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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접하게 된/책

2019 제43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 윤이형 - 그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고양이

by 심심한 똘이장군 2020. 3. 21.

문학사상과의 저작권 문제 등등으로 오히려 뒤늦게야 더 이슈의 중심에 서게 된

2019 43회 이상문학상 작품집, 그리고 윤이형 작가, 최은영 작가.

해명과 사과 등등의 논란의 와중에 윤이형 작가의 절필 선언까지 이어졌으니 안타까운 마음이 더 크다.

하지만 많은 분야에서 여전히 불조리함이 관행이라는 단어로 대체된 체 묵인되고 있는 현실 속에서 사람들의 의식변화에 뒤처지는 제도와 관행들의 개선이 이루어졌으면 좋겠다.

 

계약과 운영, 저작권의 문제와는 별개로

여전히 이상문학상이라는 단어의 무게감이 적지는 않다.

또한 무게감으로 인해 수상작과 작가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 또한 사실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윤이형 - 그들의 첫 번째와 두 번째 고양이

 

희은과 정민이 키우던 반려묘 치커리순무

반려묘의 죽음을 계기로 만나게 되는 그들이 반려묘의 죽음에 대하여, 그들의 결혼생활에 대한, 그리고 그 과정에서 서로가 겪어야 했던 고통과 각자의 노력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간다.

(육아와 관련된 연구소 프로젝트 속의 이야기는 너무도 의도적 장치로 느껴져 오히려 몰입에는 방해되는 느낌이다)

결혼과 육아의 생활 속에서 자신이 꿈꾸던 삶을 잃어간다는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와 서로를 위한 이혼, 그리고 각자의 삶속 현실에 안주해 가는 모습은 결혼이야기속 모습과 어딘가 닮아있다.

 

이토록 끔찍한 악의들로 가득 찬 세상에도 실은 그것이 당장 형체 없이 무너져 내리지는 않게 떠받치는 젓가락처럼 가느다란 의지들이 있음을, 그러므로 그것을 알게 된 이상 자신은 다른 누군가를 탓할 권리를 영원히 빼앗겼음을 깨달았다. 세상은 아무것도 안 하고 내내 손 놓은 채 놀다가 치커리가 죽게 만든 것이 아니었다.

 

반려묘 치커리”, 그리고 순무의 죽음.

그들의 죽음은 누군가의 무관심, 사회의 무관심 때문에 발생된 죽음이 아니다.

좋아질 거라는 믿음, 최선을 다한 각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어쩔수 없이 맞이할 수 밖에 없는 그 죽음은,

희은과 정민이 아무리 결혼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는 아무리 아등바등해도 멀어져가기만 하는 그들의 삶의 목표 실현이라는 현실의 과정을 느껴가는 과정과도 같다.

 

희은이 그 시간 내내 확신을 갖고 떠올릴 수 있던 유일한 단어는 부질없다였다. 희은이 그동안 해온 모든 일, 의지를 곤두세우고 땀을 흘려 마침내 손에 넣은 그 모든 성취와 삶의 기쁨들이 일관적으로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단 한 번도 자살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고, 언제나 죽음의 반대편으로 있는 힘을 다해 내달렸으며, 어떤 순간에도 생존을 경멸해본 적이 없던 과거의 자신이 기이하고 생경하게 느껴졌다.

 

희은은 열정이 소진되는 것이 두려웠다. 정민은 꿈을 이룰 수 없게 되는 것이 무서웠다. 그런 것이 그들의 생에서 가장 큰 공포였다. 삶 자체, 일상 자체, 생활이라는 거대한 턱 자체가 그들을 입에 넣고 단번에 머리와 몸통, 사지로 토막 내 바닥에 침과 함께 뱉어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상상하지 못했다.

 

두 사람 안에 내재해 있던 영혼의 좋은 부분, 선의와 호의, 배려심 들과 악당이 되기 싫다는 욕망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그것은 불가능하고 또 무의미한 일이었다. 그들은 각자 좋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쁜 사람이 되는 법을 몰랐기 때문에, 또는 그저 서로를 사랑했기 때문에, 더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했다. 그들은 각자 가해자로 몰리기 싫었기에, 피해자가 되는 쪽이 더 유리했기에, 더는 견뎌낼 힘이 없어서, 혹은 정말로 피해자였기에, 피해자로 인정받고자 했다. 이 두 문장 사이에 건널 수 업슨ㄴ 심연이 놓여 있고, 이 모든 가능성이 제각기 설득력 있어 보인다 한들, 이 가운데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를, 어떻게 명확하게 가려낼 수 있을까? 그들은 침묵 속에서 은밀하게 고통의 경쟁을 시작했다.

 

부질없는 삶, 부질없는 노력.

서로가 피해자이지만, 서로가 가해자 일 수 밖에 없는 결혼이란ㄴ 제도 속에서 그들의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이혼이라는 선택을 한다.

 

어느 날 밤, 그는 잠든 순무를 무릎에 올려놓은 채 맥주를 마시면서 혼자 영화를 보았다. 밤은 길었고, 그런 밤은 처음이었다. 그는 작은 방은 채운 조용하고 소박한 모든 것들을 친밀하게 느끼면서 자신에 대해 생각했다. 자신의 소망에 대해, 욕망에 대해, 삶이 자신에게 주기를 바라는 구원과 보상들에 대해. 그는 한 모금씩 자신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속도로 혼자 천천히 걸어가는 사람이기를 원했고 예전의 자신을 회복하는 일이 그에게는 중요했다.

 

결혼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니 희은과 정민은 각자의 삶에서 현실을 받아들이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꿈을 이루어간다.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아직도 꿈을 이루어가는 과정에 있을런지도)

아니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다시 돌아가고 있다.

 

희은은 앞으로는 누군가보다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쁘더라도 그저 자신이 되기 위해 살겠다고, 어려워도 그러려고 노력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고양이의 죽음을 통해 마주한 희은의 삶은, 작가 윤이형의 삶과 연결된다.

그리고 그저 자신이 되기 위해 살고자 하는 희은의 마음은 작가 윤이형의 마음과 같다

윤이형은 말한다.

지금의 자신에게는 거창한 것들은 크게 의미가 없다. 왜 쓰는가, 무엇을 위해, 어떤 목소리로, 지금 여기에 어떤 이야기가 필요하고 시대와 타인의 고통에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하는 지에 대한 고민과 대답들이 사랑하는 고양이의 몸이 소각로에서 타버릴 때 타버린 것 같다고.

작가인 자기에게 중요한 것은 이제 쓰고 싶은가 아닌가의 문제일 뿐이라면서 말이다.

 

그런데 과연 결혼을 하면 자신을 잃고, 이혼을 하면(또는 혼자의 삶이)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것일까?

일부는 동의할 수 있지만, 전적인 동의는 할 수 없다.

환경이 중요한 요소이긴 하지만, 그것이 모든 요소는 될 수 없듯이

결혼이, 이혼 후의 개인적 시간이 주어진 조건으로 바뀌었다고 해서 모두가 자신의 삶을 찾아갈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은 여전하다 

 

 

장강명 현수동 빵집 삼국지

 

세계 경제 속 원리가 그대로 작은 동네 빵집들 간에도 벌어진다.

그대로인 파이를 나눠 먹으려는 사연있는 사람들의 싸움.

 

나눠 갖긴 뭘 나눠 가져, 처음부터 확 밟아줘야 돼.

 

자신감과 실력.

상대를 이기기 위한 싸움.

 

자신들이 마분지로 만든 배를 타고 강을 건너고 있다고 생각했다. 무사히 강기슭에 이를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 싸움이 처절해질수록, 그들의 삶은 더욱 처절하게 늪 속에 빠져 든다.

잘 짜여진 자본주의의 체계 속에서 그들은 누군가가 쳐놓은 덫에 얽혀 발버둥칠 뿐이다.

 

주영은 동국에서 사는 물고기들을 상상했다. 빛이 없고 먹을 것이 모자란 좁은 공간에서 오래 살면서 눈이 퇴화하고 피부도 투명해진 작고 불쾌한 생물들. 불필요한 기관은 모두 버리고 오직 생존만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존재들. 주영은 하중동사거리와 구수동사거리가 그런 동굴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그 맑고 깜깜한 물속에 갇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