 성적, 관능적 표현이 생경합니다.

그의 다른 작품에 비하면 성적인 접근에 좀더 직관적이라고 해야 할까? 노출신도 더 많기는 합니다.

역시나 젊었던 안똔체홉의 시각으로 그려진 희곡이라서 일까요? 다른 작품에 비해 말초적입니다.

 

작품 속 인물들은 자기만의 생각, 사랑, 인간관계 속에서 살아갑니다.

그 안에서 반성도 하고, 새로운 삶을 꿈꾸기도 하고, 여전히 쾌락을 추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반성과 고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파멸적 삶으로 돌진해 나갑니다.

그것이 파멸의 종착역에 이를 것임을 알고도 멈추지 않고, 길을 바뀌지도 않습니다. 

"파더레스"는 사고의 대립, 행동의 불완전성, 사고와 행동의 불일치,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등이 왜곡된 성적 욕구로 표출되는 현상을 그대로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 원인은 결국 신(神)이 우리와 함께하지 않는다는 '신의 부재' 탓이라고 말합니다.

(성장과정 속 무언가의 부재가 이후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는 정신분석학적 사조와 일맥상통할지 모르는)

하지만 아버지의 부재(파더레스), 신의 부재라는 핑계를 대지만 ,

사실 그 삶 안에는 자신의 부재가 있을 뿐인 것은 아닐까요?

 

 

6시간의 장극을 2시간짜리로 압축한 결과물답게, 극은 흥미진진하고 시간가는 줄 모르게 지나갑니다.

하지만 배역간의 몰입도에는 차이가 있는 듯 합니다.

또한 전개간의 개연성도 아쉬움이 남기는 하구요.

안똔 체홉의 기존 작품에 대한 익숙함으로 인한 낯설음은 극이 끝난 후에도 여전하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