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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접하게 된/책

내게 무해한 사람 - 최은영

by 심심한 똘이장군 2019. 4. 27.

‘그 여름’이라는 글을 읽으면서, 어딘가에서 읽은 것 같은 문장,

심지어 이야기의 전개와 결말까지도 그려지는 당혹감.

뭐지 이 소설, 이 작가라는 생각!!!

그러다 불현 듯 떠오른다.

이 소설...이 작가...

‘내게 무해한 사람’이라는 장편소설이 아니라, 최은영 작가의 단편소설 모음집이라는...

그랬다. ‘그 여름’이라는 작품은 2017 젊은 작가상 수상작품집을 통해 이미 경험해 본 소설이었다.

      

소설은 단편의 숫자만큼이나 많은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 여름’의 수이와 이경

‘601 602’의 주영과 효진

‘지나가는 밤’의 주희와 윤희

‘모래로 지은 집’의 모래, 공무, 나비

‘고백’의 주나, 미주, 진희

‘손길’의 혜인, 숙모

‘아치디에서’의 랄도와 하민

그리고 그들의 주변에서 그들의 일상에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까지

 

다양한 단편 이야기들이지만 이야기들은 일정한 패턴을 따라간다.

현재의 시점에서 방황하던 과거를 회상한다.

그 시절, 자신의 삶을 살지 못하던 방황의 인물들은 존재가치에 대한 고민들로, 그리고 경험이 없기에 미숙할 수밖에 없는 삶들을 살아간다.




삶은 단 한 순간의 미래도 보장하지 않는다


그리고 서로가 서로에 대한 상처를 주었는지도 모른채,

아니면 서로가 서로에게 구원의 손길이었음을 알지도 모른채 그 시절을 지나온다.

 

이야기 속 여성들은 피해자이자 가해자다.

피해자이자 가해자임을 스스로 속이며 그 당시의 자신을 지키는 존재들이다.

그저 나의 행동이나 사고가 다른 이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는 ‘무해한 존재’일 거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면서 말이다.

그것이 외로웠기 때문이라고만 치부해 버릴 수 있을까?



수이는 자기 정체성이 밝혀진 뒤 모두로부터 외면당하는 꿈을 자주 꿔왔다고 했다. 자신은 어린 시절에 이미 스스로에 대해 알았다고. 세상에 여자를 좋아하는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알기 전부터도

“나는 내가 무서웠어.”



효진이를 위협하고 자신의 엄마를 함부로 대하는 태도에서 나를 향한 부정적인 감정이 느껴져서였다. 그의 공격성에는 일종의 징그러움이 있었다.



엄마의 일부는 그 수식이 부당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보다 더 큰 엄마의 일부는 그 수식을 수의처럼 입고 있었다.




혼자를 견디지 못하고 사람을 찾게 될 때가 있잖아. 그게 잘못은 아니지. 외롭다는 게 죄는 아니지. 알면서도 왜 네가 그러고 지내는 모습을 견디기 힘들었을까. 너에게서 내 모습이 보여서였나봐. 그게 너무 지긋지긋해서 그랬나봐. 나도 그랬으니까. 나는 그저 그 마음을 억눌렀던 것뿐이었으니까




어린 시절은 다른 밀도의 시간 같다고 윤희는 생각했다. 같은 십 년이라고 해도 열 살이 되기까지의 시간은 그 이후 지나게 되는 시간과는 다른 몸을 가졌다고. 어린 시절에 함께 살고 사랑을 나눈 사람과는 그 이후 아무리 오랜 시간을 보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끝끝내 이어져 있기 마련이었다. 현실적으로 서로 아무 관계 없는 사람들로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미래가 환상일 뿐이라는 거 알아. 우리는 현재만을 살 뿐이고, 모든 일의 끝을 어림하는 게 어리석은 생각이라는 것도 알아.



어른이 되고 나서도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노력할 때마다 나는 그런 노력이 어떤 덕성도 아니며 그저 덜 상처받고 싶어 택한 비겁함은 아닐지 의심했다. 어린 시절 어떻게든 생존하기 위해 사용한 방법이 습관이자 관성이 되어 계속 작동하는 것 아닐까. 속이 깊다거나 어른스럽다는 말은 적당하지 않았다.

이해라는 것, 그건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택한 방법이었으니까



왜 이해해야 하는 쪽은 언제나 정해져 있을까



그때의 나는 화가 났을까 슬펐을까. 아마 외로웠던 것 같다. 나는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나의 자아를 부수고 다른 사람을 껴안을 자신도 용기도 없었다. 나에게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 영혼은 “안전제일”이라고 적힌 조끼를 입고 헬멧을 쓰고 있었을 것이다. 상처받으면서까지 누군가를 너의 삶으로 흡수한다는 것은 파멸. 조끼를 입고 헬멧을 쓴 영혼은 내게 그렇게 말했다.



중력도 마찰력도 없는 조건에서 굴린 구는 영원히 굴러간다.

영원히 천천히 굴러가는 공을 생각했어. 그 꾸준함을 상상했어. 이상하게도 눈을 감고 그 모습을 그려보면 쓸쓸해지더라. 데굴데굴 굴러가는 그 모습이 어쩐지 외로워 보여서. 그래도 우린 중력과 마찰력이 있는 세상에 살고 있어서 다행이구나. 가다가도 멈출 수 있고, 멈췄다가도 다시 갈 수 있는 거지. 영원할 순 없겠지만. 이게 더 나은 것 같아. 이렇게 사는 게



누구나 살면서 몇 개의 다리를 건너듯이, 그때의 나도 공무와 모래와 함께 어떤 길고 흔들리는 다리를 건넜는지도 모른다. 다리의 끝에서 각자의 땅에 발을 내디뎠고, 삶의 모든 다리가 그렇듯이 그 다리도 우리가 땅에 발을 내딛자마자 사라져버렸다. 다리 위에서 우리가 지었던 표정과 걸음걸이, 우리의 목소리, 난간에 몸을 기댔던 모습들과 함께




시간이 상처를 무디게 해준다는 사람들의 말은 많은 경우 옳았다. 하지만 어떤 일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그 진상을 알아갈수록 더 깊은 상처를 주기도 했다.



우리는 때때로 타인의 얼굴 앞에서 거스를 수 없는 슬픔을 느끼니까. 너의 이야기에 내가 슬픔을 느낀다는 사실이 너에게 또다른 수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잊은 채로.



그런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기대고 싶은 밤. 나를 오해하고 조롱하고 비난하고 이용할지도 모를, 그리하여 나를 낙담하게 하고 상처입힐 수 있는 사람이라는 피조물에게 나의 마음을 열어 보여주고 싶은 밤이 있었다. 사람에게 이야기해서만 구할 수 있는 마음이 존재하느지도 모른다고 나의 신에게 조용히 털어놓았던 밤이 있었다.




우리는 열심히 살아간다.

주위를 둘러보는 것, 나를 되돌아 보는 것조차 잊어버린 채

어떤 삶을 위해, 어떤 삶을 살아가는 지도 모른 채 말이다.

그래서 한번 쯤은 반문해 보고 싶다.


너 왜 여기 있어?



난 항상 열심히 살았어.

나는 ‘살다’라는 동사에 ‘열심히’라는 부사가 붙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hard'는 보통 부정적인 느낌으로 쓰이는 말 아닌가. ’hardworking'이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사는 게 일하는 건 아니니까. 어떤 맥락에서 그 말을 하는지 궁금했다. 자기를 몰아붙이듯이 살았다는 것인지, 별다른 재미 없이 살았다는 것인지, 열심히 산다는 게 그녀에겐 올바르다는 가치의 문제라는 것인지, 삶의 조건이 그녀를 힘들게 했다는 것인지 말이다.



삶이 자기가 원치 않았던 방향으로 흘러가버리고 말았을 때, 남은 것이라고는 자신에 대한 미움뿐일 때, 자기 마음을 위로조차 하지 못할 때의 속수무책을 나도 알고 있어서



그리고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그래도 넌 언젠가는 자신의 삶을 살아갈거야

넌 네 삶을 살 거야